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 주의 사항 (1)
드디어 기다리던 두 번째 약속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각주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냈다.
그들의 결연한 태도에 한빈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바라만 볼 뿐 말을 잇지 않았다.
한빈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마치 기대감을 고조시키거나 뜸을 들이듯 보이기도 했다.
한빈의 모습에 각주들의 기대감은 더욱 올라갔다.
이제는 한빈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각주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내 공자 한빈은 하북팽가를 떠나 천수장으로 오면서 했던 약속을 정확히 지켰다.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막내 공자가 그들에게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인간의 한계를 경험했었다.
육체적뿐 아니라 정식적으로도 그들은 한계를 넘나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처음에는 수련 자체가 고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한 명도 빠짐없이 이전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자신의 발전에 놀라워하는 이들 중에는 한 달 전 각주가 된 악필승도 있었다.
사실 각주라고 하기에는 맡은 임무가 가벼웠다.
악필승은 조향각의 각주였다.
조향각(朝香閣)은 가문의 음식을 책임지는 곳이었다.
하북팽가에서 식당으로 쓰는 전각을 조향각이라 이름 붙인 이유는 간단했다.
아침에 유일하게 나는 향기가 바로 밥 짓는 냄새였기 때문이다.
밥 짓는 냄새는 무사들의 기운을 깨우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조향각은 무사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중요한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과연 무인이 식당을 맡으려고 할까?
엄연한 가문의 일이라고는 하나, 음식을 만드는 조향각의 일은 무사의 하루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자재부터 살펴야 했다. 그런 후 요리가 시작되면 모든 과정을 관리하고 만들어진 음식의 간을 봐야 한다.
이것이 조향각주의 하루였다.
음식에 가문에 해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를 철저히 살펴야 했다.
물론 아침뿐이 아니었다.
점심에도 저녁에도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련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무인으로서 음식을 담당하는 조향각을 맡는다고?
어찌 보면 한직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들이 보면 한숨 쉴 일이지만, 악필승에게 조향각주의 자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 줄과도 같았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악필승은 가문에서 축출되어도 할 말이 없는 자였다.
그는 삼 공자 팽무빈의 오른팔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팽무빈이 거느린 호위대의 수장이었다.
사실 그는 팽무빈에게도 그다지 신임을 얻지 못했다.
한빈의 기세에 눌려서 연무장에서 온종일 머리를 박은 덕분에 악필승은 그들의 눈 밖에 났었다.
짓지 못하는 개를 기를 주인은 없었다.
기세가 꺾인 무인은 짓지 못하는, 아니 짓는 척도 못 하는 개였다.
어찌 보면 무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난 상태였다.
그때 그를 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심미호였다.
가문에서 쫓겨나기 전에 주방에서라도 일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었다.
당시 심미호는 본래 팽경빈의 휘하에 있다가 한빈 쪽으로 줄을 바꿔 타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추천이기에 악필승은 하북팽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팽무빈을 떠나 조향각을 맡은 후의 일이었다.
악필승은 예상 외로 요리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절대미각의 소유자였다.
절대미각이라는 것이 정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국물 한 입으로 그 안에 들어간 모든 재료를 알아낼 정도로 탁월한 미각의 소유자였다.
그는 호위대의 수장에서 조향각의 각주로 훌륭하게 변신했다.
누가 뭐라 해도 악필승은 자신의 상황에 만족했다.
무인의 칼이든 숙수의 칼이든 그게 무엇이 중요하랴!
잘 먹고 잘 살면 되었다.
안분지족이라는 사자성어는 그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런데 만족하면서 살고 있던 그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바로 각주들이 참여한 회의에 불려 가서 졸지에 서약서에 서명한 것이다.
음식을 책임지는 조향각주가 왜 이런 험난한 수련을 받아야 하는지 오늘 아침까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장 불만이 많았던 악필승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한빈이 준 도에 진기를 두를 수 있었다.
도신을 따라 흐르는 푸른 진기는 허상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의 가슴속에 숨어 있던 무인의 본능이 꿈틀거렸다.
사실 악필승은 어떻게 도기(刀氣)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악필승은 요동치는 감정을 수습하기 위해서 뛰는 심장을 움켜잡았다.
그것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물론 감정을 수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악필승뿐만이 아니었다.
현무각주, 주작각주 등 모두가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감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연무장을 휩쓸 때였다.
한빈은 그들의 요동치는 감정에 화답하듯 말을 이었다.
“두 번째 혜택은 바로 경험입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꼈다.
한빈이 제시한 두 번째 혜택에 대한 설명은 너무 간단했다.
정확하게 경험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먼저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각주들의 무거운 입은 이번 훈련의 성과였다.
그들은 조용히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말없이 모두의 눈을 조용히 바라봤다.
