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66화 (549/621)
  • 566. 백독지회(白毒之會) (1)

    즉 백독지회는 사람을 죽이려는 독인들의 모임이 아닌, 독술을 발전시키려는 독인들의 모임이었다.

    그 모임의 주최자가 바로 백독문이었다.

    백독문의 목표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수만 가지의 독을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똘똘한 한 가지 독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독에 있어서는 사천당가와 대척점에 있는 문파였다.

    사천당가는 만독(萬毒)을 목표로 한 문파니 말이다.

    물론 사천당가는 무당산의 영웅 대회가 코앞인 관계로 안 올 수도 있었다.

    영웅 대회와 백독지회에 동시에 참가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더 많다.

    그곳에 갔다가 영웅 대회에 참석한다면 모든 문파가 사천당가를 피할 것이었다.

    백독지회에 참석해서 어떤 독을 묻혀 왔을지 모르는데, 누가 과연 가까이 올까.

    바로 이런 이유였다.

    그런데 하북팽가는 백독지회에 참석하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밝히다니?

    물론 하북팽가의 의견이 아니라 한빈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장자명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무리수였다.

    그와 한빈 둘, 모두에게 말이다.

    한빈이 그걸 모를 리 없는데 왜 백독지회에?

    장자명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계속 차올랐다.

    하지만 장자명은 무의식적으로 방구석에 마련해 둔 탁자로 걸어갔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약초를 빻았다.

    툭. 툭.

    약초를 빻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에이씨,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영약과 치료제를 조제하고 있었다.

    모든 게 한빈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정신 차린 장자명은 한빈이 빠져나간 문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 * *

    이틀 뒤.

    그들은 천수장이 아닌 하북팽가의 앞에 섰다.

    그곳에는 가주 이하 모든 수뇌부가 모여 있었다.

    가주 팽강위는 근엄한 표정으로 팽혁빈을 바라봤다.

    “준비됐느냐?”

    “네, 준비됐습니다. 이번 영웅 대회에서 가문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오겠습니다.”

    팽혁빈이 깊숙이 포권하자, 가주 팽강위가 옆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대기하고 있던 팽대위는 호랑이가 진하게 음각되어 있는 팔뚝만 한 직사각형 물체를 전달했다.

    팽강위가 건네받은 그것은 이름이 적혀 있는 패였다.

    패를 확인한 가주는 그것을 다시 팽혁빈에게 건넸다.

    순간 뒤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수뇌부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 저건…….”

    “저걸 건넨다는 건…….”

    그들이 이렇게 당황한 것은 팽강위가 건넨 패가 가지는 의미 때문이었다.

    그가 건넨 것은 하북팽가의 시조 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가문의 신물이었다.

    이름하여 벽력패.

    혼원벽력도를 창안하였던 하북팽가의 시조, 팽도훈의 신분 패였다.

    덕분에 벽력패는 하북팽가의 신물이 되었다.

    가주가 바뀌면 바뀌는 가주 패와는 달리, 벽력패는 대대로 내려왔다.

    벽력패는 오랜 세월 동안 하북팽가의 태사의 뒤에 버티면서 가주의 권위를 나타내 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건넨다는 건은 그 권위를 이양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웅성이자 팽강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벽력패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가주를 대신함을 잊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벽력패를 가지고 있는 자가 가문을 대신함을 잊지 말아라.”

    팽강위는 이번에는 목소리에 감정을 뺐다.

    가주로서의 위엄이 혼원도에 스며드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추상과 같은 목소리였다.

    사실 가주를 대신한다는 것과 가문을 대신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가문을 대신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가문 그 자체의 권위를 준다는 것.

    벽력패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팽혁빈이 가주라는 이야기였다.

    즉 영웅 대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팽혁빈에게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벽력패를 든 팽혁빈의 손이 살짝 떨렸다.

    신물의 무게가 마치 수만 근처럼 느껴졌다.

    “그건…….”

    “그냥 알았다고 해야 하북팽가의 권위가 설 것이 아니더냐? 그 벽력패는 흠집 하나 내지 말고 내게 가져와야 된다.”

    팽혁빈의 무사 귀환이 그가 마지막으로 내린 지시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팽혁빈은 고개를 숙인 뒤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이제 무당산으로 떠나기 위한 모든 절차가 끝났다.

    가주에 대한 보고가 끝났으며.

    가주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때였다.

    가주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팽혁빈이 이번에 데려간다고 보고한 세 명의 각주 때문이었다.

    그중 하나의 눈빛이 조금 유별났다.

    팽강위의 시선을 눈치챈 팽혁빈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조향각주의 표정이 조금 남달라서 그런다. 너무 들떠 있는 것은 아닌지……. 허허.”

    “무슨 걱정 하시는지 압니다. 처음 떠나는 길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하긴, 무가의 구중심처인 조향각에 틀어박혀 있다 보면 힘든 일도 많겠지. 이번에 돌아오면 조향각이 아닌 다른 임무도 맡긴다 전해라.”

    팽강위는 오해하고 있었다.

    조향각주 악필승은 들뜬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칠 것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팽강위의 말은 악필승도 똑똑히 들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돌아오면 하북팽가의 식당인 조향각에 틀어박혀서 평생 요리나 하면서 살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오면 다른 임무를 맡긴다니!

    이건 보상이 아니라 벌이었다.

