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 백독지회(白毒之會) (2)
어찌 된 일인지 몰라도 각주들의 눈빛이 하루가 다르게 점점 강렬해진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병법가들이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과도 비슷했다!
당근과 채찍 그리고 더 달콤한 당근의 반복.
처음에는 겁을 주고.
그다음에는 달콤한 제안을 하고.
수련이라는 채찍을 통해 그들을 성장시켰다.
그 성장은 다시 당근으로 돌아오고 말이다.
그런데 배신자까지도 포용하는 너그러움을 보여 줬다.
만약 자신이라면?
팽혁빈은 생각에 빠졌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자신이라면 죄와 벌을 분명히 했을 것이며, 이렇게 세세한 계획을 짜지 못했을 것이다.
비단 이번 일뿐만이 아니었다.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평범한 무림인과는 달랐다.
거대한 음모에 대한 확신이 섰을 때 일반적인 무림인들은 일단 자신부터 벗어날 생각을 한다.
그다음에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가문이다.
한빈처럼 음모에 맞서서 강호를 구할 생각을 하는 무림인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만 봐도 자신의 아우 한빈은 그릇 자체가 아예 다르다고 생각했다.
제갈공명이 현신한다면 아마 한빈과 같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팽혁빈은 본능적으로 한빈이 있는 천수장을 바라봤다.
한빈은 천수장에 들렀다가 온다고 했다.
조금 전 주작각주 가기군이 물었던 고수는 한빈이니 말이다.
그때였다. 앞서 걷던 현무각주 담천호가 손을 들었다.
멈추라는 신호였다.
현무각주 담천호의 표정은 마치 청강석으로 된 연무장 바닥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유는 상상도 못 할 기세가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기세에 다른 각주들도 먼저 반응했다.
스릉.
스릉.
그들은 도갑에서 도를 꺼내 기수식을 취하며 팽혁빈을 감쌌다.
그들 중 가장 앞쪽을 맡은 것은 역시나 현무각주 담천호였다.
담천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은 싸늘함 때문이었다.
그의 경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정이었다.
이번 수련을 계기로 초절정의 초입에 들어섰다.
하북팽가 내에서도 무공만으로는 담천호가 고개를 숙여야 할 상대는 없었다.
이번 수련을 계기로 그는 자신감을 호신강기처럼 온몸에 둘렀다.
그런데 상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는데 날카로운 쇠붙이가 그의 목덜미에 와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들다니!
이건 상상도 못 했다.
가주에게서 이와 비슷한 기세를 느끼긴 했지만, 그건 가주로서의 위엄이 섞여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도 모르는데 이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위기라는 말이었다.
담천호는 도를 꼭 움켜쥐는 동시에 이를 악물었다.
강호에 나오자마자 팔 하나 정도는 내놔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상대의 신형이 드러나자 앙다물었던 입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기세 때문이었다.
초절정에 들어선 자신을 이렇게 압박하다니!
그러나 곧 담천호의 눈이 더 커졌다.
자신의 열 걸음 앞에서 한빈이 붉은 무복을 날리며 서 있었기 때문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간격 안으로 들어온 한빈이 월아를 검집째 슬쩍 들었다.
그러고는 검집으로 담천호의 도를 슬쩍 밀어 냈다.
“현무각주님, 일단 쇠붙이부터 치우고 말씀하시죠.”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잘 버티시는 걸 보면 확실히 수련의 성과가 있나 보군요.”
“혹시 그 기세가…….”
담천호는 말끝을 흐렸다.
막내 공자 한빈이 자신을 위협할 정도의 기세를 뿜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빈의 경공이 놀라운 것은 사실이었다.
거기에 더해 독술과 의술은 하늘에 닿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가주전에서 천독이란 자의 독을 해독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천수장에서 수련을 마치고 내려오면서 마을 사람들이 막내 공자를 대하는 태도도 보았다.
그들은 한빈을 생불 혹은 의선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때는 담천호도 뿌듯한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었다.
막내 공자 한빈은 무공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천재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문 내에서 먼지 같은 존재였던 한빈이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로 거듭난 것이다.
이것은 담천호뿐 아니라 다른 각주들의 의견도 같았다.
하지만 무공만은 아니었다.
그때였다.
담천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뒤쪽에서 다시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짜 기세의 주인은 뒤쪽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세뿐 아니라 수레 굴러가는 소리도 우렁차게 울렸다.
드르륵.
담천호는 재빨리 한빈을 뒤로 물리고 자신이 앞에 섰다.
“공자님, 피하시지요. 뒤쪽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집니다.”
“현무각주님, 그러다 저분한테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늦었어요.”
“네?”
현무각주 담천호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갑자기 뒤통수에서 소리가 났다.
빡!
소리가 먼저 들린 후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통증이 있기 전까지는 자신이 가격당했는지도 몰랐다.
자연스레 현무각주 담천호의 중심은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때 한빈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저는 괜찮지만 적이…….”
“괜찮습니다. 아군입니다.”
“아군이라니요. 제가 공격을…….”
현무각주 담천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살갗을 찌르는 듯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정확히 마주하지는 못하고 눈을 깔아 내린 채 상대를 살폈다.
순간 담천호는 사정을 알아챘다.