누구 한 명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밤하늘의 달이 세상을 비추듯 모두의 눈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각주들의 눈빛도 반응했다.
요동치던 감정은 어디 가고 모두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경험이 혜택이라고?
한빈의 말은 두리뭉실했다.
당연히 모두는 한빈의 입술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호기심으로 일렁이는 눈빛에 한빈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말한 경험이란……. 무당산까지 동행하면서 얻을 경험입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적과 수많은 고수가 있을 겁니다. 그들과의 만남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한빈의 제안에 각주들이 눈을 반짝였다.
그중 주작각주 가기군만은 살짝 의심이 들었다.
수많은 고수와 적이 왜 여기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영웅 대회에서 암투가 벌어질 수는 있어도 그곳까지 가는 길은 가장 안전했다.
대문파와 무림세가가 동시에 이동한다는 것은 강호 최대의 행사라는 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간 크게 습격을 할 산적 혹은 자객들은 없었다.
괜히 영웅 대회에 참석하는 무림인을 건드렸다가는 무림 공적으로 찍히기 십상이었다.
거기에 지금 대회를 주최하는 것은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무당파였다.
소림을 제외하면 최고의 힘을 가진 문파라 세인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무당이 주최하는 영웅 대회로 향하는 행렬에 적이 나타난다?
이건 조금 말이 되지 않았다.
정보를 담당하는 주작각주이기에 드는 의심일 수도 있었다.
역시나 다른 각주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각주들이 아무 말도 없자, 한빈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이번에 얻은 힘을 강호에서 써 보고 싶지 않습니까?”
“…….”
각주들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복받쳐 오를 뿐이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팽혁빈이 조용히 한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전에 말하기로는 나와 나를 호위할 고수 한 명이면 족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찌 영웅 대회에 가는데, 형님과 고수 한 명으로 되겠습니까?”
“그럼 여기 있는…….”
팽혁빈은 조용히 각주들을 살폈다.
그들의 눈빛을 보면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라 해도 그럴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각주 중 형님의 수행원을 뽑을 생각입니다.”
“수행원이라…….”
“먼 길을 떠나니, 손이 여럿 필요할 수밖에 없겠지요.”
“누굴 뽑을 것이냐? 이들 모두를 뽑는다면 가문의 업무가 마비될 것이 분명한데…….”
“딱 세 명이면 족합니다.”
“흠, 그 기준이 궁금하구나.”
팽혁빈은 진심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한빈의 제안은 혜택이 될 수도 있었고 고통스러웠던 수련의 연장이 될 수도 있었다.
천수장에서 이루어진 수련의 경우는 모든 각주가 한명도 빠짐없이 받았다고 한다면, 이번 경우는 그와 달랐다.
무당산으로의 동행이 각주들에게는 상일까? 벌일까?
일단 저들의 눈빛만 봐서는 상이 맞았다.
그러면 그 상을 주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그 기준은 모두가 수긍할 만큼 합리적일까?
이건 가문을 경영하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때 한빈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한빈도 팽혁빈의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럼 나는 잠시 물러나 있으마!”
팽혁빈은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각주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대화에 각주들은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눈빛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팽혁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각주 중 딱 한 명만은 한빈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조향각주 악필승이었다.
의문도 잠시, 팽혁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팽혁빈도 그의 근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가주직을 맡기 위해서 세가의 식솔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악필승은 지금 가문에서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는 이라고 보고받았다.
무공에 대한 욕심보다는 요리에 대한 욕심이 더 큰 자였다.
팽혁빈은 한빈이 악필승만은 뽑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팽혁빈이 상황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동료의 추천입니다. 여러분의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자를 첫 번째 수행원으로 뽑겠습니다.”
“…….”
그들은 말없이 주변을 힐끔 바라봤다.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던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각주들 모두 결심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정면을 바라봤다.
이것은 무인의 자존심이었다.
수행원으로 추천하라는 것은 무위가 가장 강한 자를 뽑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한빈의 의도가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
다른 자를 추천한다면 자신이 두 번째가 된다.
지금 그들은 무인으로서의 긍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상태였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추천할 생각 따위는 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그는 바로 조향각주 악필승이었다.
그는 방금 전까지 무인으로서의 긍지가 끓어오르긴 했었다.
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조향각주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런 고생은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도기를 피워 낸다고 해서 요리의 맛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무공의 고수가 된다고 해서 조향각주로서의 삶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북팽가의 음식이나 책임지며 조용히 살고 싶었다.
조향각에서 나온 음식을 취하며 행복해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
이들의 행복을 상상하며 음식을 관리하고 요리하는 것.
그것들에 악필승은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보니, 다른 각주들과는 달리 자신이 뽑히겠다는 생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