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 그게 바로 접니다 (3)
이건 기세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협박에 가까웠다.
젊은 수뇌부는 어느 정도 기세가 꺾였다.
사실 현무각주나 백호각주는 젊은 각주들의 대표자 격이었다.
현무각주와 백호각주가 앞장서서 한빈을 시험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가주인 팽가위가 가주직에서 물러나면 나이가 있는 당주와 각주 들도 같이 물러나게 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젊은 각주들은 자리에 남아 차기 가주와 차기 집법당주를 보필하게 된다.
즉, 한빈과 일선에서 마주쳐야 할 것이 바로 젊은 각주들이라는 것이다.
한빈이 단번에 그들의 기세를 눌러 버리자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그 모습에 팽강위는 입맛을 다셨다.
지금의 기세 싸움은 자신이 가주직에 오르기 전에도 벌어졌던 일이었다.
집법당주는 가주의 오른팔.
원로와 각주를 비롯한 수뇌부는 보통 차기 집법당주가 될 자의 기부터 누르려고 한다.
그 당시를 떠올린 팽강위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현 집법당주 팽대위는 수뇌부와 기 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그냥 강자존의 법칙을 앞세워 힘으로 제압했었다.
그런데 지금 한빈은 힘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그들을 제압하려 하고 있다.
과연 이대로 끝날까?
팽강위는 이 싸움이 끝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라고 봤다.
그때 젊은 수뇌부가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수뇌부 중 나이가 제법 되는 접객당주였다.
원로에 속하는 접객당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양새였다.
젊은 각주들의 시선을 받은 접객당주가 마지못해 앞으로 나왔다.
천천히 걸어 나온 접객당주가 한빈의 앞에 섰다.
묵묵히 한빈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노송과도 같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정중하게 물었다.
“제게 주실 가르침이라도 있으실는지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한 가지오. 그래서 사 공자가 생각한 대책이 뭐요?”
순간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는 막힌 속이 탁 풀린다는 표정으로 표정을 풀고 있었다.
사실,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관과 독을 보여 주며 압력을 넣는 바람에 누구도 묻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때 한빈의 눈이 빛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주작각주도 한 발 앞으로 나와 접객당주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
한빈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 모습에 모두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빈의 앞에 독이 든 대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다들 긴장을 푸시지요.”
“흠.”
접객당주가 못마땅한 듯 헛기침했다.
한빈은 청화를 보며 턱짓했다.
신호를 받은 청화가 독이 든 대야를 들고 조심스럽게 나갔다.
청화가 나가자 한빈은 이번에는 심미호를 바라봤다.
눈빛이 마주치자 심미호가 관을 끌고 가주전 밖으로 나갔다.
수뇌부를 억압하고 있던 두 개의 물건이 사라진 것이다.
관과 대야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수뇌부는 그제야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때 접객당주가 말을 이었다.
“위험성을 말했으면 대책을 내놓아야 할 것이 아니오? 사 공자.”
“대책이라면 제게 있습니다.”
한빈의 말에 수뇌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접객당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대책이 무엇이오? 사 공자.”
“그건, 태풍 근처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대체 이해가 안 되는군?”
“강호에 평지풍파를 일으킬 혈겁이 들이닥치면 접객당주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야, 당당히 맞서…….”
“누구를 위해서요?”
“중원의 안녕을 위해 정파이자 십대세가의 기둥인 우리가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 공자.”
“겉으로는 물론 그래야겠지요.”
“겉으로라…….”
접객당주가 눈을 가늘게 뜨자 한빈이 눈을 빛냈다.
지켜보던 팽강위도 호기심이 인다는 듯 살짝 귀를 기울였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한빈은 그제야 말을 이었다.
“무림세가는 무엇 때문에 칼을 든다고 생각하십니까?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저희가 칼을 들 때, 중원의 안녕과 연관된 사건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하북팽가뿐이 아니죠. 다른 무림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무림세가가 아니라 거대 문파도 똑같죠. 일단 손해를 볼 때만 칼을 듭니다.”
“허허, 무슨 말을 그리하나. 다른 문파의 위험을 보고 칼을 들 때도 많다네.”
“그건 그 문파의 위험으로 인한 파장이 자기들에게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서 미리 손을 쓰는 것이지요.”
“흠.”
접객당주가 시선을 피하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다른 이들도 시선을 돌리기 바빴다.
한빈의 말은 정확했다.
강호인들은 손해 보는 것을 못 참기에 칼을 들고 검을 든다.
물론 세가나 문파 차원에서의 이야기다.
지나가다가 위험에 처한 이를 사심 없이 돕는 고수의 얘기는 제법 흔하다.
하지만 문파로 확대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파든 사파든 단체는 철저하게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그때 집법당주 팽대위가 나섰다.
한빈과 수뇌부의 기 싸움에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이다.
팽대위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우리가 이번 영웅 대회에 참가하면 안 된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게냐?”
팽대위는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팽대위는 누구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게 아니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이익이고 뭐고 누군가 칼을 들이밀면 밟아 줘야 하는 것이 강호의 도리가 아니더냐?”
