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 그게 바로 접니다 (4)
한빈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팽혁빈의 말에 팽강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젊은 각주들의 얼굴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들은 고개를 길게 빼며 눈을 빛냈다.
막내 공자 한빈에게 당하고 있었는데 팽혁빈이 반대라고 하니 한 줄기 희망을 본 것이다.
어떤 젊은 각주가 작게 읊조렸다.
“역시 소가주는 혜안이 있어.”
“그러게 말일세. 딱 듣자마자 저리 반대하는 것을 보면 판단도 빠르고 말이야.”
모두가 웅성대자 가주 팽강위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반대라니? 이유를 말해 보아라.”
“입이 무거운 게 아니라…….”
팽혁빈은 잠시 말끝을 흐리며 수뇌부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수뇌부가 마른침을 삼킨다.
그들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그들을 한 명 한 명 본 팽혁빈이 말을 이었다.
“아예 입을 열지 않을 사람을 뽑는 것이 맞는다고 봅니다.”
순간, 여기저기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마치 세찬 바람이 가주전의 문틈을 타고 새어 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팽강위는 그 모습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호기심을 피워 냈다.
“지금까지 의견을 교환한 바로는 이번 영웅 대회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핵심이다.”
“제 생각도 똑같습니다.”
“그럼 너는 가문의 명운이 담긴 영웅 대회에 누굴 보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숙고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저와 같은 의견을 제시했던 자가 대체 누구입니까?”
팽혁빈의 질문에 모두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고정되었다.
시선을 받은 한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왜 그렇게…….”
“역시 대단하구나. 유림 서원의 수석다운 생각이다.”
“수석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동문수학한 유생 중 가장 먼저 과정을 마쳤으니 수석이 아니고 뭐겠느냐! 아우야, 축하한다.”
팽혁빈이 한빈을 꼭 끌어안았다.
한빈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팽혁빈을 올려다봤다.
한빈은 지금 형의 반응이 상당히 과장된 것이라 생각했다.
장유중이 조기 졸업을 지시하긴 했지만, 거기에는 많은 사정이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한빈의 뛰어남은 인정한다고 했다.
생각 같아서는 유림 서원에 오랫동안 잡아 놓고 싶었다고 했다.
문제는 한빈의 위험성이었다.
장유중이 말하기로는 한빈이 위험을 몰고 다니는 사주를 타고난 것 같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장유중은 유림 서원에서 한빈을 조기 졸업시켰다고 한다.
한빈이 얼마 전 일을 회상하고 때였다.
팽혁빈이 팔에 힘을 주었다.
한빈을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이 느껴지는 힘이었다.
한빈은 피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가족의 정이었다.
한빈이 형에게 몸을 맡긴 채 어정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한참 동안 동생을 부둥켜안던 팽혁빈이 팔을 풀었다.
그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관자놀이를 톡톡 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가주 팽강위를 바라봤다.
아들의 시선에 팽강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아라.”
“저는 영웅 대회에 갈 대표자를 선임하는 일을 막내에게 맡겼으면 합니다.”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으면 그리하마.”
“저는 정의맹의 하북 지부에 다녀오고 나서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챘습니다. 그런데 한빈은 이곳에 가만히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보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좋은 생각이 있다고 봅니다.”
팽혁빈이 강력하게 주장하자 팽강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수뇌부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팽강위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과 형님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누가 적합한지 말해 보아라.”
“저는 형님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아버님.”
“음.”
팽강위가 침음을 삼켰다.
동시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금 사 공자가 뭐라고 한 거지?”
“그러게 말이네. 아까 사 공자가 무당산이 위험하다고 했잖아.”
“그 위험한 곳에 차기 가주를 보낸다고?”
“허허. 혹시…….”
“그런 얘기는 하지 말게. 전에 사 공자가 소가주 자리를 양보했다고 들었네.”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
그들은 한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지자 팽혁빈이 손뼉을 쳤다.
짝!
내공이 실려 있는 한 수였다.
그 소리에 모두가 시선을 집중했다.
시선이 모이자 팽혁빈이 말했다.
“가주님과 저는 대표를 뽑는 일을 분명히 막내에게 일임했소. 만약 불만이 있는 자가 있다면 지금 나오시오.”
그 말에 모두는 고개를 돌렸다.
상황을 진정시킨 팽혁빈이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한빈이 말을 이었다.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가문을 대표할 자가 직접 가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였다.
현무각주가 조심스럽게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아까는 분명히 진천뢰와 독이 난무할 수도 있다고 겁을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차기 가주를 영웅 대회에 보낸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형님의 안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안전을 보장할 고수에게 형님의 호위를 부탁할 예정입니다.”
“…….”
현무각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호위는 제가 아는 사람 중 뽑겠습니다. 그래서 방금 각주들의 서약서를 받은 것이지요.”
“설마 우리 중에…….”
현무각주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넌지시 물었다.
“현무각주님이 호위를 맡으시겠습니까?”
“아니오,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기엔…….”
현무각주가 슬쩍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는 나서고 싶었지만, 자신은 무공에서 소가주 팽혁빈보다 뒤처진다.
