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 기연은 구결을 싣고 (5)
아우를 바라보는 팽혁빈의 눈빛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부담스러운 그의 시선에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모든 게 제 추측이죠. 제가 어떻게 영물의 말을 알겠습니까? 형님.”
“하도 네 주변에서 귀신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으니 물어봤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 것 같구나.”
팽혁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어색한 웃음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팽혁빈과 마찬가지의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
모두는 한빈이 영물들과 소통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추측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이 남만야수궁의 몇몇 고수는 영물과 소통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중원에서는 그 어떤 문파 혹은 가문에서도 이런 인재를 배출해 낸 적이 없었다.
만약 중원에서 영물과 소통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신선이라 불러야 했다.
팽혁빈은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갓 스물이 넘은 한빈이 어떻게 도인의 깨달음에 다다른다는 말인가?
문제는 지금의 광경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팽혁빈이 다시 한번 물었다.
“흠, 그러면 대체 저 영물들은 왜 저러고 있는 것이냐?”
“저도 그게 이해가 안 되어서 추측해 본 겁니다. 저 영물들을 보십시오. 제 말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 않습니까? 역시 영물은 영물입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힐끔 눈을 돌려 독각서우 무리를 바라봤다.
팽혁빈의 고개도 한빈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순간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설명치고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한빈의 말대로 두 마리의 우두머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순한 양과도 같았다.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호탕하게 웃는 팽혁빈을 본 한빈이 미소 지었다.
자신의 말 중에 반 정도는 진실이었다.
독각서우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한빈이 놈들의 사정까지 정확히 추측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한빈이 놈들과 합심해서 이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새로 얻은 천급 구결의 힘이 컸다.
한빈은 조용히 용린검법이 떠 있는 허공을 바라봤다.
[천급 초식 감언이설(甘言利說)……. 감언이설은 강호 최고의 언변술(言辯術)입니다. 다만, 적의가 없는 상대에게만 가능합니다. 감언이설에 성공하면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감언이설은 지(智)의 구결 백 개를 사용합니다.]
한빈은 죽어 가는 우두머리 독각서우를 살린 뒤 천급 초식 하나를 완성했다.
‘감언이설’은 한빈과 독각서우 무리가 공존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초식이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으로 상대를 현혹하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조건이었다.
상대가 적의가 없어야지 가능한 초식.
거기에 동물에게까지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한빈이 감언이설을 펼치는 순간, 앞선 두 가지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다행인 점은 우두머리 독각서우가 한빈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덕분에 한빈은 감언이설로 우두머리 독각서우를 통제할 수 있었다.
이후 우두머리 독각서우가 한빈의 수하처럼 행동하자 나머지 무리도 편안히 통제할 수 있었다.
군기가 바싹 든 병사처럼 저렇게 각을 잡고 호위하고 있는 모습은 한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갓 태어난 강아지처럼 혓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간밤에 적혈맹호대와 세 명의 각주를 쫓아다녔던 흉포한 짐승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독각서우 무리에서 거대한 수놈이 한빈의 앞으로 다가왔다.
타닥. 타닥.
굵직한 발소리가 산중에 울렸다.
한빈의 앞에 선 수놈 우두머리가 낮게 울었다.
크렁.
한빈이 바위로 착각했던 거대한 수놈이었다.
놈의 가죽 위에는 백년열화초가 아직 남아 있었다.
기괴하게 생긴 수놈을 본 적혈맹호대 대원들과 세 명의 각주들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한빈은 수놈을 보며 그윽한 미소를 짓고는, 오히려 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빈이 머리를 쓰다듬자 놈이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돌렸다.
이런 광경을 믿을 강호인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들도 직접 봤으니 이해가 되는 것이지, 이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죽에 백년열화초를 주렁주렁 매단 수놈이 한빈에게 이렇게 살갑게 구는 이유는 기사회생 중 반을 놈에게 썼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한빈은 놈들에게는 은인이었다.
놈들은 영물답게 그 은혜를 알고 있었다.
한빈은 조용히 설화를 바라봤다.
눈빛을 확인한 설화가 본능적으로 달려왔다.
사사-삭.
한빈의 앞으로 다가온 설화가 보따리를 펼친다.
“일단 여기 깔게요.”
보따리를 펼친 설화가 천천히 물건을 정리했다.
지필묵이 들어 있는 바로 그 보따리였다.
설화의 빠른 손놀림에 먹과 벼루 그리고 종이가 가지런히 바닥에 깔렸다.
그 모습을 보며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중 나이가 많은 장삼은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저게 무슨 일이냐? 조호야.”
“그러게 말이에요, 장삼 아저씨. 설마 독각서우와 계약하려고 하는 건 아니시겠죠?”
조호도 고개를 휘휘 저었다.
심미호도 옆에서 보더니, 조심스럽게 한빈을 가리켰다.
“그게 아닌데 왜 주군께서 보따리를 펼쳐?”
“아무리 그래도 저 영물하고 어떻게…….”
