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1. 갈림길 (1)
현문이 헛숨을 토해 낸 이유는 간단했다.
한빈의 동작에서 마지막 한 수 따위는 없었다.
한빈은 자기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붓끝을 거뒀다.
현문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깨달음의 끝자락을 얼핏 본 것 같았던 현문이었다.
그런데 한빈의 동작은 중요한 것이 빠진 것만 같았다.
중요한 것은 모두 철저히 숨기고, 빈껍데기만 보여 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어찌 된 일일까?
한빈이 고의로 동작을 숨긴 것일까?
마지막 한 수를 볼 수 있다면…….
그가 숨도 쉬지 않고 한빈을 바라볼 때였다.
한빈이 고개를 돌리더니 현문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를 띠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현문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딱 벌렸다.
한빈의 얼굴을 보고 떠오른 것은 계약서였다.
만약에 자신이 한빈의 동작을 보고 깨달음의 끝자락을 봤다는 걸 안다면?
분명 한빈은 공짜는 없다면서 계약서를 들이밀 것이 분명했다.
위험이 닥치면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지만, 평상시에는 공과 사를 철저히 한다는 것이 현문의 머릿속에 있는 한빈이었다.
현문은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마치 표정을 바꾸는 것보다 숨기는 게 더 편하다는 듯 말이다.
물론 한빈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현문만은 아니었다.
한빈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눈빛이 이상했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영물에게도 계약서를 쓰게 하려는 한빈의 집요함에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은 이게 모두 한빈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시선에도 한빈은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두 자루의 붓을 설화에게 건넸다.
설화는 태연하게 보따리에 두 자루의 붓을 다시 넣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이다.
그때였다.
독각서우의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황제를 본 신하처럼 놈들은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타닥. 타닥.
한꺼번에 여러 마리의 독각서우가 움직이자 산중이 흔들릴 정도였다.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적혈맹호대 대원들도 잔뜩 긴장한 채 상황을 주시했다.
더 이상한 것은 독각서우의 무리가 천천히 뒷걸음치며 자리를 떠났다는 점이었다.
마치 충실한 신하가 예의를 다하기 위해 물러서는 모습과도 비슷했다.
독각서우의 무리가 떠나자 공터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모두는 멀어져 가는 독각서우의 무리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은 듯 입만 벌리고 있었다.
물론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독각서우 무리가 아니었다.
한빈은 용린검법의 글귀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빈의 앞에는 새로운 글귀로 가득 차 있었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천급 구결 사(似)를 획득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래에는 한빈이 얻은 구결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천급 – 대(大), 비(非), 만(晩), 사(似)]
[알 수 없는 구결 : 삼(三)]
구결 네 개를 모았지만, 새롭게 조합되는 초식은 없었다.
‘대’, ‘비’, ‘만’, ‘사’라는 네 글자는 각기 다른 초식임이 분명했다.
용린검법에 들어맞는 초식이 있었다면, 저절로 조합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은 네 개의 구결이 조용히 용린검법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천급 초식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누군가 한빈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 모습은 제법 은밀했다.
이곳에서 은밀하게 다가올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도둑질하다 들킨 듯한 표정으로 현문이 소리를 질렀다.
“헉!”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간덩이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렇게 갑자기 돌아보면 내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지 않나?”
“슬금슬금 다가오시는데 제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흠…….”
헛기침하며 슬쩍 눈치를 보는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에도 현문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그렇게 티를 내며 바라보는데 한빈이 모를 수는 없었다.
대충 상황을 살핀 한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으니 저는 이만…….”
“잠시만 기다리게. 저쪽으로 가서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지요.”
한빈은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경계 태세를 풀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적혈맹호대를 쓱 지나쳤다.
그들은 절벽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빈은 주위를 확인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편안히 말씀하시죠.”
“자네! 뭔가 빼먹지 않았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까 붓으로 묘한 수법을 펼치지 않았나? 다른 이들은 못 봤지만, 나는 그 수법을 똑똑히 봤다네.”
“흠.”
이번에는 한빈이 헛기침했다.
무엇을 알아봤는지가 불분명했다.
만약 현문이 용린검법을 알아봤다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대답을 조심해야 했다.
“역시 숨겨 둔 한 수가 있었군. 자네는 그것을 펼치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숨겨 둔 한 수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빈이 황당하다는 듯 현문을 바라봤다.
상대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문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자네는 독각서우의 등에서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이 분명해. 그런데 그 깨달음을 모두 다 갖지는 못했을 것이고…….”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했던 대화에서 살짝 비켜 나가는 분위기였다.
현문은 독각서우의 등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 그것을 초식으로 펼쳤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현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그 초식의 끝을 왜 펼치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라는 것은 한빈도 알아챘다.
초식의 끝이라?
그런 게 어디 있을까.
한빈은 빠르게 움직이는 구결을 얻기 위해 용린검법의 초식으로 그 경로를 따라잡았을 뿐이었다.
거기에서 새로운 초식을 얻었다니?
당치도 않았다.