그렇다는 것은 짐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거기에 더해 무당산으로 향하는 길은 조금 찝찝하기도 했다.
현무각주는 조심스레 한빈을 살폈다.
그가 보기에 이곳에서 가장 수상한 사람은 사 공자였다.
위험하다고 선포한 곳에 자신의 형, 즉 팽혁빈을 보낸다고 했다.
거기에 팽혁빈의 안전을 책임질 호위는 막내 공자 한빈이 뽑는다고 했다.
도무지 이해는 안 가지만, 반박할 꼬투리가 없었다.
가주도, 팽혁빈도 사 공자를 모두 믿고 있으니 말이다.
현무각주는 주변을 둘러봤다.
팽혁빈이 한빈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내용을 쏙 빼놓고 이 장면만 보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에 팽강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여라.”
말을 마친 팽강위가 태사의 옆에 있는 거도를 들었다.
그러고는 바닥을 찍었다.
쿵!
회의에 대한 결론이 났다는 신호였다.
동시에 모든 원로와 각주 들이 그들의 도(刀)를 바닥에 찍었다.
쿵! 쿵!
가주가 내린 지시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 * *
가주전에서 이루어진 회의 이후.
수뇌부는 잠시 현무각에 모였다. 가주전에서 오간 대화를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버릇처럼 자신들의 목을 매만졌다.
마치 목줄을 찬 기분이 들어서였다.
누구 하나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목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때 나이가 지긋한 원로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피곤한지 눈 밑에 검은 자국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일어난 것은 막내 공자 한빈에게 당당히 맞섰던 접객당주였다.
접객당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바라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오늘 모두 고생했네. 내가 나선다고 나섰는데……. 젊은 각주들에게 폐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그나마 접객당주님께서 나서 주셔서 저희가 할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네.”
“겸손하실 필요 없습니다. 접객당주님 덕분에 저희의 기개를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네.”
접객당주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바라봤다.
몇 마디 덕담을 끝낸 접객당주는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현무각을 빠져 나왔다.
현무각을 빠져 나온 접객당주는 조용히 뒤를 돌아봤다.
현무각의 안쪽에는 호롱불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덕분에 여러 개의 그림자가 뒤엉킨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접객당주가 혼잣말을 뱉었다.
“미안하네, 다들…….”
뜻 모를 말을 뱉어 낸 접객당주는 어딘가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누가 보면 고개를 갸웃할 장면이었다.
우연인지 막내 공자 한빈의 처소가 있는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연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한빈의 부탁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경극이었다.
한빈과 맞서 토론을 펼친 것도.
한빈의 말에 자신 있게 서명을 한 것도.
모두가 한빈의 부탁 때문이었다.
접객당주는 몇 개월 전 일을 떠올렸다.
그의 큰아들은 원인 모를 병에 걸렸었다.
접객당주는 전 재산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큰아들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때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막내 공자 한빈이었다.
접객당주는 신의라 칭송받는 천수장주를 찾아갔고 그게 한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쉽게도 한빈은 이미 유림 서원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는 천수장주 다음 가는 신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장자명이었다.
장자명은 접객당주의 아들 얘기를 듣더니 피식 웃으며 안내하라고 했다.
장자명이 접객당주의 집에 다녀간 다음 날, 큰아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객당주는 장자명을 찾아가 몇 번이고 사례하려고 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천수장주인 한빈이 몇 가지 질병에 대해서 당부해 놓고 가며 그 병에 대해서는 사례를 받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접객당주는 당시 막내 공자 한빈이 천리안이라도 가진 것은 아닌가 의심했었다.
접객당주에게 한빈은 가문에서의 인연 이상이었다.
그런 한빈이 부탁을 했으니 접객당주는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물론 가벼운 부탁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하북팽가의 식솔 모두에게 목줄을 채우는 일이었으니까.
지금 현무각에서 뒤섞인 그림자를 보면 살짝 마음이 무겁긴 했다.
하지만 빚을 일부라도 갚았다고 생각하니 접객당주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 *
나이 든 수뇌부가 떠나자 젊은 각주들은 계속 토론을 이어 나갔다.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서약서에 서명한 대목이 오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신들이 왜 서약서에 서명했는지 모르는 각주들도 태반이었다.
그들은 군중심리에 의해서 붓을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현무각에 모여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현무각에 모인 각주들은 머리를 감싸 쥐고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대체 그 서약서에 서명을 왜 한 겁니까?”
“저보다 백호각주가 먼저 서명하지 않았소이까?”
“그야…….”
백호각주는 말끝을 흐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서약서의 내용이 대체 뭐였습니까? 저는 앞의 분이 하길래 확인도 안 하고 서명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도 모두가 서명하기에 그냥 한 겁니다.”
“그럼 대체 누가 내용을 확인했다는 말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가장 먼저 서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이곳에 자신이 먼저 서명했다고 손을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주작각주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접객당주님이 가장 먼저 서명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접객당주님이요? 접객당주님은 요즘 들어 시력도 나빠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백호각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모두가 서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