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65화 (548/621)

565. 주의 사항 (5)

장자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눈을 빛냈다.

“그렇게 유연한 몸 상태가 무인이 원하는 최상의 상태지요.”

“허, 이것 참……. 나는 무인이 아니잖소.”

“그 정도 영약을 드셨으니 내공이 일류 수준에 버금가지 않나요?”

한빈의 질문에 장자명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

“…….”

그는 당황한 표정까지 드러냈다.

그가 일류 무인에 버금가는 내공을 쌓았다는 것은 자신만의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장자명은 한빈의 눈치를 살피며 기연을 떠올렸다.

영초를 재배하고 영약을 제조하는 일은 장자명의 일이었다.

그것은 온전히 수행하려면 영초를 맛보고 영약의 효험을 몸소 체험해야 했다.

덕분에 장자명은 적잖은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내공 수준만으로는 일류와 절정의 중간이라고 보면 되었다.

내공 심법 같은 게 아닌 순수한 영약의 효능이었다.

강호의 의원 중에는 내공을 쌓은 의원들이 제법 있었다.

그들 중 장자명 같은 예는 없었다.

필요에 의해 운기 토납법 같은 심법으로 내공을 쌓은 것이지, 영약으로 기초를 닦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장자명이 유일했다.

놀란 장자명의 앞에 한빈이 서책 하나를 쓱 건넸다.

서책의 위에는 제목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은연심법(隱然心法)]

순간 장자명의 눈이 커졌다.

“이, 이게 뭡니까?”

“장 의원이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앞으로의 고생도 포함해서요.”

“허.”

장자명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은연심법이라?

이름만 들으면 마치 은신과 관련된 무공 같지만, 이것은 의원들 모두가 탐내는 심법이었다.

자신의 기를 환자의 기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게 만드는 원리가 담긴 비급이었다.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가끔은 환자의 호신강기와 의원의 생기가 상충하게 된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는 것이 무인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연심법을 익힌 의원은 그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말하자면, 기에 은신술을 펼치는 수법이었다.

이 심법을 수련하려면 영약으로만 일류의 경지를 만들어 놔야 한다.

의원들이 이 심법을 익히기는 하늘의 별 따기.

타인을 치료하기 위해서 막대한 영약을 쏟아붓는 가문 혹은 문파가 강호에 어디 있을까?

심법은 존재하되 그림의 떡인 비급이었다.

오죽하면 의원 사이에서 비중화(秘中畵)라는 말이 있을까.

그림 속의 비급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런 심법이 담긴 비급을 장자명에게 내민 것이다.

딱 쓸 사람을 맞춰서 내밀었다는 건 한빈이 장자명의 성취를 알고 있다는 것.

장자명이 궁금한 것은 이 비급의 진위였다.

그는 한빈과 비급을 번갈아 쳐다봤다.

한빈이 씩 웃으며 비급을 가리켰다.

“진품 맞습니다. 황궁에서 가져왔으니 틀림없겠지요.”

“황궁이라니요?”

“이 비급을 쓸 수 있는 집단이 황궁 말고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

“진품은 맞지만, 필사본입니다.”

“그래도 이걸 어떻게…….”

“제가 나라에 공을 세운 이야기는 얼핏 들었겠지요, 장 의원.”

“흠, 그야 들었습니다.”

“제가 상으로 뭘 받을 거냐고 해서 이 서책을 택했습니다.”

“앗.”

장자명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러더니 비급을 쓰다듬었다.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다급히 표정을 수습한 장자명이 말했다.

“저를 그리 생각해 주신 겁니까? 팽 공자님.”

“그럼요, 장 의원은 우리 식구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 그건 그렇지요.”

“장주인 제가 장의원을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쓰겠습니까?”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

차로 입술을 적신 한빈은 조금 더 표정을 가다듬었다.

사실 반만 사실이었다.

장자명을 위한 것은 맞지만, 황궁에 특별히 부탁한 것은 아니었다.

한빈이 의술에 능하다는 것을 안 황제가 이 비급을 딸려서 보낸 것이다.

사실 이 비급은 화타가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화타가 후대에 전하기를, 필요한 의원은 이 비술을 익히라고 했다.

덕분에 여러 문파에 전해지기는 했지만, 모두 소실되고 황궁에만 남아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앞서 말한 그 실용성 때문이었다.

이 비급은 오직 영약이 넘쳐 나는 황궁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한빈은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드러내기 위해 살짝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러고는 조금 더 짙은 미소를 얼굴에 둘렀다.

“사문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장 의원.”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를 내치시려고요?”

이제는 천수장이 자신의 집인 듯 말한다.

한빈이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장자명의 속마음은 한빈도 알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계약 기간이 끝나면 튀려던 눈치였니까.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제가 장 의원은 내치기는요. 사문에 두고 온 사매가 보고 싶다고 언젠가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팽 공자는 별걸 다 기억하시는군요, 허허.”

장자명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힘들 때마다 사매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언젠가는 백독문으로 돌아가 큰소리치며 자신이 강호 최고의 의원이자 강호 최고의 독술가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꿈이었다.

그는 힘들 때마다 한빈에게 자신의 심중을 털어놨었다.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식구니까요.”

“식구라…….”

말끝을 흐린 장자명이 입을 벌렸다.

단어 하나가 그의 심금을 울렸다.

다시 또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장자명을 본 한빈이 웃었다.

