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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57화 (541/621)
  • 557. 새로운 물결 (1)

    현무각에 모인 젊은 각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덜컹!

    열린 문으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팽혁빈이었다.

    팽혁빈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마치 얼굴에 얼음을 덮고 있는 것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거기에 바쁘다고 만나 주지 않았던 집법당주 팽대위까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그들은 대화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집법당주 팽대위의 발걸음에 유난히 무게를 실려 있었다.

    젊은 각주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작각주와 현무각주가 서로를 바라봤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고 있냐는 신호였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다른 이들도 팽혁빈과 집법당주가 왜 이곳에 들이닥쳤는지 알지 못했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젊은 각주들의 이마에 팔자 주름이 저절로 생겼다.

    그중 가장 불만이 있는 사람은 주작각주였다.

    대내외의 정보를 책임지는 주작각주는 지금 하북팽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주작각주가 평가하는 하북팽가는 하북에 웅크린 호랑이가 아니었다.

    현 상태를 보면 하북팽가는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이었다.

    그 중심에는 물론 막내 공자 한빈과 차기 가주 팽혁빈의 활약이 있었다.

    그 활약은 대내외적으로 많이 묻혀 있었다.

    황궁 덕분에 묻힌 사건도 있었고.

    정의맹이 묻은 것도 있었다.

    주작각주는 지금이 하북팽가가 날아올라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웅크리자고?

    이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거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실망한 것은 바로 직계들의 태도였다.

    무림세가가 강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주의 무위가 무림세가의 세력을 의미할까?

    아니면, 직계의 무력이 힘의 척도일까?

    주작각주는 모두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문 전체가 강해지는 것이 진정한 가문의 전력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가문의 중심인 젊은 각주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없었다.

    젊은 각주들의 힘을 키우려는 의지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무력대조차 막내 공자 한빈의 적혈맹호대만이 변화를 보이고 싶었다.

    다른 무력대들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거기에 천수장에서 돌아온 서기들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이런 변화의 원인을 젊은 각주들은 모르고 있었다.

    중요한 일에 소외되는 느낌이었다.

    주작각주는 눈을 빛냈다.

    이번 기회에 할 말은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주작각주가 입술을 달싹이고 있을 때였다.

    탁.

    집법당주 팽대위가 거대한 산처럼 주작각주의 앞에 멈췄다.

    “주작각주, 할 말 있는가?”

    “어, 없습니다.”

    주작각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실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팽가의 둘째 호랑이라 불리는 집법당주 팽대위가 앞에 서자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팽대위는 집법당주에 오른 뒤 항상 힘으로 가문을 지배했다.

    사실 그가 무력을 쓴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가문 내에서 벌인 몇 번의 비무가 강렬했기에 모두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굴복했다.

    거기에 귀밑에서 턱까지 이어진 흉터는 어떤가?

    그 흉터와 관련된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하남정가와 하북팽가의 상행을 노리고 들어온 산적들에 홀로 맞서 물품을 지켜 낸 것이 그였다.

    무려 삼십 대 일로 싸워서 말이다.

    턱에 생긴 검상은 그때 생긴 흉터라고 한다.

    그때 동행한 인물 중에는 접객당주 같은 원로도 있었으니 그의 공적은 믿을 만했다.

    나중에 추가 병력이 도착했을 때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팽대위 혼자 산중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손에 술병을 든 채 말이다.

    그때의 일을 듣고 눈을 마주할 사람은 없었다.

    가문을 위해 조언하려던 주작각주도 팽대위의 눈빛을 보는 순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오늘은 문을 들어설 때부터 기세를 피워 내고 있었다.

    그때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하며 검상을 쓰다듬었다.

    “아닌 것 같은데?”

    “흠.”

    주작각주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꿀렁이는 목울대가 보일 정도였다.

    그때 팽대위의 뒤쪽에서 팽혁빈이 나왔다.

    팽혁빈은 앞으로 나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젊은 각주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이니, 다들 안심하시게.”

    말을 마친 팽혁빈은 손뼉을 쳤다.

    짝짝.

    순간 젊은 각주들은 어깨를 움찔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주작각주도 마찬가지였다.

    주작각주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렇게 손뼉을 친다든가 손가락을 튕기는 행위는 막내 공자 한빈의 버릇이었다.

    문제는 저럴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주작각주는 뒤쪽의 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누군가 여러 권의 서책을 들고 왔다.

    서책이 얼마나 많은지 들고 온 이의 얼굴이 안 보일 정도였다.

    심지어 서책을 들고 오는 이의 모습은 아슬아슬했다.

    탑처럼 일직선으로 쌓인 서책이 쓰러질 법한데, 묘하게 무게중심을 잡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서책을 들고 오던 이가 팽혁빈의 옆까지 왔다.

    팽혁빈이 옆을 보며 말했다.

    “아우야, 이제는 내려놔도 될 것 같다.”

    순간, 주작각주를 비롯한 젊은 각주들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팽혁빈이 동생이라고 부를 사람은 막내 공자 한빈밖에는 없었다.

    막내 공자가 여기에 왔다는 것은?

    젊은 각주들을 핍박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주작각주는 주위를 둘러봤다.

