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4. 갈림길 (4)
장자명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분명히 독각서우는 한빈을 위해 이곳에 독각을 가져다가 놓은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길들인 것이 아니라 적의가 없다는 것만 판단했다지만, 이건 놈들의 선물이 분명했다.
우연의 연속이 연달아 일어날 수는 없는 일.
장자명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독각을 살폈다.
적어도 스무 개는 넘어 보였다.
이제 문제는 이 많은 독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장자명이 독각을 만질 수 있었던 것은 은사로 만든 장갑 덕분이었다.
이것은 백독곡에서 몰래 가져온 물건이었다.
문제는 무당산으로 향하면서 독각을 계속 들고 다닐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설사 양보해서 장자명이 고생을 자처한다고 해도 독각을 아무 대안 없이 옮기는 것은 무모했다.
장자명은 딱 하나의 독각만을 챙기려고 했다.
나머지 독각을 모두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독각이 충돌하면 독기가 폭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죽어서도 성질을 죽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는 이들도 있었다.
“흠, 이걸 어쩐다…….”
장자명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살펴본 독각 정도의 순도라면?
독각이 터진다면 집 한 채를 녹여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 위험한 물건을 무당까지 옮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장자명이 미소를 지었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 근처에 파묻어 놓고 돌아올 때 다시 찾는 것이었다.
장자명은 자신의 지혜에 감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기상천외한 방법이었다.
약초꾼도 드나들지 않는 추룡산맥의 초입이었다.
이곳을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장자명이 떠올린 이는 당연히 한빈이었다.
무당산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운반 도구만 구하면 된다.
독기를 완벽하게 틀어막을 수 있는 튼튼한 도구를 구한다면, 이곳에 묻어 놓은 모든 독각을 하북팽가로 운송할 수 있었다.
장자명이 자화자찬을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장자명의 귓가에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딱.
상념에서 깬 장자명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다시 튕겼다.
딱.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기에 장자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설화와 청화는 바로 옆에 있었다.
한빈의 소리에 반응할 사람이 여기 말고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호기심에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야, 팽 공자님이 널 부른 것이냐?”
“저 부른 거 아닌데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소리가 달라요.”
“내가 듣기에는 똑같은데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다, 허허.”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을 튕기시는 것 같지만, 묘하게 다르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저를 부른 게 아니에요.”
“허허.”
헛웃음을 터뜨린 장자명이 이번에는 한빈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도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들 바닥에 떨어진 독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륵.
스륵.
그 소리에 장자명이 뒤쪽으로 물러났다.
장자명이 느끼기에는 기분 나쁜 소리였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멀리서 검은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신형이 점점 가까워지자 장자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신형의 주인은 다름 아닌 심미호였기 때문이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장자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심미호가 뭔가를 힘들게 끌고 오고 있었다.
스르륵.
스르륵.
심미호는 불길하게 생긴 기다란 상자를 끌고 있었다.
점점 심미호가 다가오자 장자명이 입을 벌렸다.
유난히 눈에 띄는 불길하게 생긴 상자 때문이었다.
심미호가 끌고 오는 것은 다름 아닌 관이었다.
여기저기 녹슨 자국이 있었고 이끼까지 끼어 있었다.
적혈맹호대에는 익숙하지만, 장자명에게는 다소 낯선 물건이었다.
사천당가에서는 한빈을 지켜 줬던 물건이었다.
거기에 하북팽가에서는 한빈이 독공을 과시하기 위해서 썼었고.
스륵. 스륵.
관을 한빈 앞까지 끌고 온 심미호가 가볍게 포권했다.
“가져왔어요, 주군.”
“고생 많았어, 심 부대주.”
“그런데 이걸 어디에 쓰시게요?”
“아무래도 여기에 보관해야 할 물건이 생길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벌써 생겼네.”
한빈이 뒤쪽을 힐끔 바라봤다.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바닥에 뒹구는 독각을 바라봤다.
“저게 다 뭐예요?”
“독각서우가 흘리고 간 뿔이야. 일단 뚜껑 좀 열어 봐.”
“네, 주군.”
심미호는 관을 열었다.
끼긱.
관이 불길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뚜껑이 열리자 안쪽을 살펴본 한빈이 빙긋 웃었다.
“자리가 딱 맞네.”
“그게 무슨…….”
고개를 숙이며 묻던 장자명이 입을 벌렸다.
불길하게 생긴 모습과는 달리, 관 안에는 정체불명의 상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장자명이 다급하게 물었다.
“호, 혹시 이건 전부 현철입니까? 팽 공자.”
“역시, 장 의원은 알아보시는군요.”
“그럼 이 관도 현철로 만든…….”
“네, 맞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자명이 관 뚜껑을 쓰다듬었다.
마치 귀한 보물을 보듯이 말이다.
장자명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도 현철의 가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관 안에 있는 조그만 상자만 해도 집 한 채 가격이었다.
그런데 이게 모두 현철이라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장자명은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돈을 잔뜩 벌어 사매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는 꿈이 있기 때문이다.
장자명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를 실룩였다.
마치 이 중 십분지 일 정도는 자신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거기에 안쪽에 있는 상자도 모두 현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비어 있는 상자도 있고 뭔가 가득 차 있는 상자도 있었다.