조호가 아니라는 듯 계속 고개를 젓자 심미호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조호, 너는 주군을 너무 우습게 보네. 우리 주군은 영물과 계약서를 쓰고 남을 분이야. 아니, 영물이어도 상대가 빚을 졌다면 죽어도 주군과 계약을 해야 할걸.”
“헉, 설마 그렇게까지……. 그런데 부대주님 말이 맞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은 뭐죠?”
조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을 바라봤다.
다른 이들도 한빈의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시선에 한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설화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럴 것 같아요.”
“정확히 봤다.”
“네?”
“빚은 어떻게든 받아 내야지. 그리고 말보다는 계약서를 쓰는 게 좋지.”
“그럼 진짜 독각서우와 계약을…….”
“설화야, 그건 잘못 짚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분명히 눈빛이 계약서를 원하고 있으셨잖아요.”
“내가 베푼 은혜를 어떻게 갚게 할까를 고민했을 뿐이다. 놈들에게 계약서를 받는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럼 계약서는 안 쓰는 거예요?”
“이놈들이 글을 알아야 쓰지.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 봐도 좋다.”
“저는 계약서 말고 생각나는 게 없어요. 저도 공자님하고 끈끈한 계약서로 맺어진 사이잖아요.”
“하하, 끈끈하긴 하지.”
한빈이 웃자 설화가 멋쩍게 웃었다.
“헤헤. 생각해 보니 저 영물들과 계약서를 쓴다는 건 불가능할 것 같네요. 그럼 지필묵은 다시 챙길게요.”
“잠시만!”
한빈이 손을 들자 설화가 다시 물었다.
“……진짜로 계약서를 쓰시려고요? 공자님.”
“계약서는 모르겠고……. 일단 붓은 필요할 것 같구나.”
말을 마친 한빈은 피식 웃으며 붓을 들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백년열화초를 달고 다니는 수놈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모습에 설화는 경악했다.
설화는 한빈이 진짜로 계약서를 쓸 줄은 몰랐다.
그저 눈빛이 계약을 원하는 것 같았기에 반사적으로 보따리를 앞에 풀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붓을 들고 독각서우의 앞에 섰다.
더 황당한 것은 독각서우가 등을 들이민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곳에 계약 내용을 적으라는 듯 말이다.
조용히 광경을 바라보던 팽혁빈이 얼마나 놀랐는지 득달같이 설화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더는 앞으로 가지 않고 설화의 옆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화야, 내 아우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으로 보이냐?”
“계약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너는 그게 가능하다고 보느냐?”
“에이,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우리 공자님은 대공자님의 아우잖아요.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흠.”
팽혁빈은 한 방 맞았다는 듯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개를 든 팽혁빈이 따가운 햇빛에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바라봤다.
모두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팽혁빈만이 놀란 게 아니었다.
태양은 적당히 떠올라 산자락의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환한 곳에서 바라보는 한빈의 행동은 더욱 미친 것 같았다.
그런데 팽혁빈은 말릴 수가 없었다.
아우가 뭔가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붓을 들고 상당히 고민하는 듯 보였다.
어디에 써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문장을 써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일까?
그때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의 주인은 현문이었다.
“허허.”
“어르신,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자네 표정이 웃겨서 그러네. 세상의 모든 짐은 혼자 짊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고민입니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아우가 저러고 있으니…….”
팽혁빈은 한빈을 걱정했다.
말도 안 되는 광경 때문에 잠시 넋을 잃고 있긴 했지만, 놈들은 흉포하기 그지없다는 독각서우의 무리가 맞았다.
옆에서 붓을 들고 있다가는 언제 다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한빈이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휙. 휙.
한빈의 붓은 검보다도 빨랐다.
붓을 들고 독각서우의 등에 획을 긋고 점을 찍었다.
말도 안 되는 모습에 설화마저 입을 탁 벌렸다.
“고, 공자님이 이상해요.”
“언니가 좀 말려 보세요.”
청화도 거들었다.
하지만 둘 다 움직일 수 없었다.
붓으로 독각서우의 등에 글자를 쓰는 모습이 너무 진지해 보였기 때문이다.
대체 저 기괴한 행동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독각서우의 등판에 집중했다.
한빈이 기괴한 행동을 보이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독각서우의 등에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천급 구결을 나타내는 황금빛 흔적이었다.
마치 놈은 한빈이 구결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구해 줬으니 구결을 취하라는 듯 등을 내밀고 있었다.
아직 감언이설의 효과가 남아 있는지 한빈은 놈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우두머리 암놈에게서 천급 초식인 ‘감언이설’을 얻었다. 그런데 우두머리의 짝까지 이렇게 등을 내미는 모습에 한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놈들은 아낌없이 구결을 주는 영물이었다.
구결을 받으라고 등을 내미는데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고맙다고 하면서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구결이 잠시도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구결을 취하라고 등을 내밀어 줬지만, 등판에서 빠르게 회전하듯 움직이는 흔적 때문에 한빈은 난처해하고 있었다.
구결을 취하면서 놈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검 대신 잡았던 것이 바로 붓.
회전하는 흔적을 따라 긋고 찍고를 반복하다 보니 다른 이들의 눈에는 계약서를 쓰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빈이 붓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