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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49화 (555/621)
  • 549. 판돈의 주인 (4)

    평상시라면 눈도 마주하지 못할 장유중이었다.

    대학자인 장유중이 제안한다니?

    서기들은 눈도 끔뻑일 수 없었다.

    그들이 못 참겠다는 듯 마른침을 삼킬 때, 장유중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삼 년 뒤! 자네들을 유림 서원으로 부르겠네. 학장으로서 보내는 제안이네.”

    장유중의 말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림 서원의 유생들은 향시에 급제한 것과 같은 신분을 지닌다.

    입학 통보만으로 향시에 통과했다는 것이다.

    모두가 멍하니 있을 때였다.

    한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감과의 내기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장유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지.”

    그 웃음에 한빈이 멋쩍게 웃었다.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것이야, 하하.”

    장유중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한빈은 장유중의 계획을 알 것 같았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진심이지만, 딱 거기까지 일 것이다.

    약속은 지키되, 현감을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 분명했다.

    조사가 끝나고 나면 그를 지탱해 줄 재물과 인맥이 다 떨어져 나가리라는 것은 안 봐도 훤했다.

    한빈은 조용히 허공을 올려다봤다.

    올라가는 속도는 줄긴 했어도, 심화편의 구결은 아직도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한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고생을 안 했을 텐데!’

    한빈은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이제 남은 판돈을 수금해야 할 때였다.

    한빈에게 중요한 것은 진짜 돈보다는 구결이었다.

    한빈이 바라보는 하늘의 한쪽에는 계속 심화편, 그것도 지(智)의 구결을 나타내는 숫자가 계속 변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잊을 만하면 변하고 있었다.

    [심화편]

    [……]

    [지(智) : 칠십구(七十九)]

    심화편의 구결만 보면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옆에서 보던 양석봉이 물었다.

    “팽 유생! 무슨 좋은 일이라도……?”

    “비밀입니다.”

    한빈이 활짝 웃자 양석봉은 마주 웃었다.

    모두는 서로를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비밀이라면서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이 너무 당연해 보였다.

    * * *

    같은 시각, 북경의 한 검문소.

    용린검법 중 심화편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 것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나도 좀 보면 안 되겠나?”

    “허, 안 되네. 이 족자는 황제 폐하께 바칠 족자이네.”

    “세상에 둘도 없는 명필이라 들었네. 그 서체를 내 눈으로 확인 못 한다면 난 집에 가서도 잠을 청하지 못할 것이네.”

    “그래도 안 되네.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네. 여기에 밀봉된…….”

    “밀봉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아무도 본 자가 없다면 어떻게 내가 그 족자 속 글이 명문에 명필인 줄 알겠는가?”

    “허,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럼 빨리 보고 다시 넣어 놓게.”

    “알았네.”

    두건을 쓴 학사가 입맛을 다시며 대나무 통에 든 족자를 꺼냈다.

    이것은 한빈의 문장을 족자로 만든 것이다.

    그냥 황궁으로 보내면 다른 서찰과 섞일 수 있기에 현감이 특별히 지시한 것이다.

    이 족자는 학자들 사이에 제법 소문난 상태였다.

    학자들 사이의 소문은 적토마보다 더 빠르다는 속담이 있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이 족자가 북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법 명성 있는 학자들은 목이 빠지도록 진상 물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족자를 감상하는 것이 북경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이것이 바로 한빈이 뜻하지 않게 구결을 쌓을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

    * * *

    세 시진 후.

    천수장 근처의 다루 이 층.

    향시 급제자의 목록을 확인하고 온 그들은 다루에서 모처럼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장면이 계속되었다.

    찻잔 위에 희미하게 일렁이는 김이 아니라면 시간이 멈춘 풍경화 속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한빈도 마찬가지였다.

    서기들, 유림 서원의 유생들과 함께 있었지만, 한빈은 먼 산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 듯했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도 한빈을 따라 먼 산을 바라봤다.

    저 멀리 보이는 산에 어떤 깨달음이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오해 때문이었다.

    물론 한빈이 바라보는 것은 먼 산이 아니었다.

    한빈은 정확하게 용린검법의 구결을 보고 있었다.

    심화편의 한계인 백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智) : 팔십일(八十一)]

    백에 도달한다면 분명 어떤 변화가 생길 터.

    호기심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한빈은 올라가는 구결의 숫자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마지막 판돈을 수금해야 할 때였다.

    한빈은 장문수에게 물었다.

    “아버님은 잘 계시는가?”

    “네?”

    장문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집안 사정을 살짝 털어놓기는 했어도 한빈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님이 가족과 싸우고 가문을 나오셨다고 했지? 그리고 이름까지 바꾸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건…….”

    장문수는 말끝을 흐렸다.

    한빈에게 털어놓기는 했어도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자네는 내게 빚이 있지 않은가?”

    “빚이라면 당연히…….”

    뒷말은 생략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빈에게는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빚이 있었다.

    학문의 성취가 아니었다.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졌다.

