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53화 (538/621)
  • 553. 그게 바로 접니다 (2)

    한빈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중 몇이 눈을 빛내고 있다.

    아무래도 기세 싸움은 이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한빈의 말이 끝나자 현무각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소이다, 사 공자.”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요. 구체적인 사실이 알려지면 강호인 모두가 동요할까 봐 이 사실만큼은 묻기로 했습니다.”

    “흠.”

    “만약에 적이 수천 근이 아닌 수만 근의 진천뢰를 묻어 놨다고 하면요?”

    “…….”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건 무림에서 일어나기에는 너무나 큰일이었다.

    진천뢰는 일단 나라에서 금지한 품목.

    그런 진천뢰가 수만 근이라?

    그 정도면 국가 간의 전쟁이라고 봐야 했다.

    폭약과 수만 발의 화살 그리고 창 앞에서는 절대고수도 힘을 못 쓰는 법이었다.

    그때였다.

    가문의 경비를 책임지는 백호각주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 발 앞으로 나온 백호각주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백호각주는 여러 각주 중에도 젊은 편에 속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한빈에게 예를 표한 것이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백호각주님께서는 어떤 고견이 있으실까요?”

    “지난번에 진천뢰가 터졌다면 아마도 나라에서는 철저히 그 품목을 관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위험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백호각주는 주변에 시선을 보냈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라는 신호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쯤 되면 본론은 뒤쪽으로 팽개치고 본격적인 개싸움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한빈은 이런 싸움에 항상 준비된 자였다.

    진득한 웃음을 짓는 한빈의 모습에 백호각주가 물었다.

    “왜 그리 웃으십니까? 제 말이 잘못되었습니까? 잘 생각해 보면 무당파의 영웅 대회는 그 어느 행사보다 안전한 행사 아닙니까? 태풍도 한 번 오고 나면 시차가 있는 법이지요.”

    “좋습니다. 그런 다른 걸 보여 드리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손을 들었다.

    그 모습에 백호각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한빈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지만 이번에는 내공이 실려 있지 않았다.

    가주전 밖에서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는 절제되어 있었다.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이번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내공을 담지 않은 것으로 봐서 분명히 누굴 호출하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 소리를 가주전 밖에서 들으려면 보통 고수가 아니고야 불가능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다시 가주전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백색 무복의 소녀가 양손으로 뭔가를 조심스럽게 들고 온다.

    순간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 들어온 것은 청화였다.

    청화가 들고 온 것은 강철 대야였다.

    이전의 관과 마찬가지로 거무튀튀한 것이, 누가 봐도 불길한 물건처럼 보였다.

    의문도 잠시, 사람들은 대야의 정체에 대해서 저마다 추론하기 시작했다.

    “저 대야도 사천당가에서 나온 물건 아닙니까?

    “그런 것 같소이다. 표면에 그을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저 대야도 폭발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조용히 이를 지켜보고 있던 백호각주도 마찬가지였다.

    청화가 점점 가까이 올수록 그는 심증을 굳혔다.

    그것은 강철로 만든 대야가 분명했다.

    그을림의 흔적이 제법 진한 것으로 봐서 폭발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순간 백호각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대야의 모양이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청화가 멈췄다.

    대야 안쪽에는 살짝 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대야의 모양 그리고 색, 마지막으로 안에 든 물까지 확인한 백호각주는 추론을 끝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대야가 보통 물건이 아닌 것은 알겠소. 그런데 사 공자는 내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고 이 물건을 준비한 것이오?”

    “역시 백호각주님답군요. 예리하십니다. 다만, 초점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내 말이 틀렸다고 한 겁니까? 대야의 거무튀튀한 그을음을 보면 이건 사천당가의 폭발 현장에서 나온 물건이 틀림없소. 그리고 그 그을음의 정도를 보면 저기 있는 관보다 진천뢰에 더 가까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오.”

    백호각주는 관을 가리켰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른 수뇌부가 그의 추론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기 때문이다.

    더욱 의기양양해진 백호각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저 대야는 흠집이 남아 있지 않소. 변색만 되었단 말이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백호각주는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물론 한빈에게 던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나 답해 보라는 의미였다.

    그때 한빈이 턱짓했다.

    “계속해 보시지요.”

    한빈의 말에 백호각주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상대의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호각주가 진득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 대야는 분명히 만년한철로 만든 물건이 분명합니다.”

    “흠, 만년한철이라……. 만년한철로 만든 대야를 제가 왜 가져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폭발에서도 건재한 만년한철만큼 단단한 고수만 무당파에서 열리는 영웅 대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가르침 아니겠소? 그리고 저 대야에 물을 받아 온 것은 화마에서도 건재한 만년한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고요. 보여 주기식 허례는 이쯤이면 되었습니다.”

    백호각주가 약간은 비웃음 섞인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그들을 바라보던 수뇌부도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진지했던 건가?”

    “실망이군.”

    “그러게 말일세. 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그까짓…….”

    그들은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이 손가락을 다시 한번 튕겼기 때문이다.

    딱.

    그 소리에 청화가 대야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대야를 아래로 내려놓은 청화는 머리끈을 풀었다.

