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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58화 (542/621)

558. 새로운 물결 (2)

서책을 내민 한빈이 턱짓했다.

“일단 보시죠.”

“…….”

이를 악문 주작각주가 서책을 확인했다.

첫 장을 넘긴 주작각주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어찌나 눈을 크게 떴는지 주작각주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고 있었다.

주작각주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젊은 각주들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주작각주가 저리 놀랄 정도면 저 장부 속에 있는 죄목이 놀랍다는 뜻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죄목.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강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제자가 미우면 없는 죄도 만든다!’

이 말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속담이었다.

저 장부 안에 있는 것이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은 죄라면?

어떤 벌을 받을지 예상도 되지 않는 것이다.

최악에는 주작각주의 말대로 무공을 폐지하는 수준까지 갈 수도 되었다.

몇몇 각주는 주화입마에 든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각주는 숨도 쉬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죄를 돌이켜 보고 있던 것이다.

그때였다.

주작각주가 입을 열었다.

“이, 이걸 왜 저한테 주신 겁니까?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사 공자님.”

주작각주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마치 울 것 같았다.

감정이 복받친 듯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뒤쪽에서 보고 있던 젊은 각주들은 눈을 크게 떴다.

방금까지 악을 쓰며 당당히 맞서던 주작각주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깨를 떨고 있었다.

과연 그를 이토록 두렵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이제는 시간마저 멈춘 듯했다.

그때 한빈의 손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에 젊은 각주들은 손을 뻗었다.

“안 돼!”

한빈이 주작각주에게 손을 쓴다고 생각해서였다.

주작각주는 그들의 동료였다.

동료가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달려 나가던 그들은 발길을 멈췄다.

한빈은 주작각주를 향해 손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주작각주의 어깨를 토닥일 뿐이었다.

한빈의 토닥임에 주작각주의 떨림이 멈췄다.

주작각주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한빈이 말했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서책이 각주님들의 운명을 바꿔 줄 것이라고요.”

“그래도 그렇지, 어째서 제게 이런 비급을 주신 겁니까? 아니 보여 주신 겁니까?”

주작각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비급이란 단어였다.

하지만 젊은 각주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한빈은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보여 주는 게 아니라 주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이 무공을 익히십시오.”

“네?”

“구경하라고 주는 비급이 아니라 익히라고 주는 겁니다.”

“자, 잠시만요.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혼원벽력도는 가문의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입니다. 그런데 이걸 저희에게 익히라고 주시는 겁니까? 사, 사 공자, 대체 왜 이런 호의를…….”

주작각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상식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혼원벽력도는 최근에야 복원된 하북팽가의 절대도법이었다.

복원되기 전에도 혼원벽력도는 가주의 형제와 가주의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혼원벽력도를 내준다는 말인가?

주작각주는 지금 한빈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게 시험이라면?

목을 내치기 전에 주는 마지막 술잔이라면?

주작각주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의문이 가득 찼다.

그때 주작각주가 표정을 다급히 수습하고 물었다.

“그런데 집법당주님은 왜 같이 오신 겁니까?”

타당한 질문이었다.

단죄가 아니라 상을 내리는 자리였다.

그런데 집법당주가 와서 분위기를 잡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에 의심이 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한빈이 웃으며 말했다.

“나와 형님은 모두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가문의 힘을 공유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직계만이 혼원벽력도를 익힌다는 것은 누가 말한 겁니까?”

“그, 그건 가문의 규칙입니다,”

“그래서 집법당주님께서 오신 겁니다. 가칙은 바뀌었습니다. 그 바뀐 가칙을 선포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한빈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팽대위가 있었다.

시선을 받은 팽대위가 말했다.

“혼원벽력도는 원로와 각주 들에게 공개한다는 것이 새로 바뀐 가칙이다. 그리고…….”

팽대위가 천천히 주작각주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앞에 선 팽대위가 주작각주의 어깨를 감쌌다.

커다란 호랑이에게 잡힌 듯한 늑대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둘의 덩치 차이는 컸다.

팽대위가 친근한 표정으로 주작각주를 바라봤다.

“아까 말한 게 사실인가?”

“네?”

“업무비로 기루에 갔다는 거 말이네.”

“아…….”

주작각주는 입을 벌렸다.

그제야 자신의 죄를 털어놓은 것이 기억난 것이다.

팽대위가 씩 웃었다.

“주작각주는 따로 좀 보세.”

“죄, 죄송합니다.”

“기루를 가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 두게.”

“그게…….”

“나를 빼고 혼자 갔으니 벌을 받기에는 충분하지. 하하.”

팽대위의 말에 주작각주의 표정이 풀렸다.

굳었던 그의 얼굴이 마치 물에 풀어 놓은 한지처럼 부드러워졌다.

그때 팽혁빈이 나섰다.

“이걸로 나와 아우 그리고 자네들 사이의 기 싸움을 끝내세. 그리고 자네들의 속마음은 충분히 들었네. 서로 간에 이 정도는 털어놔야 한다고 생각해서 마련한 자리일세.”

말을 마친 팽혁빈이 자신의 거도를 바닥에 찍었다.

