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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64화 (547/621)
  • 564. 주의 사항 (4)

    팽혁빈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재촉하자 한빈이 다시 설명을 이었다.

    “삼황초가 유명해진 것은 전국 칠웅 중 하나인 태령왕 때문입니다. 태령왕은 자객의 위협을 가장 많이 받은 왕 중에 하나죠. 그는 자객의 위험은 모두 물리쳤으면서도 정작 질병을 물리치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나도 아는 일이다. 그런데 지나가는 신선이 고쳐 줬다는 것이 전설 속 이야기가 아니더냐?”

    “네, 맞습니다. 그 신선이 쓴 약이 바로 삼황초였습니다.”

    “흠.”

    “재미있는 것은 그 의원이 치료한 것은 질병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령왕의 몸속에 들어 있던 것이 독이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술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지금 한빈이 말하는 내용은 현재 강호인은 모르는 내용이었다.

    전생에 한빈이 조사했던 사건에서 끄집어낸 기억이었다.

    팽혁빈의 눈빛이 깊어졌다.

    “독이라…….”

    “이건 아직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전생의 기억에 근거한 말이었다.

    물론 한빈이 한 말 중 반만 맞았다.

    태령왕의 몸속에 있었던 것은 일반적인 독이 아닌 살아 있는 독, 즉 고독이었다.

    고독은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은 만큼의 크기로 몸에 들어간다.

    그중 가장 알아채기 힘든 것이 혈고다.

    여기서 말하는 혈고는 강호에서 말하는 보통 혈고가 아니었다.

    태혈고라 불리는 특이한 종이다.

    태혈고는 일단 입으로 들어가면 단전이 아닌 머릿속에 자리를 잡는다.

    자리를 잡은 진기와 피를 양분 삼아 서서히 성장한다.

    그것은 마치 신체의 일부와도 같아 중독된 환자는 느끼지도 못한다.

    기감이 뛰어난 일부 고수만이 알아챌 수 있다.

    보통의 혈고가 좁쌀만 하다면 태혈고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크기다.

    물이나 술에 섞어서 건넨다면 화경의 고수라도 알아챌 수 없다.

    그런데 그 태혈고가 몸속에 들어가면 보통의 혈고보다 더 커진다.

    태혈고는 성장하며 신체의 일부처럼 머릿속 혈관에 딱 붙는다.

    그러니 발병할 때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말이었다.

    태혈고로 인한 참사는 전생에도 겪은 적이 있었다.

    정마대전 중간 무림삼존 중 하나인 일지대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 바로 고독 중 하나인 태혈고였다.

    태혈고는 충격에 민감하다. 어느 정도 크기가 되면 정신적인 반응에도 민감해진다.

    누구에게 쓰여지느냐에 따라 금제의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특정 단어를 뱉으면 바로 혈고가 반응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만약 그것을 빼내려고 해도 바로 반응한다.

    태혈고를 치료하려면 그것을 빼내야 한다.

    고서에 따르면 혈고가 유일하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삼황초라고 한다.

    밖으로 나온 성장한 태혈고는 외부와 반응해서 바로 말라비틀어진다.

    완전히 성장한 태혈고는 환자의 양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환자가 죽으면 태혈고도 죽는다.

    태혈고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혈맥에서 분리해서 외부로 빼내면 되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상황은 끝이다.

    혈고를 혈맥에서 분리해서 밖으로 몰아내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삼황초였다.

    전생에는 일지대사를 구하지 못했다.

    태혈고에 대한 해결 방법은 일지대사가 죽고 나서야 밝혀졌다.

    삼황초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일지대사가 죽고 삼 개월 뒤였다.

    일지대사가 죽지 않았다면?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 겪었던 일지대사의 죽음은 누군가가 짜 놓은 거대한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삼황초 없이 태혈고를 처리할 수 있을까?

    한빈은 힐끔 용림검법을 바라봤다.

    자신의 치료뿐 아니라 남을 도울 수 있는 초식 중에는 기사회생이 있다.

    하지만 이번만은 기사회생으로 상대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사회생의 효과보다 환자의 뇌가 먼저 녹아내릴 것이었다.

    기적이 일어나서 기사회생의 효능이 환자에게 미친다고 해도 구 할만을 회복할 수 있다.

    머리의 일 할이 기능을 잃는 것이다.

    무인으로서, 아니 평범한 사람으로서도 살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전생에는 일지대사였고 이번에는 태극검제라니!

    발병하는 시기도 전혀 달랐다.

    누군가 강호라는 바둑판 위에 첫수를 놓은 느낌이었다.

    한빈이 미소 지었다.

    적들의 도발은 오히려 한빈이 원하는 바였다.

    백경일까? 아니면 또 다른 암중 세력?

    이 판에 적어도 훈수 두는 사람 하나 정도는 있다는 느낌이었다.

    일단 확인하기 위해서는 삼황초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묘한 한빈의 표정에 현문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팽 공자.”

    “아닙니다. 이번에는 구하겠습니다. 저들 마음대로 강호가 흔들리게 할 수는 없죠.”

    “흠.”

    “지금부터 제가 말하고 싶은 핵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해 보시게.”

    “먼저 제 말에 따라 줄 것을 약속하셔야 합니다.”

    “흠, 듣지도 않고 어떻게 약속하겠는가?”

    “약속하지 않겠다고 하시면 저도 여기서 임무를 끝내겠습니다.”

    한빈의 말에 현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놀라서 보인 행동이었다.

    팽혁빈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강호 최고 배분의 현문에게 보일 만한 태도가 아니었다.