장자명이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을 때, 청화가 자연스럽게 독각을 주워 작은 상자 안에 담았다.
독각을 채운 작은 상자는 현철로 만든 관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 모습에 장자명이 물었다.
“저, 저걸 왜 다 챙겨 가십니까? 팽 공자.”
“그냥 두면 누가 다 가져갈 거 아닙니까?”
“그래도 저걸 가지고 무당에 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여기 놔뒀다가 빼앗기는 것보다야 좋은 선택 아닐까요?”
“팽 공자는…….”
장자명이 재빨리 말끝을 흐렸다.
괜히 말을 해 봤자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것 같아서였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의 사문인 백독문에 도착할 예정.
사부가 자신을 본다면 어디 하나 부러질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문으로 향하는 것은 한빈의 약속이 절대적이었다.
한빈이 약속한 것은 딱 하나였다.
백독문에 도착하면 장자명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런 한빈의 성질을 건들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무사안일을 위해서라도 한빈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장자명이 한빈을 힐끗 보며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팽 공자는 역시 영웅이십니다.”
“욕심 많은 것과 영웅이 무슨 상관입니까?”
“영웅이 달리 영웅이겠습니까? 욕심이 있으니 천하를 아우르는 것이지요.”
“장 의원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입에 침을 좀 바르시지요.”
“…….”
장자명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흐를 때였다.
장자명이 뭔가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백년열화초는 얻으신 겁니까?”
“여기에 잘 있습니다.”
한빈이 자신의 목걸이에 달린 은색 구슬을 가리켰다.
장자명이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는 두 개만 얻으시면 되겠군요.”
“사실, 그 두 개도 미리 구해 놨습니다. 이제 삼황초는 다 얻은 겁니다.”
한빈이 자신의 목에 걸린 줄을 흔들었다.
한빈의 말대로 그곳에는 은빛 구슬이 몇 개 더 있었다.
“대체…….”
장자명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물어볼 것이 산더미였지만, 지금 그것을 물어봐도 되는지 판단이 되지 않아서였다.
말끝을 흐리던 장자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삼황초를 다 구하셨다면서, 왜 백독곡으로 가는 겁니까? 그냥 지나치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곳에 꼭 가야 합니다.”
“정 가고 싶으시다면 무당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르시죠.”
“안 됩니다.”
“대체 왜 지금 백독곡에 들러야 하는 겁니까? 팽 공자.”
“삼황초보다도 더 귀한 것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태혈고를 해독할 수 있는 삼황초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팽 공자의 말씀대로라면, 무당에 하루빨리 가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장자명은 필사적이었다.
한빈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장담했지만, 믿을 수는 없었다.
사실 그보다 장자명은 그의 사부를 보기가 겁이 났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상태가 내세우기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빈과의 계약 기간까지만 버티면 사부 앞에서도 당당해질 터였다.
장자명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 천수장을 떠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장자명의 변화무쌍한 표정을 본 한빈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심정은 이해합니다.”
“제 심정을 어떻게…….”
“저도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요.”
한빈이 장자명의 어깨를 토닥였다.
물론 그 경험은 전생에 있었던 일이었다.
“제 심정을 이해해 주신다면 나중에 들르시면 안 되겠습니까? 귀중한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찾아 드리겠습니다.”
“재미로 백독곡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당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열쇠 하나를 더 얻어야 합니다.”
“그 열쇠가 게 뭔지 말해 주지 않으시겠죠?”
“그야 당연히……. 비밀입니다.”
“하하.”
장자명이 허탈하게 웃었다.
* * *
이틀 후.
백독문의 연공실.
백독문의 문주인 백주천이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상대방의 태도 때문이었다.
백독문이란 이름으로 강호에 나오기 전 그가 몸담았던 곳이 바로 백룡이었다.
백룡은 조직이나 문파 같은 것은 아니었다.
북해빙궁을 만든 세 부족 중 하나였다.
백룡과 백경 그리고 백호족이 바로 그 세 부족이었다.
북해빙궁이 만들어지고 백호족의 족장이 궁주가 된 후, 백룡과 백경은 뒤로 물러났다.
강호에 이름을 알린 북해빙궁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백룡은 북해의 독과 깨달음을 연구하며 나날을 보냈었다.
그들의 기품은 하늘을 찔렀으나.
그들은 속세에 욕심이 없었다.
백주천이 백룡을 나온 이유였다.
백룡에는 하나의 규칙이 있었다.
나가는 자는 막지 않는다. 하지만 영원히 돌아올 수는 없다.
누가 보면 그곳에 있는 것이 무슨 혜택이라도 되냐며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천고의 기연이라는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연구하는 독과 깨달음은 바로 불로장생에 관한 것이었다.
백주천의 앞에 있는 여라희의 나이는 몇 살일까?
백주천이 열 살 때도 지금의 저 외모였고.
칠순이 된 지금도 외모는 똑같았다.
즉, 나이를 알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들은 신선이었다.
그렇다면 백주천이 그곳을 뛰어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백룡의 사람들은 신선이며 봉황과도 같은 영험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 봉황이 우물 안에 갇혔다는 것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