“맞습니다.”
“어…….”
“제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칼이 애초부터 안 들어오게 해야죠.”
“칼이 안 들어오게 한다고?”
“이번 영웅 대회에 참석을 안 하면 간단한 일입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십대세가와 구대문파 모두가 참석하는 정의맹의 모임이다. 거기에 우리만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만약 하북팽가가 이번 영웅 대회에 참석한다고 한다면……. 입이 가장 무거운 자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한테도 휘둘리지 않는 자를 말이죠.”
“입이 무거운 자라면…….”
“다른 문파에 휘둘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와도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빈의 말에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무공이 강한 자가 아니라 입이 무거운 자라고 했다.
수뇌부는 서로를 바라봤다.
영웅 대회로 향하는 이번 길은 찝찝했다.
한빈이 관과 독이 든 대야를 보여 주며 이번 영웅 대회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섣불리 나설 자는 없었다.
그때 한빈이 팔짱을 끼고 수뇌부를 바라봤다.
“가문을 위해서 나설 분이 이 중에 없단 말씀입니까?”
“…….”
그들은 아직도 눈치만 봤다.
그때 접객당주가 손을 들었다.
“내가 나서겠소, 사 공자.”
그 뒤에 있던 주작각주도 손을 들었다.
“나를 보내 주시오. 가문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불사르겠소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모두가 한 발 나서서 하북팽가의 대표를 자청했다.
그들의 말에 한빈이 다시 물었다.
“위험을 무릅쓰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신명께 약속하겠네, 사 공자.”
접객당주가 목소리를 높이자 뒤쪽에 있던 다른 당주와 각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빈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딱.
순간 다시 가주전의 문이 열리고 하얀색 신형이 한빈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신형의 주인은 설화였다.
설화는 오른손에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설화는 한빈의 앞에 오더니,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순식간에 한빈의 앞에는 지필묵이 가지런히 놓였다.
한빈은 흡족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외쳤다.
“천지신명께 약속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 문서에 서명만 해 주시면 됩니다!”
한빈이 아래쪽에 있는 문서를 가리켰다.
순간 여기저기서 헛숨이 흘러나왔다.
“저, 저게 뭔가?”
“사 공자가 계약서를 좋아한다더니 그게 사실이었군.”
“그러게 말일세…….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들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문서를 가리켰다.
“두려우시면 서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명하겠네.”
접객당주가 나서서 붓을 들었다.
그는 문서의 내용도 보지 않고 붓을 놀렸다.
한빈이 물었다.
“내용을 확인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나는 겁쟁이가 아니네!”
접객당주가 당당히 소리치자 나머지 당주와 각주 역시 최면에라도 걸린 듯 문서에 서명했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그들을 지켜보던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접객당주는 저리 경솔한 자가 아니었다.
내용도 안 보고 문서에 서명을 한다고?
이건 접객당주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팽강위도 저 문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들어 보지 못했다.
그들이 막 문서에 서명을 마쳤을 때의 일이었다.
마침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모두는 한빈의 수하일 것이라고 예상하고 눈매를 좁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한빈의 수하가 아니었다.
신형의 주인은 외부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팽혁빈이었다.
팽혁빈은 난데없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팽혁빈이 이리 급하게 돌아온 것은 한빈의 일을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분위기를 보니 꽤 심각했다.
몇몇 각주가 비장한 표정으로 정체불명의 문서에 서명하고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팽혁빈이 다급하게 달려와 팽강위에게 포권했다.
“아버님, 임무를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마침 잘 왔다.”
상황을 모르는 팽혁빈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것을 보는 것이 빠르겠구나.”
“네, 아버님.”
팽혁빈은 재빨리 영웅 대회에 관한 서찰을 확인했다.
그때 팽강위가 말을 이었다.
“서찰에 나와 있는 내용 때문에 상의 중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서찰을 확인한 팽혁빈이 눈을 가늘게 뜨자 팽강위가 물었다.
“어떤 점에서 이상하다는 것이냐?”
“제가 다녀온 곳이 어디입니까?”
“그러고 보니……. 정의맹 하북 지부가 아니더냐?”
“네, 맞습니다. 그곳에서 지부장과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도 영웅 대회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계속 말해 보아라.”
팽강위가 재촉하자 원로와 각주 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팽혁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분명히 정의맹의 수뇌부는 숨기는 것이 있을 겁니다. 아마도 그걸 잘 포장해서 누군가에게 넘기려고 하겠지요.”
“흠.”
“왜 그러십니까? 아버님.”
“아니다, 계속해 보아라.”
“중요한 것은 넓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우리 가문만 생각하면 됩니다. 상대가 주는 패를 받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패가 뭐라 생각하느냐?”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흠, 공교롭구나.”
“왜 그러십니까?”
“방금 너와 똑같은 말을 한 사람이 있어서 그렇구나.”
“저와 똑같은 말을 한 사람이라고요?”
“그자는 이렇게 말했다. 입이 가장 무거운 자를 대표로 보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린 거기까지 회의를 진행했다.”
“입이 무거운 자라……. 저는 반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