    팽강위가 환하게 웃자 팽혁빈이 마지막으로 포권한 뒤 돌아갔다.

    팽혁빈과 각주들 그리고 적혈맹호대 일부가 이번 행렬에 참가했다.

    팽혁빈이 손짓하자 그들은 하북팽가에서 멀어졌다.

    하북팽가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주작각주 가기군이 팽혁빈의 옆에 다가왔다.

    “저 마차는 왜 준비한 것입니까?”

    “흠, 고수를 위해서 준비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 공자가 준비한다던 고수는 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아마 지금쯤 올 때가…….”

    팽혁빈은 말끝을 흐렸다.

    희미한 기세가 뒤쪽에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기척을 죽인 것은 아닌지, 발소리도 제법 요란하게 울렸다.

    타다닥.

    타다닥.

    말발굽 소리와 같은 발소리가 다소 방정맞게 울릴 때쯤 하나의 신형이 나타났다.

    그는 다름 아닌 백호각주였다.

    백호각주는 팽혁빈의 앞에 와서야 속도를 줄였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팽혁빈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머리가 땅까지 닿을 듯한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해 보였다.

    다만 팽혁빈만은 아무 표정 없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뒤쪽에 있던 주작각주 가기군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려 하자, 팽혁빈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때까지도 백호각주는 허리를 펴지 않고 있었다.

    묘한 상황에 모두는 마른침만 삼켰다.

    백호각주의 앞으로 간 팽혁빈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백호각주.”

    “네, 대공자님.”

    “그런데 왜 이리 급하게 온 겁니까? 무당산으로 가는 일행은 모두 선발이 끝났습니다. 이렇게 몰래 온다고 해도 백호각주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 그게 아닙니다. 대공자.”

    “그럼 내게 전해 줄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말을 마친 백호각주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털썩.

    그 모습에 뒤쪽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일으켜 세운 팽혁빈이 진기를 끌어올렸다.

    바람에 부대끼던 낙엽과 먼지가 살짝 뒤로 밀려 났다.

    진기가 먼지와 낙엽을 밀어 내고 있는 것이다.

    주작각주 가기군의 눈에는 그 모습이 진기의 충돌 현상으로 보였다.

    오해한 주작각주 가기군이 달려 나가려고 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설화가 그의 소매를 잡았다.

    “주작각주 아저씨.”

    “어, 설화야. 위험하니 너는 물러나거라.”

    “그게 아니라, 지금 대공자님이 기막을 펼치신 거예요. 아마 긴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요.”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대체 무슨 말을 나누려고 저리…….”

    “무슨 말인지 주작각주 아저씨가 말해 주세요.”

    “내가?”

    “아저씨는 구순술을 할 수 있잖아요.”

    “흠.”

    주작각주 가기군이 침음을 삼켰다.

    이건 다른 이들은 모르는 비밀이었다.

    물론 가주와 집법당주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구순술이란 입 모양만 보고 상대의 말을 파악하는 수법이었다.

    이 수법은 몇몇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그중 하나가 지금처럼 기막을 펼쳤을 때였다.

    이 수법을 익히게 된 것은 정보를 담당하는 주작각의 특성 때문이었다.

    주작각주는 항상 눈과 귀를 열어 놓아야 했다.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봐야 하고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그것이 정보를 담당하는 자의 책무였다.

    구순술은 가기군의 숨겨 놓은 한 수.

    팽혁빈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설화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가기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 소문났어요. 하북팽가에서 유일하게 구순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저씨라고 하던데요.”

    “아……. 누가 소문냈을까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정보 수집이 아저씨의 임무잖아요.”

    “…….”

    가기군은 설화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팽혁빈과 백호각주의 대화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기막을 펼쳐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팽혁빈과 백호각주의 대화를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주시하던 가기군이 눈을 크게 떴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하는 가기군의 눈빛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 아니 바닥에 닿았다.

    그 모습을 보던 현무각주 담천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무것도 아닐세. 기막을 펼쳐서 무슨 말인지 듣지 못했네. 그런데 이거 하나만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네.”

    “그게 무엇인가?”

    “대공자님과 막내 공자님은 우릴 진짜 가족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지.”

    “허허, 그야 이번 수련으로 알지 않았나?”

    “그때 느낀 것 이상이라는 생각이 드네.”

    “참,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다니……. 이건 낮도깨비도 아니고……. 하하.”

    하지만 주작각주 가기군은 웃지 못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백호각주를 보내고 온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 명의 각주가 각양각색의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본 팽혁빈은 웃음을 지었다.

    이게 한빈이 말한 마지막 목줄인가 싶어서였다.

    한빈은 각주들이 진심으로 팽혁빈을 따르게 만들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수련의 성과로 그들의 충성심은 그 어느 때보다 강했다.

    지금 백호각주가 달려온 것은 자신의 죄를 토설하기 위해서였다.

    팽혁빈은 그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죄를 고하기로 결심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집안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해결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한빈이었다.

    사실 가장 놀란 것은 한빈이 백호각주가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찾아오면 기막을 펼치고 그의 죄를 덮어 준 후 서찰 하나를 전하라 했다.

    그래서 서찰을 전했다.

    기막을 펼쳤기에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

    그런데 주작각주의 표정을 보면 마치 모든 것을 엿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아우의 책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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