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 새로운 물결 (3)
훈련은 하북팽가를 나오면서 시작되었다.
뒷산의 초입에 들어서자 한빈은 각주들에게 복면을 씌웠다.
야행복에 잠입용 복면을 씌우고 눈만 드러낸 상태에서 그들은 산을 타고 있었다.
하루 반 동안 그들에게 휴식은 없었다.
복면이 얼마나 거추장스러운지 그들의 호흡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요, 흘러내리는 땀까지 막고 있었다.
이것은 수련이 아니라 고문을 하는 것만 같았다.
더 무서운 것은 조교라고 데려온 적혈맹호대 대원들이었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모두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악랄한 것은 심미호 부대주였다.
한빈의 옆에 있을 때는 서글서글하고 공손해 보였던 그녀는 한마디로 악마였다.
지금도 그녀는 각주들을 옥죄고 있었다.
그녀에게 각주들은 훈련생에 불과했다.
심미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대답했습니까? 대답은 악으로 통일합니다.”
“악!”
각주들이 동시에 소리 질렀다.
수련이 시작되고 ‘아니오’라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네’라는 대답만 가능했다.
모든 것이 서약서에 나와 있는 사항이었다.
‘네’라는 대답을 ‘악’이라고 말하는 것도 수련의 규칙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심미호의 지시에 ‘악’이라고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각주라는 허울 좋은 감투는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한빈은 하북팽가의 정문을 통과하자 그들의 앞에 서약서를 내밀었다.
죽는 것조차 조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이 수련의 특별한 규칙이었다.
채찍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수련을 통해서 한빈은 힘을 약속했다.
그 약속에 그들의 가슴은 용암처럼 들끓었다.
물론 그 용암은 산기슭을 넘어가면서 차갑게 식었다.
팽혁빈은 복면 안쪽으로 보이는 식어 가는 그들의 열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열정 대신에 후회를 가득 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팽혁빈이 동행하게 된 것은 한빈의 비밀 수련법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차기 가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을 뿐인데 천수장으로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자신이 저곳에 끼어서 똑같은 훈련을 받았다면?
과연 저렇게 버티고 있을까?
아마 저들도 서약서만 안 썼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지켜보는 것만 해도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물론 육체적인 시련만이 힘든 것은 아니었다.
각주들은 자신의 지위를 모두 내려놓고 있었다.
그들은 하북팽가의 수뇌부.
그런 그들이 지금 한낱 무력대의 부대주와 대원에 불과한 이들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상황이라면?
자존심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팽혁빈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이거 드실래요?”
고개를 돌려 보니 설화가 당과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팽혁빈은 움찔했다.
차기 가주로서의 위엄은 팽개치긴 했지만, 현 상황이 너무 부조화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 각주들은 산을 오르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처음에 깔끔했던 복장은 찢어지고 해어져서 거지 행색이 되어 버렸다.
바로 옆에는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설화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면 주변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듯 보였다.
이 점이 너무 이상했다.
설화가 다시 물었다.
“대공자님, 당과 드실래요?”
“그래, 고맙구나. 그런데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말씀하세요, 공자님.”
“너는 저 모습에 아무 느낌도 들지 않는 것이냐?”
“수련이잖아요.”
“수련이라…….”
“우리 공자님이 무인이 강해지려는 욕망에는 이유가 없다고 하셨어요.”
“내가 보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뭐, 강해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왜 저런 수련을 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잖아요.”
“넌 저 수련으로 강해질 수 있다고 보느냐?”
진심이 담긴 질문이었다.
이런 수련 방법으로는 절대로 강해질 수 없었다.
설화가 고개를 갸웃한다.
“대공자님은 우리 공자님을 못 믿으시는 거예요?”
“흠.”
팽혁빈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했다.
설화의 눈빛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찌 보면 팽혁빈이 품고 있는 의문보다 한 수 위였다.
헛기침한 팽혁빈이 다시 물었다.
“육체적인 수련은 수련이라고 해도 복면까지 씌우는 건 불편할 것 같구나.”
“그건 저들 때문에 씌운 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이지?”
“그건 적혈맹호대의 조교들 때문에 씌운 거예요.”
“각주들이 아니라 적혈맹호대 때문이라고 했느냐?”
“네, 부대주 언니와 조호 오라버니 그리고 장삼 아저씨가 마음이 여리거든요. 상대의 얼굴을 보고 저렇게 대할 만큼 모질지 못해서요.”
“아…….”
팽혁빈은 탄성을 내질렀다.
가만히 설화를 보던 팽혁빈은 각주들을 조련하고 있는 조교들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설화는 진심인 것 같았다.
팽혁빈이 보기에는 마귀라도 들린 것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그들이 마음이 여리다니!
팽혁빈은 문득 자신이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품었다.
사실 그도 수많은 시체를 지나오며 셀 수 없는 검과 도를 뚫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팽혁빈은 설화의 눈을 바라봤다.
설화의 눈은 평온하기만 했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동정호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팽혁빈은 저 아이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팽혁빈이 듣기로는 길거리에서 거지 행세를 하다가 한빈과 인연이 돼서 들인 아이라고 했다.
그가 의문을 키워 나갈 때였다. 팽혁빈의 눈앞으로 하얀색 호리병 쓱 나타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동생 한빈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먼지 때문에 목이 컬컬하실 텐데 술 한잔 하시죠. 당과는 안주로 드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팽혁빈은 아무렇지 않게 술병을 받아 들었다.
