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63화 (546/621)
  • 563. 주의 사항 (3)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당파의 장문인이시죠.”

    “하북팽가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그 대신 초대장이 왔다는 것이냐?”

    “네, 맞습니다.”

    “너와의 약속을 어겼다고 정파의 일부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해석을 한 것이냐? 그것도 조금은 섣부르다 싶구나.”

    팽혁빈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나왔다.

    그 한숨에 맞춰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한빈의 얼굴에 한 줄기 웃음이 피어났다.

    결코 비웃음이 아니었다. 팽혁빈의 진중한 모습이 좋아 보여서였다.

    팽혁빈은 가문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림의 평화보다는 가문의 존속이었다.

    가문이 사라지면 무림의 평화가 찾아와도 그건 모두 쓸모없는 짓이다.

    그것이 올바른 가주의 태도였다.

    무림을 위해서 가문을 내던지는 가주 따위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팽혁빈은 훌륭한 가주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빈은 어떤 답도 내놓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팽혁빈도 그 웃음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사랑스러운 동생의 호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피부를 찌르는 진기가 흘러들어 온다.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팽혁빈은 앞에 한빈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본능대로 움직였다.

    한 걸음 옆에서 나타난 기척에 팽혁빈은 오른손을 뻗었다.

    팡!

    상대를 향해서 장력을 내뿜은 팽혁빈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가 펼친 혼원장에는 적어도 칠 성의 공력을 실었다.

    하지만 소리만 요란했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마치 허공을 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대신 진기의 소용돌이가 먼지를 일으켰다.

    눈 몇 번 깜빡일 시간이 지나자 먼지가 걷혔다.

    그곳에는 뜻밖의 인물이 팔짱을 끼고 미소 짓고 있었다.

    팽혁빈이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에 있는 자는 무당파의 현문이었다.

    현문은 한빈을 만나기 전까지는 기행을 벌이며 강호를 주유하던 자였다.

    배분으로 보나 그의 성격으로 보나 껄끄러운 이었다.

    오죽하면 투계(鬪鷄)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물론 한빈에게만은 예외였다.

    어찌 보면 팽혁빈보다 한빈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동생의 아군은 팽혁빈에게도 아군이었다.

    팽혁빈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현문 어르신, 오셨습니까?”

    “그래, 잘 지냈나? 그나저나 자네의 장력을 보니 수련이 헛되지 않았나 보군.”

    “사천당가에서 보고 오랜만입니다.”

    “그렇지, 그때 보고 오랜만이지. 그런데 봤으면서 왜 그렇게 멀뚱히 있나?”

    “제가 어찌해야…….”

    “그 술 말일세. 혼자 드시려고 했는가?”

    현문이 농담조로 팽혁빈의 옆에 있는 술병을 가리켰다.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서……. 일단 이거라도 드시죠.”

    “고맙네. 역시 엎드려 절받기가 내 독문 무공이라니까? 그러고 보니 초대받고 뺨 맞기도 있었군.”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옆에 나타나셔서…….”

    “괜찮네. 내 놀리느라고 한 말이야. 옆에서 들어 보니 핵심은 팽 공자한테 모두 들은 것 같은데, 맞나?”

    “제 아우가 한 말이 사실입니까?”

    “그건 해석하기 나름이지. 자네가 이걸 해석해 보겠는가?”

    말을 마친 현문은 탁자 위에 서찰 하나를 펼쳤다.

    팽혁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해서 서찰의 내용을 살폈다.

    서찰을 확인하던 팽혁빈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아무리 봐도 서찰의 내용은 해석할 부분이 없었다.

    단순한 안부 인사였다.

    그리고 건강상의 이유로 하북팽가에 오지 못하니 현문에게 이 서찰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현문이 웃었다.

    “자네나 나나 까막눈이군, 하하.”

    “까막눈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르신.”

    “글자를 못 보고 먹물만 보니 하는 말일세.”

    “제 우매함을 깨우쳐 주시죠, 어르신.”

    팽혁빈은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살짝 고개 숙였다.

    그는 상대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놀릴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현문 자신도 까막눈이라고 스스로를 낮췄다는 점이었다.

    현문이 대견하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역시 자네는 팽 공자의 형이 될 자격이 있어. 이리 겸손하다니, 다른 가문의 대공자 같았으면 표정 관리하기 바빴을 텐데 말이야…….”

    현문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자, 한빈이 나섰다.

    “표정 관리하면서 말대꾸하던 분들은 전부 현문 어르신한테 맞았죠.”

    “허, 소문이 그리 났나?”

    “사실은 조금 더 심하게 났습니다. 그런데 그중 선인은 없고 악인만 있다는 건 강호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살짝 화제가 바뀌자 팽혁빈이 다급하게 나섰다.

    “제가 궁금한 건 바로 이 서찰입니다. 왜 제가 까막눈이라고 하셨습니까?”

    “바로 여길 보게. 여기! 여기! 그리고…….”

    현문은 서찰의 내용 중 몇 글자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일곱 글자였다.

    현문은 첫 문장의 첫 번째 글자에서부터 맨 마지막 문장의 마지막 글자를 가리켰다.

    [초(草), 중(中), 위(危), 필(必), 위(危), 득(得), 황(皇).]

    차례대로 가리킨 글자는 합쳐 봐도 의미 없는 문장이었다.

    글자를 바라보던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현문이 슬쩍 입꼬리를 올린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팽혁빈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자네가 맞히면 내가 섭섭할 뻔했어. 팽 공자가 내게 이걸 보여 줬어도 나는 알아보지 못했거든. 그런데 자네가 알아챈다면 자네 머리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게 아니겠나? 그러면 내가 서운하지. 사형과 주고받은 선문답이 얼만데…….”