    그리고 학문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어제서야 안 일이지만, 자신을 비롯한 하북팽가의 서기들이 반찬으로 먹던 무말랭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영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직계도 아닌 흔하디흔한 가문의 일꾼에게 그런 영약을 나눠 주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의 고질병인 어깨 통증도 사라진 상태였다.

    친구인 조일순도 언제부턴가 허리의 통증이 사라졌다고 한다.

    한빈은 처음 공헌한 대로 건강한 육체를 만들어 준 것이다.

    아무리 맑은 물을 담아도 그릇이 깨끗하지 않으면 오래 보존할 수 없는 법.

    이제 튼튼한 그릇을 얻었으니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했다.

    장문수는 물론 조금 더 욕심을 내 볼 생각이었다.

    그 욕심이란 한빈의 옆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자네의 아버님이 자네 손을 잡고 나올 때 문 앞에 갈지(之)로 꺾인 노송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네, 맞습니다. 다른 것은 기억 못 해도 그 노송만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건 왜…….”

    장문수는 말을 맺지 못했다.

    옆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장유중의 눈빛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이 얼마나 묘한지 계속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장유중의 눈빛은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어깨도 눈빛을 따라 한겨울의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한빈은 다른 서기들에게 눈짓했다.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유림 서원의 유생들에게도 눈짓했다.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한가득이었다.

    한빈이 다시 눈짓하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빈은 그들을 데리고 다루에서 나왔다.

    창가에 얼핏 비치는 장유중과 장문수의 그림자를 확인한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조일순이 다급히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군.”

    “조금 있으면 저들이 이야기를 끝내고 올 터이니, 그때 직접 듣도록.”

    “네, 알겠습니다. 주군.”

    조일순이 포권했다.

    한빈의 머릿속에는 저들 사이에서 오갈 대화가 대충 예상되었다.

    장유중이 하북에 온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한빈도 알 수 없다.

    앞으로 그들이 만들어 가야 할 이야기니까.

    * * *

    이틀 뒤 하북팽가의 가주전.

    한빈과 서기들이 가주 팽강위 앞에 각을 잡고 서 있었다.

    가주 팽강위는 난데없는 그들의 분위기에 눈매를 좁혔다.

    사실, 가주 팽강위는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중급 서기 장문수의 향시 급제 소식을 들었던 것.

    급제하고도 하북팽가에 남겠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까지 듣자 서기들의 변화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서기들은 글공부하는 서생이라고 하기보다는 무사에 가까운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다.

    팽강위는 천천히 그들의 앞으로 걸어가며 살짝 기세를 피워 냈다.

    서기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이라면 이 정도의 기세만 피워 내도 움찔거렸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리 기세를 피워 냈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그들의 앞에 선 팽강위가 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생했구나. 그런데 어째 이번 향시에서 급제했다는 장 서기는 보이지 않는구나.”

    “잠시 집에 들른다고 해서 휴가를 주었습니다.”

    “아쉽구나, 쩝.”

    팽강위가 입맛을 다셨다.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그때였다.

    가주전의 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장유중이 서 있었다.

    장유중은 며칠 전 하북팽가를 떠난 후 원로와 각주 들에게 잊힌 상태였다.

    떠난 줄 알았던 그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원로와 각주 들은 장유중을 바라보고 말을 멈췄다.

    장유중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무림인만 기세를 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원로와 각주는 장유중을 통해 알았다.

    장유중은 평소와 다르게 학자만의 깐깐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그때 장유중이 천천히 걸어왔다.

    동시에 원로과 각주 들이 뒤쪽으로 물러나며 길을 터 주었다.

    무림인들에게 장유중은 거리감이 있는 존재였다.

    거기에 장유중의 표정이 굳어 있는 듯 보이자 분위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팽강위만이 고개를 갸웃하며 장유중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유중이 팽강위 앞에 서자 거대한 두 산이 마주 보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을 때 장유중이 손을 내밀었다.

    장유중이 학자라는 것도 잊은 채 원로와 각주 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멈추…….”

    원로와 각주 들은 말을 맺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장유중이 팽강위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사실 저렇게 손을 잡는 것 자체가 무인에게는 무례였다.

    모두가 이 상황이 황당하다는 듯 보고 있을 때였다.

    장유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소, 가주.”

    “무슨 일인지요?”

    팽강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주 덕에 내 평생소원을 풀었소이다.”

    “제 덕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주가 팽 유생을 낳았으니 그게 가주 덕이지 않고 무엇이겠소!”

    장유중은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원로와 각주 들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였다.

    대학자 장유중이 가주의 손을 꼭 잡고 저리 고마워하는 것이 사 공자 때문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한빈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뇌까렸다.

    “대체 사 공자는…….”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돌아갔다.

    한빈은 언제나처럼 가주전의 열린 창으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롭게 상념에 잠긴 한빈을 본 접객당주가 작게 속삭였다.

    “상단전이 열린 것이 분명해…….”

    “허허, 가문의 복이로구나!”

    그들의 말에도 한빈은 계속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호에 흩어진 인연을 찾았습니다. 그로 인해 구결을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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