    순간 청화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청화는 아무렇지 않게 머리끈을 천천히 대야에 잠긴 물속에 집어넣었다.

    백호각주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 그게 무슨 짓이오?”

    “백호각주께서 직접 보시지요.”

    한빈이 대야를 가리키자 백호각주가 재빨리 다가왔다.

    백호각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에 닿는 순간 청화가 넣은 머리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졌기 때문이다.

    청화는 머리끈을 모두 대야에 던져 넣었다.

    스르륵.

    비단으로 만든 머리끈이 대야에 잠기며 그 모습을 감췄다.

    황당한 상황에 백호각주가 기분 나쁜 듯 말했다.

    “이상한 사술을 보자고 여기에 선 것이 아니오, 사 공자.”

    “사술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오?”

    “대야에 담겨 있는 것은 독입니다. 장운현에서 천독이라는 자가 쓴 독이지요. 중원에는 없는 독입니다. 지금 제가 보여 드린 것은 사술이 아닙니다. 저 독은 뭐든 눈 깜짝할 사이에 녹여 버립니다. 은을 제외하고는요.”

    “그럼…….”

    “맞습니다. 저 대야는 만년한철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은으로 만든 대야입니다. 저 거무튀튀한 흔적은 독 때문에 은이 변색된 것이지요.”

    “독이라니…….”

    “저와 적혈맹호대는 이런 독을 쓰는 천독이란 자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았고요. 혹시 이런 위험을 감수하실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앞으로 나오시지요.”

    한빈은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는 청화에게 손짓했다.

    신호를 받은 청화가 품속에서 표주박 하나를 꺼냈다.

    모양만 표주박이지, 은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은 표주박을 든 청화가 조심스럽게 대야의 물을 펐다.

    그러고는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화가 표주박에 든 물을 바닥에 부었다.

    순간 모두의 눈이 커졌다.

    바닥이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치지직.

    한빈이 말한 대로 독이 맞았다.

    중원에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극독이 분명했다.

    바닥에 독물을 부은 청화는 다시 은 표주박을 대야로 가져갔다.

    청화는 대야의 물을 담은 은 표주박을 눈높이에 맞춰 들어 올렸다.

    순간 하북팽가의 수뇌부가 주춤 물러났다.

    옆에서 대화를 나누던 백호각주마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북팽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십시오.”

    “…….”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주전의 바닥을 뚫어 버린 독을 한 바가지 떠서 들고 있는 상태에서, 미치지 않고서야 앞으로 나올 자는 아무도 없었다.

    웅성거리는 자도 없었다.

    모두 입을 막고 있기에 바빴다.

    중독될까 두려워서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혹시 더 보여 드려야겠습니까?”

    “…….”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때 한빈이 청화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청화가 한빈에게 은 표주박을 건넸다.

    한빈은 은 표주박을 높이 들었다.

    그 모습에 모두가 기겁해서 뒤로 물러났다.

    “사 공자, 왜 그러시오?”

    “가주님, 말리셔야…….”

    소란은 바로 진정되었다.

    은 표주박을 든 한빈이 독물을 그대로 마셨기 때문이다.

    순간 모두의 눈이 커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그들은 소매로 가리고 있던 입을 활짝 벌렸다.

    그들은 석상이 된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한빈은 조용히 수뇌부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문을 대표해서 앞장서려면 이 정도의 각오는 필요합니다.”

    이번에는 내공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사실 한빈의 행동에 가주 팽강위도 기겁하고 있었다.

    갑자기 은 표주박에 든 독물을 마시는 장면에서 그는 아들 하나를 이대로 잃는 것은 아닌지 하고 한탄했다.

    그 옆에 있던 팽대위는 거도를 빼 든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무모한 행동을 말리기 위해 거도로 표주박을 쳐 낼 생각이었다.

    거도를 쥔 오른손을 부르르 떤 팽대위가 한빈에게 달려갔다.

    “괜찮은 것이냐?”

    “저는 괜찮습니다.”

    “호, 혹시 만독불침의 경지에라도 이른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멀쩡할 수가…….”

    “그건 비밀입니다.”

    한빈이 단호하게 말하자 팽대위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비밀이라는 한마디에 안심한 것이다.

    저리 말하는 것을 보면 한빈의 상태가 정상이라 판단한 것이다.

    팽대위는 그저 미리 해독약을 복용했겠거니 하며 넘겼다.

    한빈은 천수장주라 불리며 의술에서도 이름을 떨치니 말이다.

    물론 수뇌부의 생각도 똑같았다.

    한빈이 멀쩡한 것은 만독불침 같은 것이 아니라 해약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반만 맞았다.

    한빈이 마신 것은 애초에 독물이 아니었다.

    공독지체의 청화가 은 표주박에 든 독을 모두 흡수해 버린 것이다.

    청화는 이제 독의 일부만을 자유롭게 흡수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공독지체의 극의를 깨달을 것이라고 한빈은 확신했다.

    모두가 멍하니 있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무당으로 향할 자신이 있는 분은 앞으로 나오시지요.”

    “…….”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모습에 팽강위는 기가 찬 듯 한빈을 바라봤다.

    이것은 가문의 수뇌부와 후계 사이의 일반적인 기세 싸움이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