    말을 마친 현문은 조용히 그가 가리켰던 일곱 개의 글자를 이었다.

    휙, 휙.

    그는 손가락으로 바람 소리가 나도록 빠르게 글자들을 이었다.

    팽혁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현문이 가리킨 문자를 살폈다.

    일곱 개의 글자를 이어 보니 삼(三)이라는 무의미한 글자가 나온다.

    팽혁빈이 다시 말했다.

    “삼이라는 숫자를 제게 가르쳐 주려 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그래도 알 수가 없군요.”

    “이것도 다행이군. 나도 여기까지 보고도 찾아내지 못했으니 말이야. 하하.”

    현문이 시원하게 웃으며 한빈에게 턱짓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나섰다.

    “이것은 저만 알아볼 수 있는 암어였습니다. 태극검제가 이곳으로 오시기로 한 건 제가 그분이 남긴 일곱 걸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태극검제 어르신은 제가 그 일곱 걸음을 깨달으면 그 뒤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쉬지 않고 설명을 잇던 한빈이 술잔을 들었다.

    목을 축이기 위함이었다.

    마른 입술에 죽엽청을 적신 한빈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현문 어르신이 가리킨 곳이 그 일곱 걸음의 방위입니다. 그 방위는 현문 어르신도 모르시니, 여기 모인 사람 중 이걸 풀 수 있는 것은 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리 낙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

    “흠.”

    팽혁빈이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현문은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현문은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팽혁빈이 이 암어를 맞히면 솔직히 씁쓸할 뻔했다.

    현문도 천수장으로 오며 이 서찰을 몇 번이고 들춰 보았다.

    태극검제에게 직접 받은 서찰은 아니었다.

    이 서찰은 개방을 통해서 받았다.

    전서구보다 더 안전하고 은밀한 방법이었다. 서찰을 들고 온 이는 홍칠개였다.

    개방에서도 끗발이 가장 세다는 홍칠개가 이 서찰을 들고 왔다.

    이 서찰이 갈 곳은 다름 아닌 한빈. 홍칠개는 한빈의 사부가 아니던가?

    직접 한빈에게 전하면 될 것을 현문에게 맡긴 이유는, 이번 일에 개방은 소식만 전달했을 뿐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태극검제가 전하려는 사안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서찰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 막중한 사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빈은 현문이 이 서찰을 보여 주자마자 뜻을 알아챘다.

    그때 현문의 감정은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것도 잠시, 현문은 바로 인정했다.

    십 년 동안 노력해도 얻지 못한 깨침을 전한 것이 바로 한빈이었다.

    그런 한빈이 이 서찰을 해석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잠시 전 기억을 떠올린 현문은 한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호의 가득한 미소였다.

    그 미소에는 한 가지 감정이 더 담겨 있었다.

    그것은 다행이라는 감정이었다.

    팽혁빈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해석을 못 하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씨살짝 풀어진 분위기 속에 그들은 다시 술잔을 들었다.

    죽엽청으로 다시 입술을 적신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위(危)자가 두 번이 붙은 것을 보면 위기 중의 위기라는 말입니다. ……득(得)은 저희에게 내린 부탁이지요.”

    “무엇을 찾으라는 것인가?”

    “남은 글자는 삼, 황, 초! 이렇게 세 글자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맞습니다. 삼황초를 의미하는 것이 맞습니다.”

    “허……. 전설의 삼황초를 어찌 찾으라는 것인가?”

    “전설이 아닙니다.”

    “전설이 아니라고? 삼황초는 삼황오제 중 삼황이 애지중지 길렀다는 전설의 영초가 아니더냐? 그걸 어떻게 현실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

    그의 말대로 삼황초는 삼황이 공동으로 심었다는 영초였다.

    덕분에 전설 속의 삼황인 셋의 기운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각각 화(火), 빙(氷), 뇌(雷)의 기운이었다.

    어찌하여 풀 하나가 불과 얼음, 번개의 기운을 다 담고 있을까.

    세인들은 그것이 그저 전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팽혁빈이 눈을 가늘게 뜨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결코 전설이 아닙니다. 삼황초에 삼황오제의 전설을 갖다 붙인 것은 삼황초가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는 영초이기 때문입니다.”

    “…….”

    팽혁빈은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무당파의 태극검제가 전한 서신의 숨은 뜻도 기가 막히는데 부탁은 더 기가 막혔다.

    황당한 것은 한빈이 삼황초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한 점이다.

    삼황초는 천고의 영약을 만들 수 있는 재료라 전해진다.

    그때였다.

    현문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팽 공자는 왜 삼황초를 탐내지 않았던 건가? 삼황초는 천고의 영초가 아닌가? 만약 팽 공자가 그 삼황초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 왜 그것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제가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빈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물론 현문도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아.”

    여러 감정이 담긴 탄성이었다.

    현문이 한빈을 좋아하긴 하지만 욕심이 없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계약서를 옆에 끼고 다니겠는가?

    지나가는 강호인, 아니 옆에 있는 팽혁빈에게 물어도 이건 거짓말이라고 할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팽혁빈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삼황초는 영초가 아니라 독초이기 때문입니다.”

    “아우야. 삼황초가 독초라니, 그게 무슨 말이더냐?”

    팽혁빈이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 무섭습니다, 형님.”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런다. 삼황초가 독초라면 왜 태극검제가 밀서를 통해서 그것을 구해 오라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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