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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78화 (564/621)
  • 578. 기연은 구결을 싣고 (4)

    그들이 펼치고 있는 것은 구걸십팔보였다.

    다소 방정맞기는 했지만, 개방의 최고 경공술이라는 구걸십팔보가 맞았다.

    팽혁빈은 구덩이와 세 명의 각주들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 팽혁빈은 한빈과 한 가지 내기를 했었다.

    한빈은 세 명의 각주들에게 오늘 안에 구걸십팔보의 첫걸음을 걷게 만들겠다고 장담했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팽혁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공이란 단계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초식이든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그 근본에 다다를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한빈은 딱 잘라 오늘 안에 그들에게 구걸십팔보를 전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내기였다.

    큰돈이 걸린 내기는 아니었다.

    내기의 승자가 차려 주는 음식을 패자가 먹으면 되는 내기였다.

    아마도 상대는 생각지도 못할 음식을 먹으라고 요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때는 형제간에 할 수 있는 장난스러운 내기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었다.

    물론 지금은 웃을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 보니 아우의 말이 맞았다.

    조금 수법이 기괴하긴 했지만, 세 명의 각주는 구걸십팔보를 당당하게 펼치고 있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팽혁빈의 앞에 세 명의 각주가 도착했다.

    “대공자님!”

    현무각주 담천호가 포권하자 나머지 각주들도 동시에 깊숙이 포권했다.

    팽혁빈은 조용히 손짓했다.

    “다들 일어나시지요.”

    “이곳에 오면서 들었습니다. 막내 공자님이 독각서우의 무리에 포위되었다고…….”

    “확실한 건 아닙니다.”

    “모두가 저희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가 미흡한 탓에 막내 공자님이 무리하셔서 독각서우를 유인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를 구하시려고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은…….”

    담천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설명은 간단했다.

    그들은 한빈이 남긴 구결을 조합하며 달리다가 위험에 처했다고 한다.

    위기에 순간 독각서우 무리가 뒷걸음치더니 어디론가 뛰어갔다고 했다.

    이곳에 오는 도중에 설화를 만나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고 말이다.

    “여러분들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니 일단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모든 게 저희 때문입니다.”

    말을 마친 담천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털썩.

    같은 소리가 연달아 두 번이 더 들렸다.

    악필승과 가기군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사죄의 의미인지?

    아니면 존경의 의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갑자기 숙연해지는 분위기.

    시간이 정지한 듯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났다.

    산자락을 비추던 달빛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제 서서히 먼동이 트고 있었다.

    멀리서 고개를 쳐드는 태양 아래로 여러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앞에 모습을 보인 것은 흩어졌던 적혈맹호대를 이끌고 나타난 설화였다.

    현문 일행이 이곳으로 향하는 사이.

    설화와 청화는 다친 적혈맹호대 대원들을 치료한 후 그들을 한곳에 모아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숙연한 분위기에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상황을 살피던 설화가 고개를 돌려 소군을 업고 있는 현문을 바라봤다.

    “현문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팽 공자가 걱정돼서 이러고들 있단다.”

    “저희 공자님 걱정하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설화가 눈을 가늘게 뜨자 현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설화야.”

    “저기 뒤쪽 보세요. 쟤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데요.”

    “움직임이라니…….”

    현문은 말을 맺지 못했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입구에 있던 독각서우 몇 마리가 재빨리 흩어졌다.

    그 모습에 모두가 떠올린 것은 하나였다.

    본래 짐승들은 자연재해를 미리 알아채는 법이었다.

    미쳐 날뛰던 저놈들이 저리 두려워하는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산사태!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우웅!

    동시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독각서우가 주춤거리며 구멍이 있는 곳에서 더욱 멀리 떨어졌다.

    쿠우웅!

    한 번의 굉음이 더 울려 퍼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지축이 울릴 정도의 굉음이 연신 이어졌다.

    한빈이 괜찮을 거라고 한 소군마저도 얼굴이 파래져서는 어깨를 떨었다.

    경천동지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이건 지진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땅이 흔들릴 수는 없었다.

    거대한 존재가 산맥을 쥐고 흔드는 느낌.

    그때 팽혁빈이 외쳤다.

    “일단 모두 낙석을 조심하고 몸을 숨긴다!”

    그 말에 모두는 흩어졌다.

    위에서 굴러떨어질 바위가 없는 곳을 골랐다.

    몸을 숨긴 팽혁빈은 조심스럽게 앞을 살폈다.

    계속 지축이 흔들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바닥이 꺼질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쿠르릉, 쾅!

    동시에 팽혁빈의 시야를 흙먼지가 덮었다.

    마치 산사태라도 난 것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구멍을 중심으로 해서 폭삭 내려앉은 바닥.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독각서우 몇 마리도 자취를 감춘 상태.

    팽혁빈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내려앉은 바닥은 꽤 컸다.

    마치 분화구를 보는 듯 그 중앙을 중심으로 반구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저 안쪽으로는 어떤 공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저곳으로 내려간 독각서우는 물론이요, 저 밑에 사람이 있다면 무사할 수가 없었다.

    “아우야……!”

    팽혁빈은 나지막이 외치며 천천히 움푹 파인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자신의 도를 그곳에 꽂아 넣었다.

