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 기연은 구결을 싣고 (6)
붓을 멈춘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동작을 멈춘 한빈의 모습은 마치 검객이 기수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모습에 팽혁빈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이 상황을 두고 봐야 할지가 판단이 되지 않았다.
붓을 잡고 기수식을 취하는 한빈도 이해가 안 되었지만, 강아지처럼 등을 맡기는 독각서우의 모습도 이상했다.
상황에 비해 분위기가 너무 평화로웠다.
이 모든 것이 마치 폭풍 전야처럼 느껴졌다.
저 독각서우가 갑자기 떼로 공격해 온다면?
한빈뿐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위험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팽혁빈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판단을 재촉하듯 팽혁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심미호도 불안한 듯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고려해야 할 최선이 한빈의 안전이라는 것을 팽혁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빈의 표정은 기연을 앞둔 무인 같았다.
여유롭게 보이지만, 갈증을 느끼는 듯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소군이 팽혁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고개를 부드럽게 내젓는 소군의 모습에, 팽혁빈이 알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대화는 오가지 않았지만, 소군의 뜻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소군의 눈빛은 깨달음의 전조라는 것이었다.
영물의 등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팽혁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우의 기행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모두 넓게 간격을 벌려라. 내 아우뿐 아니라 독각서우도 보호해야 한다.”
“존명.”
심미호가 포권하며 다른 적혈맹호대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들은 넓게 진영을 갖추고 한빈뿐 아니라 독각서우 무리를 보호했다.
사실 심미호는 지금 누가 누굴 보호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숫자로만 봐도 독각서우 무리가 더 많았다.
주군인 한빈뿐 아니라 독각서우까지 보호하다니?
의문도 잠시, 그녀와 적혈맹호대는 눈을 빛내며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변화와는 관계없이 한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한빈이 이렇게 긴장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보이는 구결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독각서우가 구결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잘해야 앞으로 반 시진.
그 이후에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 확실했다.
문제는 시간 안에 구결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할 듯 보인다는 점이다.
자신이 구결을 획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등을 내민 독각서우를 보면 구결을 한빈에게 주려고 힘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하지만, 끙끙대는 소리가 미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에 반해 구결을 나타내는 흔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올챙이가 커다란 우물 속에서 빠른 속도로 헤엄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혼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그 속도였다.
화경의 고수와 버금가는 한빈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일단은 흔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지금 살짝 아쉬운 것은 ‘지(智)’의 구결을 모두 소모했다는 점이었다.
지의 구결만 온전히 남아 있었다면 지금의 상태를 추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감언이설을 사용하기 위해서 지(智)의 구결 백 개를 모두 소모한 상황이었다.
지의 구결 없이 이제까지의 경험만으로 현상을 파악해야 했다.
지금 구결을 나타내는 흔적의 움직임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흔적이 움직이는 경로가 마치 고수가 경공술을 펼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자신의 눈과 손으로도 따라가지 못하는 경공술이라면?
구걸십팔보에 비견될 경공술이 분명했다.
경공술이라고 생각하니, 흔적이 휘도는 움직임이 마치 고수가 펼치는 보법처럼 눈에 들어왔다.
두서없이 날뛰는 것 같지만, 분명히 규칙이 있었다.
한빈은 흔적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잠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모두의 호기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을 때, 한빈이 눈을 떴다.
한빈의 눈빛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한빈이 설화를 바라보며 외쳤다.
“설화야, 붓 하나만 던져라!”
“여기 있어요, 공자님.”
설화가 붓 하나를 던졌다.
휙.
한빈은 날아오는 붓을 잡아 들었다.
양손에 붓을 든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 중 부창부수의 초식을 펼쳤다.
‘부창부수!’
‘전광석화!’
‘유유상종!’
부창부수는 쌍수를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초식.
용린검법의 흔적이 남은 초식을 마치 하나의 손으로 펼치는 것처럼 쓸 수 있었다.
거기에 전광석화를 더했다.
마지막으로 상대의 초식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천급 초식인 유유상종을 펼쳤다.
유유상종을 쓴다면 흔적의 기묘한 경로를 따라갈 수 있을 터였다.
지금 펼치면 보름간은 쓰지 못하겠지만, 구결을 획득할 방법은 이것이 유일했다.
한빈의 붓이 독각서우의 등을 누볐다.
방법은 간단했다.
기묘한 경로는 같은 방법으로 앞을 막아선다.
획!
한빈의 붓이 흔적의 경로를 막았다.
그러고는 다른 손이 움직이는 흔적을 찍었다.
휙!
순간 허공에 떠 있는 용린검법이 반짝였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천급 구결 비(非)를 획득하셨습니다.]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한빈의 붓이 움직이려는 찰나, 다시 경로에 변화가 생겼다.
물론 그 경로에 따라 한빈의 붓이 바뀐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지금 한빈의 붓은 유유상종의 효능을 담고 있으니까!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천급 구결 만(晩)을 획득하셨습니다.]
점점 빨라지는 구결의 흔적.
그에 따라 빨라지는 한빈의 붓.
