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 기연은 구결을 싣고 (2)
확실히 영물은 영물이었다.
수비하는 놈과 공격을 하는 놈들이 정확히 나누어져 있으니 말이다.
놈들은 제압하고 백년열화초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었다.
남이 백년열화초를 취하려고 하면 짓밟을지언정 빼앗기려고 하지 않는 것이 독각서우의 성격이었다.
전생에 정의맹에서 이곳의 백년열화초를 찾았던 것은 기연에 가까웠다고 들었다.
그때는 모든 독각서우가 떠난 상태였다고 한다.
남아 있는 독각서우의 사체와 배설물 등을 통해서 놈이 이곳에서 살았다는 것을 추측했을 뿐, 놈들과 마주치지는 않았다고.
지금은 전생과 상황이 아주 달랐다.
한빈은 품에서 붉은 통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붉은 통의 아래에 나와 있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지직.
심지가 점점 줄어들었다.
한빈은 불꽃이 붉은 통 아래에 숨어 들어가자 허공으로 던졌다.
‘백발백중!’
용린검법의 초식을 사용해서 던진 붉은 통은 정확한 지점을 향해서 날아갔다.
그곳은 독각서우의 무리가 모여 있는 곳의 위쪽이었다.
정확히 무리의 중심 위를 향한 붉은 통이 허공에서 보기 좋게 터졌다.
팡!
붉은색 불꽃이 보기 좋게 선을 그리며 내려왔다.
마치 밤하늘에 난을 그려 놓는 듯한 풍경.
하지만 그건 한빈의 입장이지, 독각서우는 움찔거리며 뒷걸음쳤다.
마치 사람과 비슷한 감정을 지닌 듯한 느낌이다.
두려움도 알고 지켜야 할 대상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유유자적’
유유자적은 이미 시험을 끝낸 초식이었다.
단순하게 기척을 숨기는 것뿐 아니라 그들과 동화되어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게 만드는 초식.
은신술과 귀식대법의 최고 단계에 속하는 초식이었다.
이 초식을 쓰기 위해서라면 잠시라도 놈들의 시선을 돌려야 했다.
놈들은 그 정도로 경계가 심했다.
신호탄으로 그들의 관심을 돌린 후 유유자적을 쓰면 아마도 놈들이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빈은 조용히 독각서우의 틈에 섞여 들었다.
놈들의 경계를 뚫은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안쪽에는 조그마한 굴이 있었다.
마치 두더지가 파 놓은 듯한 땅굴이었다.
물론 그 크기는 새끼 독각서우가 들어갈 정도는 되었다.
덕분에 한빈은 그 땅굴로 들어가는 데 문제가 없었다.
대신 땅굴로 들어서며 한빈은 검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언제라도 월아를 빼내기 위함이었다.
한빈이 경계하는 것은 함정이었다.
독각서우를 영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람만큼 지능이 뛰어나기 때문도 있었다.
사삭.
바닥에 내려앉은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두더지 굴처럼 허름한 통로를 거쳐 내려왔는데 안쪽에는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기관진식에 뛰어난 강호인이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안쪽에는 널따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한빈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땅속인데도 주변을 살피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한빈이 있는 공간의 벽면에는 발광버섯이 자라나 있기 때문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대낮처럼 환하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수십 마리의 독각서우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놈들에게 중요해 보이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거기에 아무런 함정도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한빈의 눈에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들어왔다.
그곳을 본 한빈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두 개의 바위 중 하나에 풀이 잔뜩 자라 있었다.
보름달이 여기에 비치지는 않지만, 그 풀이 백년열화초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독각서우의 배설물에서 났던 향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한빈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백년열화초를 채집했다.
조심스럽게 백년열화초를 은빛 구슬에 넣었다.
반원 모양의 은빛 구슬을 하나로 합쳐서 그것을 목에 걸었다.
지금 한빈의 목걸이에는 제법 많은 구슬이 걸려 있었다.
그 구슬 안에는 이제껏 수집했던 물건들이 들어 있다.
한빈은 중요한 물건들을 이렇게 구슬에 매달아 보관하고 있었다.
한빈이 이곳에 들렀던 용무는 모두 끝났다.
이제 왔던 곳으로 나가면 독각서우와의 인연도 끝이었다.
천천히 자리로 돌아온 한빈은 위쪽을 보며 구걸십팔보를 펼치려 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재빨리 동작을 멈췄다.
한빈이 들어왔던 입구가 막혔기 때문이다.
입구로 들어와서 하늘을 올려다보면 분명히 달빛이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꽉 막힌 듯 달빛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기분 나쁜 바람이 한빈의 뺨을 스쳤다.
휘릭.
한빈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집채만 한 독각서우 한 마리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방금 느꼈던 기분 나쁜 바람은 바로 놈의 콧바람이었다.
“대체…….”
한빈이 어이없다는 듯 놈을 바라봤다.
놈이 다가올 때까지 한빈은 기척을 못 느꼈었다.
한빈이 반박귀진을 펼칠 때와 비슷하다는 이야기였다.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한빈은 뒤쪽으로 물러났다.
놈의 입장에서 보면 한빈은 침입자였다.
한빈도 놈과 이곳에서 다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놈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상부상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한빈만의 생각이었다.
앞에 선 독각서우가 더욱 강한 콧김을 내뿜었기 때문이다.
내뿜는 콧김에서 열기가 전해졌다.
팔팔 끓는 주전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빈은 재빨리 검집째 들어 앞을 막았다.
독각서우와 한빈의 간격은 불과 한 걸음.
그때였다.
독각서우가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앞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고개만 움직여서 짧은 공격을 한 것이다.
한빈은 검집으로 독각서우의 뿔을 쳐 냈다.