    현무각주와 백호각주 그리고 다른 각주들이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마치 깨진 접시처럼 표정에 금이 가 있었다.

    모두의 뜨거운 시선을 받은 한빈이 손에 들고 있는 서책을 내려놨다.

    툭.

    서책을 내려놓자 활짝 웃고 있는 한빈의 얼굴이 드러났다.

    서책을 내려놓은 한빈은 주변을 바라봤다.

    역시 예상대로 모두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모두의 표정을 확인한 한빈은 허리까지 쌓인 서책을 쳤다.

    탁!

    순간 모두의 시선이 서책에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모은 한빈이 말했다.

    “이게 무슨 서책일까요? 혹시 아는 각주님 계실까요?”

    “…….”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젊은 각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서책의 정체를 아느냐는 뜻이었다.

    그때 주작각주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묘한 주작각주의 표정에 현무각주가 귓속말로 물었다.

    “자네는 아는 것 같군.”

    “아무래도 장부 같네.”

    “장부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살생부.”

    “지, 지금 뭐라고 했나?”

    “아무래도 살생부 같네.”

    “살생부가 저리 많으면 대체 몇 명의 이름이 적혔단 말인가? 그리고 누구의 살생부라는 말인가?”

    “우리의 살생부일 것이네.”

    “그게 무슨 말인가?”

    현무각주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옆에 집법당주와 팽혁빈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주작각주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백호각주가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인가? 주작각주.”

    “저건 우리의 죄가 담긴 장부가 분명하네.”

    “왜 저런 장부를 들고 왔단 말인가?”

    “한마디로 토사구팽이지.”

    이제는 주작각주도 목소리를 높였다.

    백호각주가 다시 물었다.

    “우리한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죄가 없다고?”

    “…….”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이 어디 있던가? 자네는 죄가 없는가?”

    “그, 그게…….”

    백호각주는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주작각주가 말했다.

    “지난번에 우리가 쓴 서약서 기억나나?”

    “그 서약서는 지금 왜 말하는 것인가?”

    “우리를 치죄하기 위한 도구 같네.”

    “그럼 사 공자님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백호각주가 한빈을 바라봤다.

    그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모였다.

    그 시선을 받은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웃음을 지웠다.

    “여러분의 예상 중 반은 맞았습니다. 이 서책은 여러분의 인생을 바꿔 줄 물건이 맞습니다.”

    한빈의 말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울렸다.

    “휴.”

    “아니, 왜 우리를…….”

    “대체 사 공자는 우리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그들의 한숨 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울 때, 주작각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말해 보시지요, 주작각주.”

    “왜 우리를 소외시키신 겁니까? 오늘처럼 우리를 버리기 위해 이제껏 우리를 소외시켜 온 겁니까? 솔직히 저는 서운합니다. 사 공자의 주변 사람만 강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를 가문의 식구라 생각하셨다면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어야 했습니다.”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는 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주작각주.”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저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문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피를 토하는 날도 정보 수집을 위해서 쉬지 않았습니다. 다른 각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사람이기에 실수도 있고 욕심으로 인한 죄도 지었습니다. 하지만 죄보다는 공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주작각주가 아니라 다른 각주께서 대답하셔도 됩니다. 여러분께 어떤 죄가 있기에 제가 이 서책을 들고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빈은 모두를 바라봤다.

    몇몇 각주들의 입이 달싹인다.

    하지만 그들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때 주작각주가 나섰다.

    “정보비 중 일부로 기루에 갔소이다. 사실 그것도 정보 수집을 위해서이지, 내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는 아니었소. 이런 것이 죄라 한다면 내 목을 치시오.”

    악이 받친 주작각주는 목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팽대위와 팽혁빈이 헛웃음을 지었다.

    주작각주는 눈이 시뻘게져서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는 비웃으시는군요, 집법당주님.”

    “비웃는 게 아니네. 그리고 다른 각주들도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게!”

    팽대위가 내공을 담아 외쳤다.

    움찔하던 각주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너나 할 것 없이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남김없이 털어놨다.

    물론 그 죄보다 공이 많다는 것을 강조했다.

    젊은 각주들은 자신의 죄와 공을 가감 없이 털어놓으며 쏘아붙였다.

    그들의 토로는 반 시진이 넘게 이어졌다.

    팽대위는 그들의 말을 그저 웃음으로 받고 있었다.

    젊은 각주들의 눈에는 그 웃음이 비웃음으로 보였다.

    그들은 감정이 복받쳤는지 바닥에 가라앉았던 속마음을 모두 내보였다.

    마지막 고성이 현무각에 울려 퍼졌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내공까지 담아 속마음을 외친 젊은 각주들은 허탈한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때 주작각주가 앞으로 나왔다.

    “우리의 무공을 폐지할 겁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그냥 쫓아낼 것 같지는 않아서 하는 말입니다.”

    주작각주가 날을 세웠다.

    그의 말은 강호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무인이 속한 문파에서 나온 후에는 그곳에서 배운 무공을 다시 써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공은 본능에 가까웠다.

    젓가락을 잡는 것조차 문파 무공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쓰는 방법이 단전을 깨뜨리는 것이다.

    주작각주는 그 방법을 떠올리고 분노하는 것이다.

    그때 한빈이 쌓아 놓은 서책 중 하나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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