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62화 (545/621)

562. 주의 사항 (2)

악필승은 그저 다른 사람을 추천하기 위해서 힐끔 눈동자를 돌리고 있을 뿐이다.

고민의 주인 악필승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의 고민은 하나였다.

누굴 추천해야 욕먹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다른 각주들은 자신이 나서려고 눈을 부랴부랴 떴지만, 악필승은 그 모습이 수행원으로 뽑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좋으면 남들도 좋을 것 같고, 자기가 싫으면 남들도 싫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누구나 다 똑같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한빈이 재촉하듯 말을 이었다.

“추천할 동료가 아무도 없습니까?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부담스럽다면 추천할 동료의 성이라도 외치십시오.”

“…….”

그 재촉에도 각주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만약 자진해서 동행할 사람을 뽑는 거라면 너나없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누군가에게 넘겨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 영광을 누군가에게 넘긴다는 것은 자존심이라는 호신강기를 스스로 부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은 무인의 자존심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동료를 추천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만, 한빈은 최고의 인재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한빈이 생각하는 최고의 인재는 극한의 상황에서 동료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는 자였다.

모두가 등을 맡길 수 있는 자.

모두가 그를 위해서 몸을 던질 수 있는 자.

전생의 귀검대 동료들이 그랬었다.

한빈은 최고의 동료로 인정받는 각주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그들의 입에서 첫 번째로 호명되는 자.

그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이 중 최고의 인재일 것이었다.

팔짱을 끼고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던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동료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자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은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서로의 등을 맡기기에는 아직 수련이 부족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한빈이 뽑아야 할 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제 간 보기는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한빈이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살짝 바뀐 한빈의 표정을 심미호는 바로 알아챘다.

심미호는 저 표정의 의미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한빈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큰 사고가 터진다.

부대주 심미호가 부리나케 한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 숙였다.

“제게 맡겨 주시죠.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그럼 한번 해 봐, 심 부대주.”

한빈이 미소 지었다.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단지 심 부대주가 저들을 어떻게 조련할지 궁금해서였다.

승낙을 받은 심미호가 그들의 앞에 섰다.

심미호는 다시 얼굴에 냉기를 피워 냈다.

얼음장 같은 냉기를 얼굴에 두른 심미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각주님들! 사신대에 다시 오르고 싶습니까? 동료를 못 믿습니까? 아니면 그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까?”

“…….”

“그럼 지금부터 바로 추천할 동료를 호명합니다!”

심미호가 마지막 말에 내공을 실었다.

그때 기적처럼 그들이 입을 열었다.

“악!”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쳤다.

이것은 훈련 시 내던 ‘네!’라는 뜻의 구령이었다.

그들이 구령을 외치자 심미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저들이 교관으로서 자신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미호가 뿌듯한 기분으로 미소 짓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귓가에 낙엽 밟는 소리가 울렸다.

사사-삭.

동시에 뒤쪽에 있던 한빈이 앞으로 나왔다.

앞에 선 한빈을 본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들에게 압박했으니 잠시 뒤면 대답이 자연스레 나올 것이다.

그런데 한빈이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나온 것이다.

심미호가 보는 한빈은 다소 가볍더라도 기다릴 줄 아는 자였다.

그런데 한빈이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뛰어나온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심미호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한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한빈이 고개를 힐끔 돌렸다.

그 시선에 심미호가 화들짝 놀랐다.

마치 자신의 생각이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어서였다.

심미호는 한빈이 사람의 생각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었다.

그만큼 한빈을 바라보는 심미호의 시선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담겨 있었다.

한빈이 심미호에게 물었다.

“여기 악씨는 악필승 각주밖에 없지?”

“네, 그건 그렇지만 갑자기 악필승 각주는 왜…….”

“지금 다들 악필승 각주를 선택했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주군.”

심미호가 어질어질한 듯 이마를 만졌다.

한빈은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히 악필승의 앞으로 걸어갔다.

“악필승 각주, 이의 없지요?”

“악!”

악필승에게 ‘아니요’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물론 지금 내뱉은 악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구령이었다.

한빈은 악필승을 앞으로 이끌었다.

악필승의 표정은 마치 복날 끌려가는 강아지 같았다.

그 정도로 처량해 보였다.

물론 다른 각주들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냥 구령으로 답한 것뿐인데, 조향각주 악필승이 무당산 행렬의 수행원으로 뽑히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장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주작각주 가기군이었다.

가기군은 한빈이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빈이 추천할 이의 ‘성’만 말해도 괜찮다고 말한 것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각주가 분명히 ‘악’이라고 외쳤다.

그것이 단순한 구령이든 아니면 성을 말한 것이든 상관없었다.

이곳의 지배자가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그렇다고 그 말을 다시 담을 수도 없다.

말이란 잔 속에 담긴 물과도 같아 한번 쏟아 내면 담지 못한다는 것이 강호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황한 것은 각주들뿐이 아니었다.

각주들의 훈련을 담당했던, 심미호는 그들에게 애정이 있었다. 마치 제자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이었다.

심미호는 슬쩍 한빈의 눈치를 봤다.

한빈은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이번 일이 한빈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악’이라고 외친 순간 자신이 필요한 사람을 뽑은 것이 분명했다.