“우리 길을 떠나는 김에 장 의원의 사문에도 한번 들릅시다.”

“제 사문에 들른다는 것은 백독문에 들르시겠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지요. 장 의원은 지금 천하제일의 의원이자 천하제일의 독술가입니다.”

“제가요?”

“강호 전역에서 몰려든 의원이 치료하지 못한 하남정가 가주를 누가 치료했습니까?”

“…….”

“황궁의 의원도 치료 못 한 신창양가의 가주를 치료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

“왜 제 얼굴에 금칠을…….”

“금칠이 아닙니다. 그 질병의 원인이 바로 독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장 의원은 강호 최고의 의원이자 독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제가 책임지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장자명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비록 죽도록 고생은 했지만, 이 모든 경험을 쌓게 해 준 것이 한빈이었으니까.

사실 한빈이 없었다면 독의 존재도 몰랐을 것이며 치료도 못 했을 것이다.

장자명의 눈빛은 달빛을 받은 연못같이 빛났다.

연못은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법이었다.

한빈의 금칠이 작은 바람은 아니었는지 장자명의 눈빛은 거세게 흔들렸다.

그 표정의 변화를 확인한 한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별말씀을요. 그럼 같이 가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장 의원.”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팽 공자님.”

장자명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한빈은 별다른 말 없이 흡족한 표정으로 장자명의 어깨를 토닥였다.

한빈이 나가고 방에 홀로 남은 장자명은 다 식은 차를 입에 털어 넣었다.

입 속에 차를 넣고 나자 정신이 맑아졌다.

그는 서책을 펼쳤다.

한빈이 말한 대로 황궁의 학사들이 필사한 서책이 분명했다.

이렇게 정갈한 필체의 서책은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문파에서 전해지는 비급은 서체가 엉망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서책의 필체는 마치 활자로 찍어 놓은 것 같았다.

거기에 내용도 의술의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건 내공 심법이자 훌륭한 의서였다.

그는 한빈의 온기가 남아 있는 서책을 쓰다듬었다.

한참을 쓰다듬던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중요한 일이 분명히 오갔다.

그런데 그게 뭔지 기억나지 않았다.

“뭐지? 그러니까, 이 비급을 받고 감동하고……. 참 그 전에 내가 뭘 고민하고 있었지?”

자문자답하던 그의 눈이 커졌다.

이제야 상황이 기억난 것이다.

무당산으로 향하는 행렬에 끼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있던 상황에 한빈이 이 비급을 준 것이다.

거기에다가…….

그는 입을 크게 벌렸다.

한빈의 말에 의하면 무당산으로 가는 길에 백독곡에 들르자고 제안했다.

그것을 자신은 넙죽 승낙했고 말이다.

그의 사문은 백독곡에 있는 백독문이었다.

사천당가와 더불어 독으로는 양대산맥이라는 바로 그 백독문이었다.

사천당가와는 조금 다른 것이, 백독문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순수하게 독을 연구하는 집단이었다.

덕분에 이름은 알지만, 백독곡의 위치를 아는 이들도 드물었다.

뭐, 십 년에 한 번 열리는 백독지회를 제외하고는 외부인을 절대 받지 않는 것이 백독문이었다.

“백독지회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장자명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필이면 일주일 뒤가 백독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백독지회가 열리는 기간에는 장자명의 사부가 폐관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그 얘기는 지금 백독문에 가면 그의 사부와 딱 마주친다는 말이었다.

이건 죽음을 뜻한다.

몰래 백독문을 뛰쳐나온 것이 벌써 이 년이 넘었다.

그나마 안심하고 있는 것은 백독문의 문주인 그의 사부가 장기간 폐관 수련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가면 정면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무당산이라니!

이건 장자명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장자명은 천수장에서 뒹굴뒹굴하면서 가끔 마을 사람들을 진료할 생각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지만 은연심법을 얻었으니 인제 와서 안 따라간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빈이 했던 말 하나가 떠올랐다.

이건 이제까지의 고마움과 앞으로의 고마움까지 더해서 주는 보상이라고 말이다.

그 앞으로가 무당산으로 가는 길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백독문을 들러서 말이다.

장자명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한빈이 백독문에 들르려고 할까 하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한빈이 자신을 위해서 백독문에 들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감정을 수습하고 나자 한빈이 그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백독지회는 중원의 모든 독인이 모여 독을 겨루는 자리였다.

백독지회의 백독은 숫자가 아닌 흰 백(白)자를 쓴다.

그래서 백독문(百毒門)을 누군가는 백독문(白毒門)으로 부르기도 한다.

왜 독을 다루는 문파와 대회에 흰 백 자를 쓸까?

흔히 독을 표현하는 색에는 검은색과 청색 그리고 남색, 붉은색 등이 있다.

그것은 독에 중독되면 사람의 피부가 그와 같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 색의 종류에 따라 독의 종류를 판단한다.

그리고 해독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같은 색이라도 수백 가지의 원인이 있지만, 일단 종류를 줄여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치료 방법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백독문은 증세가 없는 독을 주로 연구한다.

백독지회에서 독인들이 겨루는 독도 마찬가지다.

흔적이 남지 않는 독을 말하는 색이 바로 흰 백 자였다.

강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들을 자랑하는 자리였다.

물론 해독제가 있는 독만을 겨룬다.

그렇지 않다면 사상자가 속출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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