전광석화의 효용이 담겨 있는 한 수였다.
그만큼 한빈의 대응도 빨랐다.
탕!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촌경!
지금 독각서우의 공격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였다.
공격에는 항상 준비 동작이 필요하다.
검이든 도든 지나온 거리에 비례해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일.
하지만 촌경이라고 하는 수법은 그 거리를 단축한다.
단 한 뼘의 공간에서 무시무시한 공격이 가능한 수법이다.
보통 내공을 이용한 타격에서 많이 쓰는 수법인데, 지금 독각서우가 그 수법을 쓴 것이다.
한빈은 재빨리 간격을 벌리고 콧김을 뿜어내는 놈을 자세히 관찰했다.
독각서우의 힘을 인간의 경지에 대입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놈은 이제까지 마주했던 그 어떤 적보다 강력할지도 몰랐다.
더 최악인 것은 입구가 막혀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까지 마주했던 적은 모두 한빈이 장소를 골랐다.
한빈보다 더 빠른 적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후퇴가 자유로웠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곳은 밀실에 가까웠다.
한빈은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순간 한빈은 입을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큰 바위 중 하나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 큰 바위 중 하나가 바로 이놈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더 최악이었다.
이건 놈들이 만들어 낸 함정이었다.
소란을 일으킨 적이 원하는 것을 알아채고 유인한 것이 분명했다.
한빈이 독각서우를 유인해서 백년열화초를 채집한 것이 아니라, 한빈이 유인당한 게 맞았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물러날 수 없는 상황.
상대를 죽이고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한빈이 처한 문제에 대한 정답이었다.
사실 미안하긴 했다.
내단도 없는 놈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한빈이 미안한 표정으로 외쳤다.
“미안하지만, 내가 살아야겠다!”
말을 마친 한빈은 월아를 검집에서 뺐다.
스릉.
냉랭한 날붙이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순간 놈이 신경질적으로 울부짖었다.
크릉.
마치 늑대의 울음소리와 비슷했다.
그때였다.
독각서우의 뿔이 변했다.
모양이 변했다는 것이 아니고 색이 변했다.
검은색이 점점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참!”
한빈이 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저건 분명히 내기를 운용하는 것이 맞았다.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독각서우도 무공을 펼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색을 바꿀 수는 없었다.
색의 변화만 보면 고수가 검기를 피워 내는 것과 흡사했다.
그때였다.
한빈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독각서우의 몸 곳곳에서 일렁이는 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체 너는 뭐냐?”
놈에게 대답을 구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눈앞에 보이는 일렁이는 점은 분명히 천급 구결을 나타내는 표식이 분명했다.
재미있는 것은 몸집이 큰 만큼 놈에게 나타난 천급 구결도 많았다는 점.
조금 과장하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한빈은 마른침을 삼킨 후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외침과 동시에 한빈의 신형이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슝!
동시에 독각서우도 달려왔다.
한 번의 도약 후 놈의 다리가 땅에 닿지 않았다.
마치 초상비, 즉 풀 위를 나는 듯한 수법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한빈은 빠르게 숫자를 셌다.
‘하나, 둘…….’
놈이 가까워지자 한빈이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펼쳤다.
‘허장성세.’
황금빛 불과 거의 맞닿으려 할 때였다.
월아가 흐물거리며 사라졌다.
태극을 그리던 월아가 옆으로 휜 것이다.
물론 한빈의 몸도 독각서우의 뿔 앞에서 사라졌다.
한빈은 어느새 뒤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독각서우가 한빈이 있던 자리로부터 한참 뒤에 있던 벽을 받았다.
순간 굉음이 귀청을 울렸다.
쾅!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지만, 한빈은 웃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의 눈앞에는 용린검법의 글귀가 떠 있었다.
공격에 성공했다는 말이었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천급 구결 이(利)를 획득하셨습니다.]
[천급 – 대(大), 이(利)]
[알 수 없는 구결 : 삼(三)]
드디어 새로운 구결이 떴다.
한빈은 월아를 살폈다.
방금 공격에 성공했지만, 손이 얼얼할 정도였다.
마치 강철을 검으로 내리친 느낌이었다.
거기에 더해 구결은 얻었지만, 독각서우의 가죽을 파고들지는 못했다.
자세히 보니 독각서우의 변화는 뿔만이 아니었다.
가죽에도 은은한 황금빛 기막을 피워 내고 있었다.
지금 독각서우의 모습은 마치 호신강기를 피워 내는 고수의 모습과도 같았다.
황금빛 호신강기를 피워 내다니!
놈이 강한 것은 확실했다.
다만 사람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경지와 관계없이 성동격서가 먹혔다.
만약 사람이라면 분명히 무공의 격차가 높다는 글귀가 나타났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한빈은 멀리서 황금빛 호신강기를 피워 내는 독각서우를 향해 나지막이 외쳤다.
“구결은 잘 먹겠다! 그리고 나머지 구결도 잘 부탁하지!”
이건 진심이었다.
구결을 다 취하고 길을 열기만 하면 놈을 미련 없이 보내 줄 것이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월아를 검집에 갈무리했다.
금강불괴를 이룬 고수와도 같은 놈이었다.
월아를 다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검집째 공격하나 검신으로 공격하나 구결을 얻는 것은 똑같았다.
구결을 모두 획득하고 하면 그 후 다른 길이 열릴 것이었다.
그동안에는 월아의 검신을 보호하는 편이 한빈에게 유리했다.
한빈은 검파에 있는 술로 검집을 단단히 묶었다.
검집째 들고 독각서우의 몸에 일렁이는 구결을 채집할 작정이었다.
한빈이 월아와 함께 다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