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50화 (535/621)

550. 급보(急報) (1)

용린검법의 글귀가 계속 이어졌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알 수 없는 구결을 획득하셨습니다.]

[알 수 없는 구결 : 삼(三)]

알 수 없는 구결이 하나 더 늘어났다.

알 수 없는 구결이라는 말처럼 쓰임은 알 수 없었지만, 한빈의 눈에는 왠지 저 알 수 없는 구결이 든든해 보이기만 했다.

한빈은 자신을 향한 뜨거운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채 다시 심화편의 구결을 확인했다.

[지(智) : 구십이(九十二)]

구결을 확인한 한빈은 입맛을 다셨다.

오늘 아침부터는 구결의 숫자가 저 상태로 멈춰 있었다.

뜻하지 않게 아흔 개를 넘긴 것은 분명 이득을 본 것이 맞았다.

그런데 묘하게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때 다시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

[지(智) : 백(百)]

숫자는 정확히 백에서 멈췄다.

심화편 구결의 한계인 백에 도달한 것이다.

한빈의 눈앞에 떠 있던 용린검법이 빛났다.

한빈은 재빨리 허공에 떠 있는 용린검법을 확인했다.

책장의 가장자리가 황금빛으로 빛났다.

아마 이번 깨달음으로 인한 효과 같았다.

순간 글귀가 하나 나타났다.

[초식 일목요연(一目瞭然)에 대한 새로운 쓰임을 발견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일목요연은 상대의 무공을 분석하는 초식이었다.

새로운 쓰임이라니?

지의 구결을 한계까지 획득했지만, 난데없는 글귀였다.

그것도 잠시, 글귀를 본 한빈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지금 확인하는 것이 맞았다.

순간 제법 긴 설명이 나타났다.

[일목요연이 지(智)의 구결과 연동됩니다. 연동에 성공했습니다. 일목요연을 지의 구결과 함께 사용하면 시전자가 본 경험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의 구결 서른 개를 소모합니다. 소모된 지의 구결은 열두 시진 후 복구됩니다.]

시전자의 경험이라?

경험을 정리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한빈의 머릿속에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그것은 일목요연의 또 다른 효능을 직접 사용해 보는 것이다.

한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목요연.’

지의 구결을 이용해 일목요연을 사용하는 동시에 전생의 기억 중 일부를 떠올렸다.

동시에 설명처럼 지의 구결 서른 개가 사라졌다.

순간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원로와 가주 들의 목소리였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일목요연이 보여 주는 장면에 집중했다.

웅성대는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한빈 자신도 모르게 무아지경이 든 것이었다.

물론 이번에 든 무아지경은 무인의 깨달음과는 상관없었다.

한빈이 첫 번째로 살핀 사건은 바로 전생의 기억 중 일부였다.

지의 구결과 연동시켜 일목요연을 실행하자, 지의 구결이 사라지며 전생의 기억 중 일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한빈은 일목요연이라는 뜻을 알 것 같았다.

지의 구결과 연동시키니 모든 사건이 시간 순서대로 정리되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흩어졌던 사건들이 빠짐없이 시간 순서대로 복원되자, 숨어 있던 진실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한빈이 확인하고 있는 것은 정사대전이 막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한참 동안 펼쳐졌던 장면이 멈췄다.

한빈은 다시 일목요연을 실행시키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은 빠르게 넘어갔지만,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자신의 상태에 걱정하고 있을 가족과 유생들이 조금 걱정되었다.

한빈은 일단 남은 구결을 사용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기억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 * *

무아지경에 든 한빈을 하북팽가의 원로와 각주 들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팽강위가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집법당주 팽대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호법을 위해 진법을 펼치라는 지시였다.

집법당주의 무사들이 각주들에게 지시를 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북팽가의 원로와 각주가 가주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주전 밖으로 뛰쳐나간 하북팽가의 무사들은 곳곳에 자리 잡았다.

한빈의 주변만 경계하는 것이 아닌 가주전 전체를 진영으로 삼고 호법을 위해 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한빈의 깨달음을 놀라워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생들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한빈이 무아지경에 든 모습보다 일사불란한 하북팽가 무인들의 행동이 더 놀라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빠른 동작은 살짝 무섭기까지 했다.

누군가는 ‘저게 강호인인가?’ 하며 놀라워했고.

누군가는 그들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때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장유중은 유생들을 바라보며 검지를 입술에 댔다.

소리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유생들도 그 뜻을 알고 있었다.

무아지경에 들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무아지경에 들었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벽을 넘는다는 것.

그 순간만큼은 스치는 소리 하나도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고 들었다.

문제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점이었다.

팽강위는 하북팽가의 무사들에게만 지시를 내렸을 뿐 다른 이의 행동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 가주전에는 가주와 집당주를 비롯한 일부 수뇌부만 남은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장유중과 유생들이 가주전에 남겨진 것이다.

물론 서기들도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밖으로 나온 서기 중 조일순은 고개를 갸웃하며 가주전을 바라봤다.

“괜찮을지 모르겠군.”

“뭐가 말인가? 저리 호법을 서고 있는데 주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는가?”