다만, 의문이 드는 것은 무당산으로 향하는 행렬에 왜 악필승을 뽑았냐는 점이었다.

분위기는 일단 진정되었다.

이번 일의 최고 피해자는 악필승이었다.

한빈의 옆에 선 악필승은 지금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있었다.

악필승은 한빈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빈에게 말려들어서 연무장 바닥에 머리를 박고 인생이 달라졌다.

물론 지금 하북팽가의 음식을 책임지는 조향각주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지만, 문제는 한빈이 아직도 두렵다는 점이다.

악필승은 겨우 표정을 수습했다.

다행히도 이번 행렬에는 한빈이 참석하지 않을 것 같았다.

팽혁빈이 중심에 서고 한빈이 추천하는 고수 한 명이 합류하기로 공표했었다.

거기에 수행원으로 세 명의 각주가 그 행렬을 호위한다.

여기까지만 생각해 보면 이 행렬에 한빈이 낄 자리는 없었다.

악필승은 조향각주로서 하던 일을 이번 행렬에서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한빈과 만나지만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체념한 것은 악필승뿐이 아니었다.

다른 각주들도 감정을 다스리며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모두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한빈에게 받은 것은 평생 그들이 이룬 것보다도 더 큰 선물이었다.

그때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 * *

악필승을 시작으로 주작각주 가기군과 현무각주 담천호가 행렬에 포함되었다.

한빈의 기준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들을 뽑은 것은 바로 설화와 청화였다.

손가락을 튕기니 설화와 청화가 나타났고 한빈은 둘에게 행렬에 동참할 각주를 한 명씩 뽑으라고 했다.

설화는 주작각주 가기군을 뽑았고 청화는 현무각주 담천호를 뽑았다.

그들을 뽑는 과정에 설화와 청화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물론 다른 각주들의 원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설화와 청화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화는 주작각주 가기군을 뽑은 이유를 평소에 당과를 가장 많이 사 줬던 아저씨라고 했다.

물론 청화도 비슷한 이유였다.

평소에 귀엽다면서 청화에게 몇 번 간식을 사 준 일이 있었던 것.

거기에 대해서 한빈의 설명은 간단했다.

인맥 관리는 주변부터 하라는 것이 이번 공부라고 했다.

하지만 한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머지 각주들에게는 하북을 중심으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그 기회가 무엇인지는 영웅 대회에 참석하는 인원들이 무당산으로 떠나는 당일 말해 주겠다고 했다.

모든 일이 끝나자 한빈은 팽혁빈을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호기심 가득한 팽혁빈의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팽혁빈에게 말해 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한빈은 팽혁빈의 천수장에서 가장 구석진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의 앞에는 찻잔 대신에 술잔이 놓여 있었다.

“한잔 받으시죠, 형님.”

“아니다.”

“술을 마다하시다니…….”

“누가 마다한다 했느냐? 그냥 병째 주거라. 하하.”

팽혁빈이 호탕하게 웃자 한빈도 마주 웃으며 술병을 건넸다.

건네받은 술병을 코 아래로 쓸더니 팽혁빈은 더욱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아까 보니 궁금하신 게 많은 것 같던데, 술이 먼저입니까?”

“그럼, 당연한 걸 왜 묻느냐! 너는 항상 내 앞에 있겠지만, 주향은 한번 날아가면 다시 돌아올 리 없지 않느냐. 하하.”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린 팽혁빈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랐다.

“저는 잔에 먹겠습니다.”

“그야 취향이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술이야 취향이 아니더냐?”

“술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제 행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궁금한 게 많으셨을 텐데 본질은 묻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오호, 이제 털어놓을 때가 됐나 보구나.”

“네, 영웅 대회에 참가하시는 건 형님이시잖습니까? 그러니 말씀드려야죠.”

“그렇게 생각했다면 많이 늦었구나.”

“네, 일단 각주들의 신원 조회부터 해야 했습니다.”

“그건 지난번에 끝난 일이 아니더냐?”

“끈이 어디로 이어져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결론은?”

“적과 내통하는 자는 없습니다.”

“흠, 적이라…….”

“네, 맞습니다. 적이지요. 그리고 이번 영웅 대회도 그 적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 적이 마교더냐?”

“아닙니다.”

“그럼 사파더냐?”

“그것도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사파 쪽하고는 연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어디에서 온 자들이더냐?”

“그걸 모른다는 게 무서운 일이지요.”

“네가 한 말 중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영웅 대회와 적이 관계있다는 것은 섣부른 판단 같구나. 이건 어찌 보면 정파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발언이다.”

“조심스럽기에 여기로 모신 겁니다. 그리고 정파 전체는 아닐 겁니다. 그런데 일부일 수는 있겠죠.”

“근거를 물어봐도 되겠느냐?”

팽혁빈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조금은 거칠어진 것 같기도 하고 조금은 차가워진 것 같기도 했다.

한빈은 그 변화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본래에는 태극검제께서 이곳으로 오시기로 했습니다.”

“태극검제라면…….”

팽혁빈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구대문파의 장문인이 무림세가에 방문한 것은 손에 꼽힐 일이라는 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