이제까지 동생에게 보여 줬던 형으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더 이상 감정을 드러내면 형으로서의 밑천이 다 드러날 것만 같았다.
팽혁빈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뭉게구름이 얽혀 흘러가고 있었다.
강호라는 물결 속에 얽힌 무인들의 삶과 비슷했다.
강호인은 같이 얽혀서 흘러가다가 언젠가는 눈앞에서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무리와 얽힌다.
하지만 구름은 영원할 수 없는 법.
팽혁빈은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도 하늘 위에 구름에 불과했다.
조금은 덩어리가 크지만…….
그렇다면, 과연 자신이 흩어지는 구름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하는 데 힘이 될 수 있을까?
팽혁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이 안 된다면 앞으로 힘을 기르면 되었다.
그때 각주들의 목소리가 산기슭에 다시 울려 퍼졌다.
“악!”
그 소리에 팽혁빈은 고개를 저었다.
힘을 기르기는 할 테지만, 저런 방법은 사양이었다.
* * *
일주일 후.
천수장의 연무장에서는 한 무리의 거지들이 모여 있었다.
물론 그들의 정체는 각주들이었지만, 누가 봐도 거지였다.
얼굴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으며 찢어진 의복 아래에 드러난 피부는 온전한 곳이 없었다.
이제 그들은 복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복면을 벗은 것이 아니라 훈련 도중에 복면이 다 찢어져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지만, 그들의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서기들이 이곳 과정을 수료하면서 보인 눈빛보다 몇 배는 강렬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서기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도 높은 수련 과정을 거쳤다.
서기들이 마친 것은 일반인의 기준에서 준비한 과정이고, 각주들에게는 무인의 기준에 맞는 과정을 준비했다.
각주들은 일류에서 절정의 무위를 가진 무인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경지를 높이려만 그에 걸맞은 수련 방법이 필요했다.
그들이 거친 수련 방법은 적혈맹호대와 비슷했다.
물론 팽혁빈은 속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그들은 눈빛만으로 강호를 삼킬 것만 같았으니까.
팽혁빈은 팔짱을 풀고 그들에게 가려 했다.
각주들의 고행을 치하하려 함이었다.
그때 한빈이 팽혁빈의 걸음을 막았다.
“형님, 잠시만요.”
“…….”
팽혁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은 교관인 심미호를 가리켰다.
팽혁빈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수련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인 듯했다.
그때 심미호가 각주들을 향해 외쳤다.
“일주일간 고생 많았다!”
“악.”
동시에 구령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심미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훈련은 끝입니다.”
“악!”
다시 구령이 울려 퍼지자 심미호가 머리에 두른 붉은 띠를 풀러 바닥에 던졌다.
그러고는 그들을 향해 깊숙이 포권했다.
심미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훈련 도중에는 표독스러운 데다 차갑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부드럽게 흔들린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고 있다.
각주들은 그 웃음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심미호가 웃더라도 훈련 기간의 인상이 하루아침에 변할 리 없었다.
심미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뗐다.
“고생 많으셨어요, 각주님들! 이제는 구령을 안 붙이셔도 돼요. 혹시라도 본가에 만나면 저를 미워하지 마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심미호는 돌아섰다.
각주들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표정은 더욱 아니었다.
감정을 수습 못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
심미호가 퇴장하고 나자 장삼과 조호도 앞으로 나와 그들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이제는 각주들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각주들이 군기가 바싹 든 상태에서 도열해 있었다.
조교들이 사라지자 휑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상태에서도 그들은 군기를 풀지 않았다.
그때 한빈이 팽혁빈을 밀었다.
그러고는 눈짓했다. 마치 주인이 나설 때라는 말 같았다.
한빈에게 등 떠밀린 팽혁빈이 각주들 앞에 섰다.
팽혁빈이 앞에 서자 각주들이 일제히 외쳤다.
“충! 대공자를 뵙습니다!”
마치 한 명이 말한 것처럼 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고 이어지는 묵직한 소리.
쿵! 쿵!
마치 병장기로 바닥을 찍는 것 같은 육중한 소리였다.
팽혁빈은 자신도 모르게 그 소리에 반응했다.
그들은 지금 일제히 포권지례를 올리고 있었다.
‘쿵’ 하는 소리는 그들의 손바닥과 주먹이 맞부딪치는 소리였다.
단순한 포권지례에 저런 소리가 나다니!
그들에게는 분명 변화가 있었다.
팽혁빈이 놀란 것은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각주들의 동작에도 놀라고 있었다.
허리는 정확히 직각.
모든 각주의 허리 각도가 일정했다.
마치 같은 사람을 화선지에 여러 번 그려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팽혁빈이 정중하게 그들을 향해 포권지례를 올렸다.
“고생하셨소!”
짧지만 여러 감정이 녹아들어 있었다.
수뇌부를 향한 예의가 아니라 역경을 이겨 낸 무사들을 향한 예의였다.
팽혁빈이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이제 한빈의 차례였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휘적휘적 그들의 앞에 섰다.
그를 바라보는 각주들의 눈빛은 더욱 뜨거웠다.
심미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외가 담겨 있었고.
팽혁빈의 바라보는 시선에는 가문을 향한 충성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 앞에 서 있는 한빈을 향한 눈빛은 조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기대감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품고 있는 기대감은 과연 무엇일까?
한빈은 천수장으로 향하며 각주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