쾅!

마무리를 짓자는 신호였다.

동시에 현무각이 울렸다,

쿵, 쿵.

각주들도 자신의 도(刀)로 바닥을 찍었다.

한동안 같은 소리가 현무각에 울렸다.

팽혁빈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젊은 각주들과의 싸움은 이걸로 마무리된 것 같았다.

지금 그들의 표정을 보면 당장이라도 가문을 위해서 목숨을 걸 것 같았다.

팽혁빈은 자신의 아우를 바라봤다.

순진하기만 한 줄 알았던 막내 한빈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능구렁이가 수십 마리는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넘긴 혼원벽력도는 복원된 완벽한 비급이 맞았다.

하지만 한빈을 중심으로 복원된 비급을 토대로 새로운 무공을 창안했다.

바로 진혼원벽력도였다.

그런 이유로 혼원벽력도의 등급은 한 단계 아래로 떨어졌다.

각주들에게 풀 수 있는 등급과는 불과 한 등급 차이.

지금 그들에게 보인 호의는 가주의 지시로 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지금 그들이 보인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시험이라는 점이었다.

소리가 줄어들자 팽혁빈이 한빈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한빈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한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각주님들, 혹시 적혈맹호대가 어떻게 강해졌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젊은 각주들은 입을 굳게 닫은 채 막내 공자 한빈을 바라봤다.

궁금하지만, 그냥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침을 삼키고 있을 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저는 여러분께 그 궁금증을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그 비법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한빈은 말을 끊고 모두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빛은 용암처럼 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혼원벽력도를 자신들에게 줬다.

거기에 적혈맹호대의 수련 비법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무인으로서의 꿈을 이룰 기회였다.

주작각주는 자신도 모르게 한빈을 향해 포권했다.

“사 공자, 부탁드립니다. 옛 성현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비법을 알 수 있다면 저는 이 목숨 버려도 좋습니다, 사 공자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적혈맹호대의 강함은 각주들이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이류도 안 되는 무인들이 단기간에 절정의 경지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기연이 없고서야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연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모두가 눈을 빛내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하하, 할 일이 많으신 분이 목숨을 버리시면 안 되죠. 다만!”

한빈이 잠시 말을 끊었다.

순간 현무각 안에 알 수 없는 기세가 들끓었다.

그것은 젊은 각주들의 열망이었다.

분위기를 확인한 한빈이 흡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문서가 아니라 몸으로 익혀야 합니다. 이 비법대로라면 혼원벽력도를 익힐 수 있는 초석을 일주일 내로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지, 진짜입니까?”

주작각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혼원벽력도를 익히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적어도 오 년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일주일 안에 그 기본을 마련한다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적혈맹호대가 절정의 경지를 이룬 기간을 생각한다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주작각주는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진지한 그 모습에 한빈이 미소 지었다.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알고 싶은 각주는 여기에 줄을 서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비법을 익힌 각주에게 특혜를 주겠습니다.”

“여기에 서면 됩니까?”

말을 마친 주작각주가 한빈의 앞에 섰다.

순간 주작각주의 뒤로 다른 각주들이 주르륵 줄을 섰다.

뒤쪽을 보던 주작각주가 안심이 안 되는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서약서를 쓰라면 쓰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지난번에 쓴 서약서에 모두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한빈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다른 각주들은 한빈의 표정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 * *

그날 저녁, 한빈은 팽혁빈과 마주 앉아 술잔을 들고 있었다.

술잔을 들이켠 팽혁빈이 말했다.

“네 마음이 그렇게 넓은 줄은 몰랐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형님.”

“가문의 기밀을 누출한 자까지 용서하다니 말이다.”

“뭐, 용서가 필요할 때는 과감해야 하는 법이죠. 형님.”

말을 마친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사실 한빈은 그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한빈은 혼원벽력도를 무작위로 나누어 준 것이 아니었다.

배신자에게는 조금 다른 비급을 남겨주었다.

만약 그 비급을 빼돌린다면?

아마도 그 비급을 받은 문파는 주화입마라는 말이 친근해질 것이었다.

팽혁빈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우야, 그런데 적혈맹호대의 수련 비법이 궁금하구나.”

“그건 형님에게는 무리입니다.”

“허허, 서운하구나.”

팽혁빈은 술잔의 끝을 검지로 만졌다.

서운할 때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그 모습을 한빈은 알고 있었다.

한빈은 빙긋 웃었다.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수련의 내용을 밝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팽혁빈에게 그 수련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궁금하시면 직접 구경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형님에게 수련을 권할 수는 없습니다.”

“흠, 그래. 구경만으로 만족하마!”

팽혁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서운한 마음을 숨기느라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다.

각주들에게도 공개하기로 한 수련이었다.

팽혁빈은 자신도 그 수련에 참가하면 안 되겠느냐고 했지만, 한빈은 결단코 불가능하다고 손을 저었다.

* * *

이틀 후, 천수장으로 가는 길의 어느 산자락.

팽혁빈은 한빈에게 서운한 마음이 단번에 풀렸다.

그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각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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