마치 도망가는 이와 그를 쫓는 이의 무한한 추격전을 보는 듯했다.
물론 이것은 한빈의 생각이고.
다른 이들의 느낌은 달랐다.
한빈의 붓놀림을 다른 이들은 따라가지 못했다.
그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빈의 수법은 지금 펼치는 초식의 삼분지 일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중간에 숨어 있는 오묘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한빈이 독각서우의 등에 계약서를 새겨 넣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과정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 이는 없었다.
사삭. 사삭.
붓끝이 단단한 가죽을 누비는 소리에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이 혀를 찼다.
조호는 조심스럽게 장삼을 바라봤다.
“장삼 아저씨, 주군은 정말로 계약서를 쓰시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봐도 그렇구나.”
장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 있던 설화는 남은 붓을 들더니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었다.
그 모습에 조호가 물었다.
“설화야, 뭘 그렇게 적고 있어?”
“이게 다 교훈이잖아요, 조호 오라버니.”
“무슨 교훈?”
“계약서는 사람한테만 받는 게 아니라는 거요.”
“헉.”
“저도 공자님처럼 나중에 영물을 만나면 계약서를 받아 낼 거예요.”
“너는 영물과 계약한다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설사 계약서를 쓴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우리 공자님이 하고 계시잖아요. 공자님의 행동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다, 당연히 의미가 있으시겠지. 주군이 누구신데.”
“헤헤, 당연하죠.”
설화가 해맑게 웃으며 붓을 놓았다.
팽혁빈의 눈에도 한빈의 행동은 이상했다.
한빈이 초식을 펼치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무작위로 붓을 놀리고 있었다.
동작만 보면 계약서를 쓰는 모습이었다.
모두가 한빈의 행동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오직 현문만이 한빈의 붓끝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고 있었다.
현문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허허.”
그 목소리에 옆에 있던 팽혁빈이 반응했다.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검로가 묘해서 그러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 눈에는 그냥 붓으로 계약서를 쓰는 듯 보입니다.”
“아닐세. 자네도 저 검로를 보지 못했군.”
“검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것은 붓으로 글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붓으로 검을 대신한 것일세. 아마도 독각서우의 가죽 위에 뭔가가 새겨져 있을 수도 있겠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팽 공자만이 볼 수 있는 검로일 수도 있겠지…….”
“검로라니, 저는 이해가 안 가는 군요, 그런데 무슨 검로이기에 그렇게 놀라시는 겁니까?”
“저 검로가 마치 태극혜검의 경로와 흡사해서 그런다네.”
“태, 태극혜검과 같다니요?”
“똑같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하다는 것일세!”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 아우가 어떻게 무당의 최고 검법을 익힐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재미있는 것은 비슷하다는 것일세. 어찌 보면 건공구공으로 수련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보면 육합검(六合劍)과 비슷한 것 같고…….”
“그게 어찌 가능합니까? 지금 말씀하신 태극혜검은 상승 무공이 아닙니까? 그리고 건공구공과 육합검은 무당의 기본 무공이 아닙니까?”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 문파의 무공이었다. 근본은 같다고 하나, 상승 무공과 기본 무공의 검로가 비슷할 수는 없었다.
육합검이 하나의 획을 긋는 것에 불과하다면 태극혜검은 몇 백 개의 문장을 써 내려가는 것과 같다.
그 수준이 같을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팽혁빈이 보기에는 한빈이 붓을 놀리는 모습이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팽혁빈의 표정을 본 현문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상하다는 것이지. 혹시 자네 동생은…….”
“말씀하시지요, 어르신.”
“우리 무당의 시조가 현신하신 건 아닐까……. 하네만은?”
“시조님이라고 하시면?”
“장삼봉 조사님 말씀일세.”
“헉.”
“그냥 하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말게. 하하.”
현문은 짓궂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 웃음에 팽혁빈이 허탈하게 웃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농을 던지시니 저도 속았습니다.”
“다들 너무 진지해서 하는 말일세. 어찌 보면 저것도 팽 공자의 비밀 수련일지도 모르는 게 아닌가? 그냥 지켜보세나.”
“네, 알겠습니다.”
팽혁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문도 다시 한빈의 붓끝에 시선을 집중했다.
현문은 태양보다 강렬한 안광을 쏟아 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팽혁빈에게 한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한빈의 붓끝에서 태극의 기운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무당파의 향기를 맡은 것도 사실이었다.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렴풋한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고적 저 나이에 그런 성취를 보인다니!
거기에 무당을 위해서 목숨을 걸다니!
다른 이들도 사정을 알게 되면 무당의 시조인 장삼봉이 현신했다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현문이 숨소리를 죽였다.
한빈의 붓끝을 보고 있자니 잡힐 듯하면서도 안 잡히는 무학의 끝자락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한빈의 붓이 멈췄다.
순간 현문은 마른침을 삼키며 한빈의 붓끝에 집중했다.
마치 최후의 초식 하나를 보여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빈을 바라보던 현문은 헛숨을 토해 냈다.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