    거기에 태극검제가 보낸 밀서였다.

    그런데 한빈이 저리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니!

    평소 아우의 모습을 아는 팽혁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탁자 위를 오갔다.

    흔들리는 그들의 눈빛만이 어지럽게 얽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현문이었다.

    “무당을 도와주게. 내 어떤 일이라도 하겠네.”

    “…….”

    한빈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팽혁빈의 입술이었다.

    팽혁빈도 약속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시선을 받은 팽혁빈은 살짝 당황했다.

    먼저 약속부터 하라는 것은 현문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는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한빈의 눈빛을 보면 팽혁빈까지 약속해야 말을 하겠다는 무언의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다.

    의문도 잠시, 팽혁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강대한 기세가 그를 덮쳤기 때문이다.

    그 기세의 주인은 다름 아닌 현문이었다.

    사람 좋은 현문에서 투계 현문으로 변한 것이다.

    그의 눈빛이 마치 아우를 못 믿는 형은 자신의 손으로 목을 비틀어 버릴 것이라고 위협하는 듯싶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한 것이다.

    팽혁빈이 수긍하자 한빈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예의 바르며 상냥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제야 분위기는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지금부터 주의 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당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제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셔야 합니다. 즉, 제 말을 적극적으로 따라 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약속하겠네. 그 정도 각오는 되어 있네.”

    현문이 고개를 끄덕이자 팽혁빈이 웃었다.

    “그 정도의 부탁이라면 형인 내가 안 들어줄 수 없지. 솔직히 부탁을 안 해도 나는 네 말을 믿는다, 하하.”

    말을 마친 팽혁빈은 죽엽청을 통째로 입에 털어 넣었다.

    뭔 그깟 일로 긴장하게 만들었냐는 듯 연신 입꼬리를 실룩이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제 두 번째 부탁입니다. 무당산에 올라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제 일에 관여하시면 안 됩니다. 저를 돕겠다고 하셔도 안 됩니다. 저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헉, 그게 무슨 말이냐?”

    “가문의 일원이자 정의맹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네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의맹과 저 중 하나를 택하라면 누굴 택하시겠습니까?”

    “그야…….”

    “아마도 저를 택하시겠지요. 가족은 가문 그 자체니까요.”

    “말 잘했다. 그건 당연한 말이 아니더냐.”

    “그러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정의맹의 편에 서는 것이 가문을 지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의맹이 네 목에 칼을 들이민다면?”

    “제 말의 핵심은 그럴 경우, 제 목에 칼을 들이미는 시늉이라도 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흠, 어려운 부탁이구나.”

    “미리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한빈이 웃으며 검지를 펴서 입술을 가리켰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뜻이었다.

    그 말에 팽혁빈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건 현문 어르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순간 현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무당산에 도착하면 이전까지의 관계는 모두 잊으십시오.”

    “허허, 그리하겠네.”

    현문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형에게도 강요한 주의 사항이었다.

    한빈을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이 거부할 수 없었다.

    그때 한빈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마지막 부탁입니다. 마지막 부탁은 제가 했던 모든 말을 다른 이에게 옮겨서는 아니 됩니다.”

    한빈의 말에 팽혁빈과 현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가장 들어주기 쉬운 부탁이었다.

    한바탕 감정의 폭풍이 소용돌이쳤던 실내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술잔을 드는 소리.

    병째 들이켜는 소리.

    그리고 가끔 들려오는 그들의 정이 담긴 목소리가 풍경화처럼 실내를 채웠다.

    술이 다 떨어지자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나만 물어도 되겠나?”

    현문이 조용히 한빈을 불렀다.

    한빈이 몸을 돌려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말씀하시지요.”

    “삼황초의 행방은 정말 알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사형을 쾌차시킬 수 있다는 것도…….”

    “구 할 정도는 맞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도 구 할 정도, 그리고 쾌차시킬 수 있는 확률도 구 할입니다. 나머지는 천지신명께서 정하실 일이지요.”

    “알겠네. 진인사대천명! 원시천존께 모든 것을 맡기겠네.”

    현문은 의외로 빨리 수긍했다.

    그는 그제야 도인다운 허허로운 표정을 보였다.

    * * *

    그날 저녁.

    한빈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앞에 두고 장자명과 마주 앉아 있었다.

    한빈의 표정은 여유로운 반면, 장자명은 불안한 듯 찻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자명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무당산으로 향하는 길에 동행하자고 할까 봐서였다.

    한빈의 옆에 있으면 얻는 게 있긴 했다.

    하지만 잃는 것이 더 많았다.

    장자명이 가장 많이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건강이었다.

    한빈의 옆에 붙어 있으면 묘하게도 피곤함이 가시지 않는다.

    영약이란 영약을 모조리 다 챙겨 먹고 몸에 좋다는 것을 다 먹어도 피곤이 가시지 않는다.

    물론 장자명도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한빈은 사람을 부려 먹어도 너무 철저하게 부려 먹고 있었다.

    천수장의 극양지기를 품은 영초의 관리에서부터 시작해서 환자의 치료까지.

    바로 얼마 전 서기들의 훈련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정작 죽어 나간 것은 서기들이 아니라 장자명이었으니까.

    불안에 떠는 장자명을 조용히 바라보던 한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몸이 근질근질하지 않습니까? 장 의원.”

    “허허, 팽 공자. 그게 무슨 말이오? 근질근질한 게 아니라 공자가 진행한 두 번의 훈련 덕분에 내 몸은 야들야들해졌다오. 이건 몸인지 시든 파 뿌리인지 구분이 안 되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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