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5)
놀란 세 명의 각주는 서로 눈치를 봤다.
그때 가기군이 재빨리 물었다.
“고, 공자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와 같이 있으면서 수련을 도와주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가기군이 다급하게 묻자 한빈이 환하게 웃었다.
“저는 별도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해 주신 구걸십팔보의 구결이 전부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어디까지 말했었죠?”
“음식에 대해 간절함까지 말씀하시고 다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뭔가 빠진 것도 같고요.”
한빈이 묘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가기군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진짜 빠진 것이 있는 겁니까? 공자님.”
“만약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제가 다시 전하러 오겠습니다. 중요한 건 살아남겠다는 간절함이겠지요.”
“만약 빠진 게 있다면 공자님이 저희에게 다시 오기 전에 저희는 죽을 겁니다.”
“부상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천하제일의 명의인 장 의원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빈은 제법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한빈의 말은 간단했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한빈과 장자명이 나서서 치료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한빈은 그 어떤 상처에 대해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 모든 상처에 대해서 철저한 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한빈이 늘어놓는 부상의 종류 때문에 가기군은 더욱 겁을 먹었다.
“고, 공자님. 독각서우의 독이 전해 내려오는 그대로라면, 부상이 문제가 아니라 저희는 살아남…….”
가기군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달빛을 받은 검은 물체가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말끝을 흐리던 가기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덕 너머로 놈의 조그만 뿔만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 뿔은 그리 커 보이지도 않았다.
독각서우가 좋아한다는 약초로 자신들의 몸을 치료했다는 한빈의 말은 아무래도 거짓인 것 같았다.
한빈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달려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강호에 떠도는 이야기에 의하면 성장한 독각서우는 여기 모인 각주들이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의 영물이 아니었다.
각주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어찌해야 좋을지 눈빛을 교환하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품에서 조그만 뿔피리 세 개를 꺼냈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한 한빈이 뿔피리 세 개를 각주들에게 내밀었다.
“위험할 때는 이걸 부십시오. 단, 기회는 딱 한 번입니다.”
“한 번이요?”
“네, 딱 한 번이니 진짜 위험할 때만 부셔야 합니다. 그런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렸다.
한빈이 떠나려 하자 가기군이 다급하게 외쳤다.
“공자님!”
“오늘 밤이 지나면 구걸십팔보의 효용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한빈이 선심 쓰듯 답하며 손가락 하나를 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첫 번째 걸음이란 뜻입니까?
“첫 번째 걸음이 아니라 목숨은 딱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몸조심하십시오.”
“혹시 말씀하시려는 것이…….”
가기군은 말을 맺지 못했다.
분명 한빈에게 손을 뻗었는데 그곳은 허공이었다.
이미 한빈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옆에 있던 설화도 귀신처럼 사라졌다.
구걸십팔보를 극성까지 펼친 것이 분명했다.
그때 뒤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삐익!
고개를 돌려 보니 한빈이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그곳에서도 모습을 감췄다.
휘파람 소리 때문일까?
흔들리는 검은 뿔의 무소, 독각서우의 뿔이 멈췄다.
다행히도 잠시 멈췄던 독각서우의 뿔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갈피를 못 잡는 듯 말이다.
바로 덤비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경계심이 많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이 지나도 독각서우는 뿔만 살짝 보인 채 몸을 숨기고 있었다.
어찌 보면 경계심이 많은 것이 아니라 겁을 먹은 것일지도 몰랐다.
조금은 예상 밖의 전개였다.
독각서우의 검은 뿔을 유심히 보던 담천호가 다른 각주들에게 물었다.
“각주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튀는 게 상책 아닙니까?”
악필승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때 담천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말입니다. 저희 셋이면…….”
담천호의 제안은 간단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셋은 무림 십대세가에 속하는 하북팽가의 각주였다.
강호에서는 무공으로 콧방귀 좀 뀐다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독각서우를 잡아서 한몫 취하자는 것이었다.
영물이면 내단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그들이 취하면 단번에 무공의 경지를 높일 수 있다.
이 간단한 생각이 담천호의 계획이었다.
그는 쉴 틈 없이 자신의 의견을 다른 각주들에게 늘어놓았다.
이것은 무공을 향한 열망이자 담천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 대목이었다.
담천호는 무공을 높일 수 있는 일은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실리를 취하려는 의도뿐 아니라 호승심도 한몫했다.
그의 말에 가기군이 끼어들었다.
“저기 진짜 독각서우라면 저희는 죽은 목숨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경의 고수도 어찌 못한다고 합니다.”
“허허, 우리 셋이면 못 잡을 것도 없습니다. 딱 보기에는 그냥 어린 무소에 불과합니다. 큰 놈이야 화경의 고수도 어찌 못하겠지만, 저리 어린 놈이야 한칼이면 족하지 않겠습니까? 죽이지 않고 사로잡는 것도 가능합니다.”
담천호가 자신 있게 도검을 두드리자, 가기군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남만야수궁의 독각서우는 도검불침이라고 합니다.”