게다가 한빈이 얻어야 할 것은 이미 모두 얻었다.
그 결과가 지금 허공에 떠 있는 용린검법의 구결이었다.
독각서우는 아낌없이 주는 영물이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빼먹었는데,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펼치지 않은 초식도 없을뿐더러 남아 있는 구결도 없었다.
의문 가득한 한빈의 표정을 본 현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의 붓놀림 말일세. 마치 검로를 보는 것 같았네.”
“보법이 아니라 검로 같다고요?”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보법이란 단어를 뱉었다.
이것은 실수였다.
상대에게 오해의 여지를 남길 수 있는 단어였다.
하지만 현문은 오히려 손을 내저었다.
“여기서 보기에는 검로 같았네. 그런데 왜 마지막 한 수를 보여 주지 않았는가?”
“흠, 저는 검로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 움직임은 우연일 뿐이었습니다.”
“분명히 보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연히 움직인 것은 아닐 터, 그 끝을 보여 주면 안 되겠나?”
집요한 현문이었다.
한빈은 이쯤 해서 이야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독각서우의 등에 있는 벌레를 잡아 준 것뿐입니다.”
“그런데 왜 벌레를 잡는 데 보법을 썼나?”
“벌레의 움직임이 이상해서 그것을 따라잡기 위해 경공술을 쓴 것입니다.”
“허허, 그러니까……. 손으로 검술이 아닌 경공술을 썼다는 것인가?”
“네, 맞습니다.”
“…….”
현문은 말없이 한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한빈은 슬쩍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대답이 어설펐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의 구결이 바닥을 드러내서일까?
아마 지의 구결이 남아 있었다면 조금 더 그럴듯한 변명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지의 구결은 시간이 흘러도 저절로 채워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공력을 나타내는 공이나 속도를 나타내는 속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한계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지의 구결만은 예외였다.
그런 의미에서 ‘감언이설’은 앞으로 다시 쓸 일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때마다 한계까지 찬 구결을 모두 초식 하나에 쏟아부어야 하니 말이다.
그때였다.
현문이 손뼉을 쳤다.
짝!
갑작스러운 행동에 한빈이 재빨리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하늘이 내린 인재가 분명하군.”
“지금 저보고 하신 말씀…….”
“당연하지 않나? 하늘이 내린 인재가 아니라면 어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는가!”
말을 마친 현문이 눈을 빛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한빈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고 웃었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니니…….”
“잠시 호법 좀 부탁하네.”
“호법이라니요?”
“잠시 내가 생각할 것이 있다네.”
말을 마친 현문이 갑자기 자리에 앉았다.
난데없는 상황에 한빈은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다시 돌아보니 현문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갑자기 무아지경에 든 것이다.
한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이 둘러대느라 꾸며 낸 말 한마디에 저렇게 무아지경에 들다니!
현문이 만약 이번 깨달음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태극검제를 따라잡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순간 한빈의 눈이 커졌다.
현문은 둘도 없는 한빈의 아군이었다.
그런 현문이 깨달음을 얻는다면 천급 구결을 피워 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것은 현문에게 닥친 기연일 뿐 아니라, 한빈의 기연일 수도 있었다.
한빈은 입맛을 다시며 현문을 바라봤다.
들숨과 날숨에서 현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번 무아지경은 예사롭지 않았다.
한빈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문의 깨달음이 우연일까?
착각으로 저렇게 무아지경에 들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생각이 이어 나가던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독각서우의 등에서 어지럽게 떠다니던 구결의 흔적이 보법이 아니라 검법이라면?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구결의 흔적을 떠올리며 맨손으로 허공을 그어 봤다.
어라?
한빈의 눈이 커졌다.
현문의 말대로였다.
독각서우의 등에서 불규칙하게 움직이던 구결은 흔적.
한빈은 그것을 경공술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손으로 허공에 그것을 재현해 보니 이것은 분명한 검술이었다.
그것도 제법 수준이 높은 검술이었다.
태극의 묘리가 느껴지면서도 변칙적으로 패도적인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곡선과 직선의 절묘한 조화를 품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한빈은 손으로 검법을 재현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현문의 말대로 뭔가가 빠진 듯 보였다.
그렇다면 현문은 지금 무엇을 깨닫고 있을까?
한빈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절벽 쪽으로 나머지 일행도 다가왔다.
그들은 무아지경에 든 현문을 보며 입을 벌렸다.
놀람도 잠시,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한빈의 명이 없어도 무아지경에 든 현문을 위해서 동서남북의 방위를 점하며 자리 잡았다.
이곳까지 함께한 현문을 당연히 식구로 여기고 있던 것.
한빈은 슬쩍 손을 거두었다.
흔적에 관한 연구는 혼자 있을 때 따로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심미호가 다가왔다.
“공자님, 현문 어르신을 위한 호법 배치는 끝냈고 설화와 청화는 주변에 먹을 게 있나 찾겠다고 나섰습니다.”
“둘을 믿어도 될까?”
한빈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심미호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