585. 갈림길 (5)
백주천은 우물 안의 봉황이 되기 싫었다.
남들에게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봉황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남들이 우러러봐야 봉황도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백독문의 문주인 백주천은 우물 안의 봉황보다는 세상에서 활개 치는 늑대가 더 보기 좋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위치가 늑대가 아닌 최소 호랑이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독과 불로장생에 대한 깨달음도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독지회를 앞둔 이 시점에 백룡의 여라희가 찾아온 것이다.
백룡을 뛰쳐나온 자신을 찾아올 이유는 바로 그곳의 규율을 지키기 위함이 분명했다.
여기서 규율이라는 것은 백룡의 밖에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는 반드시 그들의 손으로 처단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긴장하면서 이 자리에 나왔는데 상황은 달랐다.
여라희는 오히려 공손한 태도로 백주천에게 부탁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단주, 말씀 낮추시죠.”
백주천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상대의 눈치를 봤다.
이렇게 말해 놓고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상대는 백룡의 유일한 무력대인 청빙단의 단주였다.
그것도 나이도 알 수 없고 무공의 깊이도 모르는 신비한 여인.
백주천에게 그녀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높이고 부탁을 해 온다.
백주천의 가슴이 더욱 뛰기 시작했다.
여라희가 살짝 표정을 풀었다.
백독곡에서 처음 보인 표정의 변화였다.
살얼음 같은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출가외인이라 해서 말을 높였네. 네가 그리 말한다면 편히 말하마.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녀의 말에 백주천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단주님, 말씀하시죠. 어디에 쓸 재료입니까? 하독이 아닌 해독이라고는 제 아우에게 들었습니다.”
“직접 보게.”
여라희가 손을 들었다.
그 모습에 백주천의 눈이 커졌다.
다시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가 긴장하고 있을 때, 여라희의 손길은 그녀가 들고 온 침상으로 향했다.
사실 백주천도 무거운 침상을 왜 이곳에 들고 왔는지 궁금했다.
백주천의 두려움이 호기심으로 바뀔 때였다.
침상의 윗부분이 스르륵 움직이며 벗겨졌다.
안쪽에는 눈이 부실 정도의 광채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광채는 한기를 같이 내뿜고 있었다.
백주천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한기.
그가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나자 여라희는 다시 손을 한 번 내저었다.
순간 한기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여라희가 기막을 펼쳐 한기를 차단한 것이다.
여라희는 안쪽을 확인하라는 듯 턱짓했다.
백주천이 조용히 안쪽을 들여다봤다.
순간 백주천의 눈이 커졌다.
자연스럽게 입을 한계까지 벌린 백주천은 할 말을 잊고는 어깨를 살짝 떨었다.
* * *
같은 시각.
한빈과 적혈맹호대는 추룡산맥을 막 벗어났다.
이제 하루만 더 가면 백독곡이 위치한 화련산의 초입이었다.
추룡산맥을 빠져나오면서 그들은 제법 많은 일을 겪었다.
그만큼 추룡산맥은 꽤 험했다.
얼마나 험했는지 초입에서 독각서우와 있었던 일은 모두 잊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빈의 일행 중 가장 힘든 모습을 보이는 것이 세 명의 각주였다.
그중에서도 현무각주 담천호는 아예 모든 것은 포기한 듯 눈이 풀려 있었다.
그의 앞에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양의 약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담천호는 자신의 짐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에 짧은 휴식 시간 동안 최대한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운기조식으로 내력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멀리 보이는 화련산을 가리키며 외쳤다.
“출발!”
순간 현무각주가 다급하게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가부좌를 급히 풀고 한빈의 소매를 잡았다.
“헉, 헉.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공자!”
“엄살이 심하십니다, 현무각주.”
“그런데 왜 저만 미워하십니까?”
“제가 왜 현무각주를 미워합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맡은 짐만 이렇게 많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야, 현무각주의 무공이 가장 높으니 가장 많이 들어야 공평하지 않습니까?”
“아, 아무리 그래도…….”
“호흡이 안정적인 걸 보니 아직 힘이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헉.”
현무각주 담천호가 헛숨을 내쉬었다.
잠깐의 운기조식으로 내력을 회복한 것이지 힘이 남아도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빈의 말대로 세 명의 각주들은 구걸십팔보의 첫걸음을 뗐다.
이건 담천호, 자신이 생각해도 기가 막힌 기연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세 명의 각주에게 특훈을 시켰다.
요리를 위한 토끼를 잡아 오는 것이 각주들의 임무였던 것.
추룡산맥의 토끼들은 다른 곳의 산짐승보다 몇 배는 빨랐다.
그 토끼를 잡기 위해서라면 죽을힘을 다해서 구걸십팔보를 펼쳐야 했다.
구걸십팔보에 들어가는 내력은 상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진기를 다리와 발로 보내니 남아날 내공이 없었다.
그러고도 대부분의 짐은 각주들의 차지였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다 보니 담천호는 구걸십팔보의 묘리를 삼 성가량 깨달을 수 있었다.
거기에 현문과의 대련도 계속되었다.
깨달음을 얻은 현문의 검은 이전보다 더욱 매서웠다.
상처를 내지는 않으면서도 철저하게 각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현문이 무당의 도인인지 사파의 수괴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제는 검이 눈앞까지 와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이런 기연을 담천호는 고마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리에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내력이 고갈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때 한빈이 담천호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려놓았다.
청아한 기운이 현무각주의 어깨를 타고 흘러갔지만, 정작 그는 느끼지 못했다.