“그게 아니라 장유중 어르신과 유생 나리들이 걱정돼서 말하는 것일세.”

“그분들이 왜 걱정이란 말인가?”

“지금 호법을 위한 진을 펼치지 않았는가? 그 얘기는 무아지경에서 깨어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네.”

“앗, 그러고 보니…….”

서기가 가주전을 바라봤다.

그들이 걱정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무아지경이란 것이 한두 시진 안에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길며 사흘 밤낮을 지켜봐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며칠 정도는 식사와 생리적 현상을 무시할 수 있는 무림인이라면 그 곁을 지킬 수 있지만, 일반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저기에 갇혀 있다는 것은 고문 그 자체가 될 터였다.

* * *

한빈이 눈을 뜬 것은 해가 지고 나서였다.

한빈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닫힌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이었다.

그때 부드러운 음성이 한빈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렇게 경사가 겹치다니……. 축하한다.”

“…….”

한빈은 멍하니 팽강위를 바라봤다.

팽강위의 눈빛은 부드럽다 못해 녹아내릴 정도였다.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기감이 주변으로 확장되며 사람들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느껴졌다.

아무래도 지(智)의 구결을 한계까지 채운 효과 같았다.

지의 구결을 한계까지 채우면서 일목요연의 또 다른 효능을 얻는 동시에 기감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천운.

그때였다.

불안에 떠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한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안절부절못하는 장유중과 유생들이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누가 봐도 급한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빈의 시선을 느꼈는지 팽강위도 돌아봤다.

그들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팽강위가 외쳤다.

“어서 장유중 어르신과 유생들을 의당으로……!”

그때였다.

장유중이 다급하게 외쳤다.

“가주, 그건 됐습니다. 움직여도 되면 일단 나가 보겠소이다!”

장유중이 손을 내저으며 가주전을 벗어났다.

그 뒤를 유생들이 따르며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치 한빈이 구걸십팔보를 펼친 것같이 동작이 빨랐다.

그 모습에 접객당주가 작게 뇌까렸다.

“저들이 왜 그러는지 아는 분 계시오?”

“아마도 급한 일 때문일 겁니다.”

대답한 것은 한빈이었다.

한빈은 어느새 접객당주의 옆에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접객당주가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사 공자.”

“말하기 쑥스러운 급한 일이 생겼음이 분명합니다.”

한빈의 말에 접객당주가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

“허허,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실례를 저질렀군.”

* * *

하북팽가 적혈맹호대의 전용 연무장.

그곳에서 한빈은 장유중 일행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자네가 준 훈련 비법은 꼭 참고하겠네. 진심으로 고맙네.”

“아닙니다.”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학문의 깨달음에 조금 더 수월하게 도달할 수 있다는 건 아무도 생각 못 한 일이야.”

그들의 대화에 유생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장유중을 바라봤다.

장유중은 천수장에서 한빈이 서기들을 훈련시켰던 방법을 유림 서원에도 일부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똥 씹은 표정을 한 유생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리 걱정하지 마시지요. 다음 기수부터 적용시키겠다고 학장님이 약속하셨습니다.”

“허, 그게 정말이요? 팽 유생?”

양석봉이 눈을 크게 뜨며 장유중을 바라봤다.

장유중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옆에 있던 최유지가 한 발 나와 한빈에게 포권했다.

“약속은 꼭 지키시오, 팽 유생.”

“알겠습니다, 최 유생.”

한빈도 최유지를 향해 포권했다.

그들이 말한 약속이란 강호의 천하 십대세가처럼 유림에도 비슷한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름은 죽림 십대세가로 정하기로 했다.

천하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고 싶었지만, 황제를 모시는 관리로서 천하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불경스럽다는 의견이 있었다.

한빈은 강호와 유림의 세가, 양쪽 모두에 속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그들이 새로 결성한 세가 모임이 중원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의미가 작지 않다는 것은 장유중도 알고 있었다.

서로를 경계하며 눈치 싸움을 하는 것은 강호보다도 관리들이 더했다.

그런데 그들이 파벌에 관계없이 하나로 뭉친 것이다.

이 모임이 계속된다면 중앙 정계에 커다란 변화가 닥쳐올 것은 뻔한 일이었다.

* * *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한빈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한빈은 탁자 위에 쌓인 서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왜 안 펴 보세요?”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한빈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불길하다는 한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지의 구결이 한계까지 차고 상단전의 활용이 자유로워지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기감뿐 아니라 예감도 예민해졌다.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한다면 저잣거리에 점집을 차려도 될 정도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서찰은 죽림 십대세가에 속한 유생들이 남기고 간 것이었다.

가문에 오라고 하면서 그들은 이 서찰들을 남기고 갔다.

한빈의 감이 저 서찰을 펴 보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다. 사실 불길하다기보다는 귀찮음에 가까웠다.

그때 청화가 호기심을 못 참고 서찰 하나를 들었다.

“제가 펴 봐도 돼요?”

“펴 봐도 좋지만, 내게는 얘기하지 말아라.”

“네, 공자님!”

청화가 서찰을 펴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설화가 옆에 붙어 서찰을 같이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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