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6)
계산이 아닌 호승심으로 가기군이 움직였다는 점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한빈이 전한 구결처럼 그는 마음부터가 바뀐 것이었다.
가기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해 보였다.
그는 도갑을 움켜쥐고 왼쪽으로 돌아 독각서우의 앞을 막기 위해 자리 잡았다.
이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때였다.
독각서우가 움직였다.
크릉.
그 움직임을 본 가기군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막기 위해서였다.
독각서우가 어물쩍거리던 이유가 있었다.
커다란 코뿔소가 공격하지 않았던 것은 급한 용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각서우의 발밑에는 커다란 늑대의 무리가 짓밟혀 있었다.
그 늑대들은 하북에서 가장 사악하다는 잿빛 늑대를 닮아 있었다.
어찌 보면 추룡산맥의 북쪽에서는 보기 힘든 늑대였다.
독각서우는 늑대 무리를 잘근잘근 밟고 있었다.
더 무서운 것은 늑대도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어둠 속에서 틈을 노리기 위해서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저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언덕 반대쪽에서는 전혀 몰랐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즉, 독각서우의 뿔이 움찔대던 것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늑대를 밟고 있었기에 보인 움직임이었다.
어찌나 힘 조절을 잘했는지 늑대의 몸에서는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가기군은 이 부분이 기가 막혔다.
혈향이 흘러나오지 않게 늑대를 죽였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그것을 숨기기 위함이 분명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다음 목표물이 분명하고 말이다.
다음 목표물은 당연히 자신과 담천호일 것이었다.
가기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에 더해 가기군이 한 착각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독각서우의 크기였다.
조그만 새끼 무소라고 판단한 것은 실수였다.
독각서우는 보통의 무소와 생김새가 전혀 달랐다.
모양이 남만야수궁의 독각서우와 많이 다르다는 한빈의 말은 정확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거대했으며 뿔만 무시무시한 게 아니었다.
온몸에 창날을 닮은 검은 돌기가 솟아나 있었다.
크기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코뿔소는 몇 마리 합쳐 놓은 듯 거대했다.
마치 병사들이 쓰는 성문 파괴 무기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저것이 들이받는다면 화경의 고수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뿔만 보였기에 착각한 것이었다.
그때였다.
담천호가 바위 위로 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에 가기군은 재빨리 손을 교차시켰다.
계획을 중지하자는 신호였다.
가기군의 신호를 본 담천호가 도갑을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본래 계획은 간단했다.
바위 위에 올라서 도를 빼 들고 독각서우의 정수리에 그대로 도신을 박아 넣으려고 했었다.
백정이 소를 잡듯 말이다.
무소도 소가 아니던가?
독각서우도 무소에 불과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놈이 일반적인 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영물이니 정수리를 한 번에 꿰뚫지는 못해도, 충격을 가하면 쓰러뜨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기절시키기에는 충분한 한 수였다.
물론 지금 독각서우를 보고 난 담천호의 머릿속에서 이전의 계획은 싹 지워졌다.
도갑을 들고 있는 그의 왼손이 살짝 떨렸다.
이것은 본능이었다.
호승심이 가장 강하다는 담천호도 본능적으로 위축된 상황이었다.
조금 전 내단을 취하니 어쩌니 하던 자신의 말이 후회되었다.
담천호는 숨을 죽이고 다시 도갑을 허리에 찼다.
지금 독각서우의 가까이 있는 것은 담천호.
가장 위험한 것도 담천호였다.
뒤로 물러나던 담천호가 동작을 멈췄다.
독각서우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고 높은 바위를 쳐다보는 모습은 마치 기척이라도 느낀 것 같았다.
독각서우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놈은 뿔로 늑대의 사체를 툭툭 치더니 한곳에 모았다.
담천호는 그 모습에 아예 숨도 쉬지 않았다.
독각서우가 늑대의 사체를 정리하는 모습은 마치 흑도들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지금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치 다음 사냥을 위해 기척을 숨기는 사냥꾼의 모습이었다.
담천호는 석상이 된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독각서우는 방향을 돌렸다.
담천호가 있는 바위 쪽이 아닌 다른 쪽으로 바라보며 콧김을 뿜고 있었다.
독각서우의 코에서는 마치 연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짐승의 코가 아니라 굴뚝처럼 보일 정도다.
콧김을 쩍쩍 뱉으며 발을 구른다.
이제 목표를 정했다는 뜻이었다.
툭툭 뒷발로 흙바닥을 파는 모습은 목표를 향해서 단숨에 달려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분위기로만 보면 일격 필살을 준비하는 고수의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 공격이 자신을 향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담천호의 눈이 커졌다.
“저건…….”
담천호는 말끝을 흐렸다.
거대한 독각서우가 바라보고 있는 쪽에는 가기군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신호를 보낸 뒤 가기군은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그 모습에 높은 바위에 올라가 있는 담천호의 눈에는 모두 보였다.
가기군은 완벽하게 기척을 숨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위쪽에서 보기에는 독각서우에게 완전히 기척을 들켰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다음 목표물이 된 것이 분명했다.
사삭.
독각서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담천호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마치 고수가 초상비를 펼치는 것처럼 완벽하게 소리를 숨겼다.
사삭.
독각서우와 가기군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금만 더 있으면 가기군은 저 커다란 무소의 발에 밟힐 것이 분명했다.
담천호는 이를 악물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계획이었다.
가기군이 자리를 피하자고 할 때 독각서우를 잡자고 했던 것도 그였다.