“금강불괴도 약점은 있는 법입니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리고 어린 놈은 도검불침까지는 아닐 겁니다. 이건 우리의 무공을 시험해 볼 기회입니다.”
“내단도 없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현무각주.”
“주작각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내단이 없다고요?”
“어찌 보면 영양가가 전혀 없는 영물이지요. 다만, 저 뿔이 독기가 응축되어 내단을 대신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뿔이라도 취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뿔은 저희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일검에 죽이지 못하면 놈은 성질에 못 이겨서 그대로 몸 안의 독기를 폭발시킵니다. 질 것 같으면 동귀어진 하는 것이지요. 뭐, 그것도 소문입니다.”
“소문이라……. 그 소문 믿을 만합니까?”
“강호의 소문 중 구 할은 맞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주작각주.”
“사천당가 같은 독문에서도 남만의 독각서우를 사로잡지는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수명을 다한 독각서우의 사체에서 뿔을 채취하는 것이지요. 그 숫자가 너무 적어서 부르는 게 값이라고 들었습니다. 문제는 수명이 다한 독각서우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간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더욱 놈을 제 손으로 잡고 싶습니다.”
“독각서우를 사로잡겠다는 말입니까?”
“막내 공자님은 우리에게 살아남으라고 과제를 주셨습니다.”
말을 마친 담천호는 자신의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그 모습에 가기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지요.”
“저는 그것보다 한 수 위의 성과를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기군이 눈을 크게 뜨자 담천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독각서우를 잡는 성과를 보여 주고 싶습니다.”
“말했다시피 그건 조금…….”
“주작각주는 우리의 성과에 당황할 막내 공자님의 표정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막내 공자님께 끌려다니기만 하지 않았습니까?”
“흠, 아무래도 현무각주의 생각은 잘못된 판단 같습니다.”
가기군이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담천호가 다시 독각서우의 뿔을 가리켰다.
“아닙니다. 저기 독각서우를 보십시오. 움직임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우릴 보고 겁먹은 모습이 분명합니다.”
“…….”
가기군은 말없이 독각서우를 관찰했다.
정확히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검은색 뿔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보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담천호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놈이 어쩔 줄 모르는 듯 보이기도 했다.
가기군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 봅시다. 까짓것! 아무리 영물이라도 무소의 새끼 한 마리 정도면 우리 힘으로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결심한 듯 이를 악물던 가기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담천호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조향각주는 어디 있지요?”
가기군이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조향각주 악필승은 분명 가기군의 옆에 있었다.
그러나 가기군의 옆자리는 휑하기만 했다.
가기군이 헛숨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앗, 벌써 자리를 떴군요. 아무래도…….”
“잠시만요.”
“왜 그러십니까? 조향각주에게 시간을 벌어 주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가기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향각주 악필승은 세 명 중 무공이 가장 낮았다.
“그냥 둘이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둘이 성공시키면 그 공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
“흠.”
헛기침하며 잠시 고민하던 가기군이 눈을 반짝였다.
가기군은 주변 지형을 살피고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좋습니다.”
담천호도 흔쾌히 수락했다.
계획이 정해지자 가기군은 기척을 죽인 후 허리를 숙였다.
그는 재빨리 몸을 감추며 담천호에게 손짓했다.
독각서우를 포위하자는 뜻이었다.
담천호의 말대로 어린 무소라면 생포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빈은 분명히 남만의 독각서우와는 아주 다르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의 독각서우는 남만의 그것과는 다르게 아주 작을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가기군의 가슴에서 미세하게 호승심이 피어올랐다.
가기군은 정보를 담당하는 주작각에 있으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모든 관계는 거래라는 것이다.
가기군은 최근에 한빈에게 기연을 받았다.
바로 검기를 희미하게나마 피워 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의 평생의 숙원을 한빈이 이루어 줬다.
그렇다면 자신은 상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아직은 그에게 줄 것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빚을 갚을 방법은 없었다.
빚을 갚으려면 지금이라도 새로운 발상이 필요했다.
그것은 한빈의 요구에만 끌려다니지 말고 그의 지시를 아예 뛰어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담천호의 제안은 맞았다.
가기군은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담천호를 바라봤다.
담천호의 눈빛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담천호의 눈빛은 가기군보다도 더 빛났다.
둘은 손짓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의견에 동의한 것이다.
담천호가 오른쪽을 맡고 가기군이 왼쪽을 맡기로 했다.
오른쪽에는 독각서우가 몸을 숨긴 바위보다 더 큰 바위가 있었다.
담천호가 그 바위로 올라가 일격을 날리기로 한 것이다.
독각서우는 영물.
그 일격에 기절시킬 수는 없었다.
독각서우가 도망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가기군의 임무였다.
가기군은 숨을 참았다.
겁이 나가서 아니라 독각서우가 도망갈까 봐 두려워서였다.
한번 생각을 바꾸자 도망치기 급급했던 겁쟁이에서 매의 눈을 한 사냥꾼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