    그곳을 파헤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가 병기를 기구 삼아서 그렇게 바닥을 파헤치자, 다른 이들도 모두 아래로 내려왔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바닥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설화와 소군도 아래로 내려왔다.

    그들이 모두 바닥을 파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쩌저적.

    벽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에 모두는 위쪽을 바라봤다.

    구덩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절벽에서 바위들이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구덩이 안까지는 굴러들어 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짐승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닥. 타닥.

    군마가 줄을 지어 이동하는 듯한 소리에 그들은 눈을 크게 떴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구덩이 위쪽에서 커다란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독각서우였다.

    팽혁빈은 모두에게 외쳤다.

    “모두 준비하라!”

    그의 말에 적혈맹호대를 비롯한 각주들이 도를 튕겨 흙을 털어 냈다.

    그때 독각서우의 머리통이 한둘씩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놈들은 구덩이를 에워싸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장난감을 내려다보는 듯한 모양새.

    아무리 생각해도 무시당하고 있었다.

    팽혁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독각서우에게 포위당한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이 바닥에 묻혔던 독각서우가 왜 저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냐 하는 점이었다.

    그때 현문이 앞으로 한 발 나왔다.

    “내가 길을 뚫을 테니 모두 내 뒤를 따르도록.”

    말을 마친 현문은 내공을 다리에 모았다.

    팽혁빈은 현문의 몸에서 소용돌이치는 태극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첫 번째 초식에 모든 힘을 모으려는 듯 보였다.

    현문이 진득한 살기를 피워 내며 튀어 오르려 할 때였다.

    위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문 어르신, 잠시만요!”

    * * *

    현문과 팽혁빈 그리고 적혈맹호대 모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팽혁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우야,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이놈들 때문에 바닥에 있는 동공에 갇혔습니다.”

    “지금 내가 묻는 것은 그 말이 아니지 않느냐?”

    팽혁빈은 한빈의 뒤를 가리켰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의 뒤쪽에는 독각서우의 무리가 병사처럼 각을 잡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마치 한빈을 보호하려는 듯 말이다.

    팽혁빈이 질문을 던지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에게 검을 겨눴던 적이 아군이 될 수 있다. 그것이 강호의 생리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과 영물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영물이라는 게 성질이 가장 더럽다는 독각서우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 마리가 아니라 무리 자체가 한빈을 따르고 있었다.

    모두의 따가운 시선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드리자면…….”

    한빈은 제법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동공 안에는 두 마리의 독각서우가 있었다고 했다.

    두 마리의 독각서우는 이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였다.

    두 마리는 각각 하나는 암놈이요, 하나는 수놈이었다고 한다.

    이 무리는 특이한 것이 암놈과 수놈이 공동으로 무리를 이끈다는 점이었다.

    먼저 빠진 것은 바로 수놈.

    그놈을 살리기 위해 후에 들어온 것이 바로 암놈이라고 한다.

    그 뒤 다른 독각서우들이 두 우두머리를 살리기 위해 백년열화초를 구멍 속에 밀어 넣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힘은 찾았지만, 깊이가 꽤 깊은 관계로 놈들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한빈이 들어간 것이다.

    한빈이 그중 한 마리와 싸웠고, 놈이 쓰러지자 다른 독각서우들이 우두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 구덩이로 돌진한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깊고 넓었던 공간도 덩치 큰 무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꽉 차 버렸고, 급기야는 움직일 틈도 없이 서로 끼어서 죽을 처지에 놓였다고 한다.

    그때 공간을 만들어 탈출하게 해 준 것이 바로 한빈이고 말이다.

    여기까지가 한빈의 설명이었다.

    “그게 전부더냐? 그렇다면 그 우두머리라는 것이…….”

    “저 뒤쪽에 있는 놈입니다.”

    한빈은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른 독각서우보다 몇 배는 큰 놈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몸의 곳곳에 풀이 돋아난 기괴한 모양의 독각서우가 있었다.

    한빈은 그놈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한빈이 백년열화초를 채집한 바위가 바로 놈이었다.

    독각서우의 가죽은 바위 표면과 구별이 잘 안 간다는 점도 착각에 한몫했다.

    한빈은 과연 주저앉은 구덩이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진룡파혼검 덕분이었다.

    진룡파혼검을 쓰려면 일정 공간이 필요했다.

    한빈은 할 수 없이 첫수는 진룡파혼장의 수법으로 공간을 만들어 냈다.

    일단 움직일 공간이 생기자 한빈은 진룡파혼검으로 통로를 만들었다.

    그 결과 이곳이 무너지기 전에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절벽 쪽에 통로를 만들어 독각서우의 무리를 끌고 나온 것이다.

    한빈은 모든 설명을 다 끝냈다는 듯 활짝 웃었다.

    “목이 컬컬합니다. 혹시 남은 술이라도 있으면 한 병 주시죠, 형님.”

    “여기 있다.”

    팽혁빈은 아무렇지 않게 술병을 건네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의 설명 중에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빈이 술을 한 모금 넘기자 팽혁빈이 재빨리 물었다.

    “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만은…….”

    “그게 무엇입니까? 형님.”

    “너는 저 영물들의 사정을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것이냐?”

    팽혁빈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마치 저 영물들과 소통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영물들과 소통하지 않고서는 독각서우가 처했던 지난 이야기들을 소상히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팽혁빈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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