비록 계획을 취소하자고 신호를 보내왔어도 최종 책임은 담천호가 지는 것이 맞았다.
그는 결심한 듯 품 안에서 뿔피리를 들었다.
한빈이 준 뿔피리였다.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한빈이 준 뿔피리를 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담천호가 재빨리 뿔피리를 불었다.
피리를 불던 담천호가 피리를 입에서 뗐다.
한빈이 위급할 때 불라고 준 피리는 막힌 것처럼 소리가 안 나왔다.
“이게 대체…….”
피리를 살피던 담천호의 눈이 커졌다.
뿔피리의 입구 쪽이 꽉 막혀 있었다.
아무래도 종이가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재빨리 종이를 뿔피리에서 빼냈다.
종이를 뺀 담천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세히 보니 종이가 아니라 얇은 천이었다.
담천호는 재빨리 천을 펼쳤다.
순간 담천호의 눈이 커졌다.
[마지막 구결은 각자도생(各自圖生)입니다. 그리고 이 식별 띠를 팔에 차시길 바랍니다.]
순간 담천호는 그대로 굳었다.
마지막 구결이 각자도생이라니!
각자도생이란 단어를 듣자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배가되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강호 속담이 떠올랐다.
담천호도 이것이 한빈의 배려라는 것은 알고 있다.
가슴속에서 구걸십팔보의 핵심이라는 간절함이 솟아오르니 말이다.
이것은 천수장의 훈련에서는 못 느꼈던 생존 본능이었다.
무공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치겠다는 결심은 눈 녹듯 사라졌다.
무공도 살아남아야 필요한 것이다.
담천호는 일단 각자도생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담고 한빈이 건넨 천을 팔에 둘렀다.
한빈의 말대로 그것은 식별 띠였다.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빈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 이곳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구걸십팔보의 걸음마를 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일단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쿠아앙!
고개를 돌려 보니 가기군이 숨어 있던 나무가 반 토막 나 있었다.
어른이 몸을 숨길 만큼 커다란 나무였는데 힘없이 쓰러진 것이다.
나무가 쓰러지는 충격 때문에 튕겨 나간 가기군의 모습이 들어왔다.
담천호는 재빨리 뿔피리를 불었다.
뿌우.
한빈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각자도생이라는 한빈의 뜻은 담천호도 알고 있었다.
단지 가기군을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기에 독각서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다행히도 담천호의 수가 먹혔는지 독각서우가 방향을 바꾸었다.
투-다다다닥.
이제는 기척을 숨길 필요 없다는 듯 달려오는 독각서우의 모습에, 담천호는 재빨리 기척을 숨겼다.
그러고는 높은 바위에서 내려와 가기군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동시에 담천호가 올라갔던 바위 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쿠앙!
쩌저적!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담천호가 입을 크게 벌렸다.
날벌레가 몇 마리 들어갔지만, 담천호에게 그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자신이 올라가 있던 바위 일부가 쪼개져 나간 것이다.
저런 괴력이라면 독이 문제가 아니었다.
담천호가 가기군의 소매를 잡고 뛰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독각서우를 잡겠다고 한 건 실수였습니다.”
“제가 놈을 너무 만만히 봤습니다, 현무각주.”
가기군이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독각서우의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담천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막내 공자님이 약속한 건 믿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어도 치료해 주겠다고 한 말 말입니다.”
“그게 왜 거짓말입니까?”
“부상자는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리 흉포한데 부상자가 있을 수 없다니요?”
“저놈에게 걸리면 즉사입니다. 사망자는 있을 수 있어도 부상자는 없다는 데 제 목을 걸지요.”
“헉, 그럼 지금이라도 막내 공자가 준 뿔피리를 부는 게 좋겠습니다.”
“그것도 소용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아마도 뿔피리의 앞을 천 쪼가리가 막고 있을 겁니다.”
“그게 대체…….”
말끝을 흐리던 가기군은 재빨리 품 안에서 뿔피리를 꺼냈다.
그러고는 피리의 입구를 막고 있던 천을 찾았다.
가기군이 천을 펴자 담천호가 힘없이 말을 이었다.
“거기에 각자도생이라고 쓰여 있을 겁니다. 그게 마지막 구결이랍니다.”
“아닌데요.”
가기군이 고개를 흔들자 담천호가 다급히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기 보십시오.”
가기군이 천을 내밀자 담천호가 놀란 듯 가기군의 천을 빼앗았다.
다른 건 다 똑같지만, 쓰여 있는 구결이 달랐다.
[마지막 구결은 천우신조(天佑神助)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담천호가 떨리는 손으로 글귀를 가리키자 가기군이 재빨리 답했다.
“이건 막내 공자의 안배 같습니다.”
담천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
“안배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북팽가의 가칙 십이 조가 뭡니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저희는 그 가칙을 위반했습니다. 아마도 막내 공자님은 저희의 행동까지 예측해서 과제를 내리신 것 같습니다.”
“대체 막내 공자님은…….”
“제갈공명의 현신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그 비단 주머니를 쪼갠 우매한 수하가 되는 것이고요.”
“헉!”
담천호가 비명을 터뜨렸다.
가기군이 예를 든 비단 주머니는 제갈공명이 유비의 위험을 예측하고 조자룡에게 전했던 세 개의 주머니를 뜻한다.
가기군이 말한 것은 한빈은 여기에서 한술 더 떠 비단 주머니가 셋으로 쪼개질 것까지 예상했다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