상대는 무당의 현문이었다.
무당파에서 파문 직전까지 이르렀으며 정파의 대표적인 망나니에서 최근에 개과천선한 인물이었다.
한빈과는 어느 정도 교류가 있어서 하북팽가에도 은밀히 방문한 적이 있는 무당파의 도사였다.
다른 각주들은 몰라도 현무각주 담천호의 담당 업무가 가문의 경비였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저 도장이 왜 왔느냐 하는 점이었다.
담천호가 그를 향해서 고개를 숙였다.
“도장께서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 날붙이는 치우고 말하지. 나는 날 향해서 칼을 겨누는 자를 그냥 두고 볼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아닐세. 뭐, 팽 공자의 일행에게는 예외지만……. 그러니 다행인 줄 알게.”
현문이 턱짓으로 담천호의 도를 가리켰다.
담천호는 놀란 표정으로 재빨리 그의 도를 도갑에 갈무리했다.
자신이 그에게 도를 겨누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챈 것이다.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런데, 기척만으로는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이 안 되나 봐?”
“…….”
담천호는 이를 악물었다.
막내 공자 한빈과 친분이 있는 데다 무림 최고의 배분을 가진 자였지만, 남의 가문의 각주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분명히 실례였다.
그 모습에 다시 현문이 말을 이었다.
“일단 부탁은 받았으니 무당산까지 가는 동안 수련에 도움을 주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담천호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현문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쪽에서는 한빈이 빙긋 웃고 있었다.
이전에 담천호에게 피워 냈던 기세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팽 공자, 내가 상대할 병아리가 이 셋인가?”
현문이 가리킨 것은 세 명의 각주였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조금 여유가 되시면 뒤에 있는 친구들도 부탁드립니다.”
한빈이 뒤쪽에 있는 적혈맹호대 대원들을 가리켰다.
이번 행렬에 포함된 것은 심미호와 조호 그리고 장삼과 몇 명의 대원이었다.
현문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들은 고개를 잽싸게 돌렸다.
그들의 모습에 현문이 웃었다.
“하하, 팽 공자 수하 아니랄까 봐 눈치 하나는 빠르군. 죽을 자리인지 묫자리인지를 딱 알아보는 것 보소.”
“현문 어르신, 그게 그거 아닙니까?”
“어차피 죽는 것은 똑같지만, 묫자리를 알아본 놈은 양지바른 곳에 묻히기 마련이지.”
“초반부터 이리 겁을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자네가 부탁한 게 아닌가?”
“제가 부탁했다는 건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들 사이에 알 수 없는 대화가 이루어지자 옆에 있던 담천호의 얼굴색이 변했다.
몇 개의 단어가 자꾸 머릿속에서 걸렸다.
병아리니 묫자리니 그런 말들이 여기에서 나온다는 것이 이상했다.
거기에 모든 말들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담천호를 비롯한 각주들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담천호의 어깨를 한빈이 토닥였다.
“현무각주, 그렇게 겁먹지 마세요. 현문 어르신이 무당에 도착할 때까지 수련을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대체…….”
“친절하게 가르쳐 주신다고 했으니 무서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 정확히는 벌써 수련은 시작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적에게 뒤통수를 내주지 않았습니까?”
“그게…….”
“실전이라면 현무각주는 여기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벌써 싸늘한 한 구의 시체가 되어 있겠죠.”
“흠.”
현무각주 담천호는 헛기침만 했다.
한빈의 지적은 정확했다.
막대한 기세만 보고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상대는 확인도 못 하고 뒤통수를 내주었다.
애초에 경계 같은 건 필요도 없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도가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순간, 현무각주 담천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오만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강하기에 팔 한쪽은 내주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목 두 개라도 모자랐다.
초절정의 초입에 도달했다는 기쁨 때문에 잠시 자만했었다.
담천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눈빛이 현문이 웃었다.
“가르칠 맛이 나겠구먼. 젊어서 그런지 깨닫는 속도가 빨라.”
“어르신,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담천호가 현문에게 포권했다.
그들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팽혁빈이 다가왔다.
“어르신,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약속은 약속이니……. 죽으라면 죽어야 하지 않겠나. 에고, 삭신이야.”
현문은 어깨를 툭툭 치며 한빈을 바라봤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한빈은 모르는 척 저 멀리서 들리는 수레 소리에 집중했다.
“수레가 왜 이리 늦지?”
“팽 공자가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빨리 오려다가 물건이라도 떨어지면 낭패 아니던가?”
“하긴 그렇죠.”
팽혁빈은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번 여정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한빈에게 태극검제의 서찰에 대한 해석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하북팽가만의 힘으로 가능할까?
아니, 현재로서는 하북팽가가 아니라 여기 있는 인원이 아군의 전부였다.
한빈은 대체 삼황초를 어떻게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팽혁빈도 궁금해서 삼황초에 대해서 알아봤다.
하지만 한빈이 말한 내용이 전부였다.
태혈고의 유일한 치료 방법이 삼황초라는 것은 몇몇 의서에 적혀 있긴 하나, 삼황초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팽혁빈은 힐끔 현문을 바라봤다.
눈치를 보니 그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한빈을 믿고 있다는 듯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팽혁빈은 아우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자신을 의심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