순간 현무각주가 휘청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그러다가 귀한 약재를 쏟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현무각주가 다시 중심을 잡았다.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던 장자명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각주들에게 감정이입이 된 듯 장자명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산맥을 넘는 동안 장자명도 그들 못지않게 고생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이런 감정을 공유하던 이는 화산파의 서재오였다.
그런데 지금은 서재오가 자리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장자명은 담천호와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장자명은 조용히 약초 더미를 바라봤다.
그들이 가지고 온 약초 중 반 정도는 모두 소모했다.
덕분에 조향각주 악필승과 주작각주 가기군의 짐은 반도 남지 않았다.
문제는 현무각주 담천호가 짊어진 약초는 하나도 안 썼다는 점이었다.
약초 중 반을 쓴 이유도 다소 황당했다.
각주들은 이곳에 오면서 현문과 실전에 가까운 수련을 해야 했다.
덕분에 그들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다.
그 약초를 써서 각주들을 치료한 것이 바로 장자명이었다.
그러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각주들은 자신의 몸을 치료할 약을 들쳐 메고 산맥을 넘은 것이었다.
덕분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물론 담천호만 괴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무공이 낮은 주작각주 가기군과 조향각주 악필승도 죽을 맛이었다.
더욱이 무공에 관심이 없는 악필승의 경우, 이번 여정은 고문과도 같았다.
담천호는 앞사람의 뒤꿈치만 보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모두의 귓가에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잠시 멈추세요!”
그 목소리에 행렬이 멈췄다.
앞쪽에서 심미호가 달려왔다.
심미호가 맡은 것은 정찰이었다.
앞뒤로 오가며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심미호의 임무.
그녀의 외침은 예상 못 한 상황이 일어났음을 의미했다.
모두는 걸음을 멈추고 병기를 꺼내 들었다.
스릉.
긴장한 그들의 모습과는 달리, 심미호는 아무렇지 않게 한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심미호의 표정을 본 일행들은 다시 병기를 갈무리했다.
한빈의 앞에 선 심미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주군, 말씀하신 물건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같이 가 보자고, 심 부대주.”
“이쪽이에요, 주군.”
심미호가 앞장서서 안내했다.
경공술을 써서 바람처럼 달려가던 심미호가 자리에서 멈췄다.
심미호를 따라가던 한빈도 걸음을 멈추고 심미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거지꼴을 한 사내가 물건을 잔뜩 쌓아 놓고 허벅지를 긁고 있었다.
행색이 어찌나 지저분한지 그가 허벅지를 긁을 때마다 냄새가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한빈은 더는 다가가지는 않고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거지가 돌아봤다.
한빈을 확인한 거지는 바람처럼 뛰어왔다.
타다닥.
상대가 방정맞게 뛰어오자 한빈이 손바닥을 보이며 막았다.
“거기서 멈추지, 광개.”
“팽 공자, 오랜만에 봤는데 이렇게 날 거부하다니 좀 서운한데…….”
그는 다름 아닌 개방의 광개였다.
광개는 정말 서운한지 울 듯한 강아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씻고 좀 다니라고 했는데 그새 잊어 먹었군.”
“분타주가 씻고 다니면 체면이 안 서서 그러니 이해해 주게, 팽 공자.”
“그런데 준비한 물건은?”
“저쪽에 마련해 뒀지.”
광개가 뒤쪽을 가리켰다.
뒤쪽에는 구 층 석탑 높이의 짐이 쌓여 있었다.
그 짐을 본 한빈이 물었다.
“자네 혼자 옮겼나? 저 정도면 구걸십팔보를 극성까지 익혔다는 건데……. 축하할 일이군.”
한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구 층 석탑 높이의 상자를 들고 산길을 달려오려면 구걸십팔보를 극성까지 익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빈의 칭찬에 광개가 활짝 웃었다.
“하하, 고맙네.”
물론 이건 광개가 한빈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꾸민 일이었다.
한빈과 약속한 뒤 광개는 이 많은 상자를 수하들을 통해 여기에 옮겨 뒀다.
그러고는 태연스럽게 이곳에 혼자 앉아 한빈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광개는 한빈의 칭찬을 한 번이라도 듣고 싶었다.
한빈과 광개는 잠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때였다.
팽혁빈 일행이 뒤쪽에서 다가왔다.
팽혁빈이 광개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 후 뒤쪽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저게 무엇입니까? 광개 소협.”
“팽 공자에게 못 들으셨습니까?”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사실 이곳에서 광개 소협을 만날 줄도 몰랐습니다.”
“허, 팽 공자가 말 안 했군.”
“대체 저게 뭡니까? 광개 소협.”
“저는 끝까지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대체…….”
말끝을 흐린 팽혁빈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대체 저건 무엇이냐?”
“당하기만 하니 뒤통수가 근질거리네요, 형님.”
“그게 무슨 말이냐?”
“그래서 반격 좀 하려고 준비했습니다. ”
말을 마친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설화가 구 층 석탑 높이로 쌓인 상자를 덮고 있던 천을 걷어 냈다.
그곳에는 백 개는 되어 보이는 새장이 있었다.
그 안에는 햇빛을 본 비둘기가 퍼덕이고 있었다.
날갯짓하는 비둘기를 보면 천 리라도 날아갈 것처럼 생생했다.
비둘기를 확인한 한빈이 설화에게 보따리를 날렸다.
획!
보따리를 받은 설화가 그곳에서 가느다란 대나무 통을 꺼내어 비둘기 다리에 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