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 판돈의 주인 (3)
한빈이 턱짓하며 서기들을 바라봤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
서기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요리와 한빈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오늘 자신들이 향시를 무사히 치렀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차려진 요리 때문도 아니었다.
그들이 진심으로 놀란 이유는 한빈의 따뜻한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한빈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포근한 미소로 턱짓할 뿐이었다.
어서 요리를 즐기라는 뜻이었다. 그는 조용히 서기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 눈빛을 본 서기들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사실 한빈의 따뜻한 눈길이 향해 있는 곳은 서기가 아니었다.
한빈은 서기들이 품고 있는 구결을 나타내는 점을 보고 있었다.
한빈의 눈에 구결은 사막 한가운데 우물과도 같았다.
이제 드디어 구결을 나타내는 점들이 완성되었다.
이제 그 점을 추수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지(智)’의 구결은 다른 구결과 다르게 상대의 인정을 받으면 취할 수 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승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마치 비무대 위에서 상대가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승부가 끝나는 것과도 같았다.
그때였다.
한빈의 눈이 커졌다.
허공에 뜬 용린검법이 반짝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빈의 시선에 용린검법의 책장이 넘어가더니 심화편이 펼쳐졌다.
[심화편]
[……]
[지(智) : 오십일(五十一)]
갑자기 심화편의 구결 숫자가 변하기 시작했다.
한빈은 다급하게 서기들의 몸에 나타난 점을 확인했다.
그들의 몸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때 다시 구결의 숫자가 올라갔다.
[지(智) : 오십이(五十二)]
구결의 숫자가 올라간다는 것은 두 팔 벌려 반길 일이었다.
문제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이 원인이 무엇일까?
한빈이 고민하는 중에도 구결의 숫자는 계속 올라갔다.
[……]
[지(智) : 오십구(五十九)]
올라가는 숫자는 멈출 줄을 몰랐다.
고민도 잠시, 한빈은 활짝 웃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비싼 영약을 떠먹여 준다는데, 마다할 무인이 어디 있을까?
물론 상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꺼릴 수는 있다.
지금은 그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
구결이 이렇게 들어온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었다.
변화무쌍한 한빈의 표정을 본 장문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흠, 자네들이 자랑스러워서 그렇지. 그동안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저는 이번 공부를 통해 우물 안의 개구리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았습니다.”
“개구리가 무섭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이 바다인 줄 착각하니 말입니다. 제가 바로 우물 안의 개구리였습니다. 앞으로도 가르침 달게 받겠습니다.”
장문수가 고개를 숙이자 다른 서기들도 같이 고개 숙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이제 며칠 뒤면 가문으로 복귀하는군. 그런데…….”
한빈이 말끝을 흐리자 장문수가 다급히 말했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새겨듣겠습니다.”
“이번 향시에 급제하면 가문을 떠나야 할 것이 아닌가?”
“공자님, 제가 합격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자네의 문장에서 급제하고 남을 실력을 확인했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가 쓴 문장을 어떻게 아십니까?”
장문수가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였다.
그의 옆에서 눈처럼 하얀 신형이 나타났다.
순간 장문수가 놀라 몸을 뒤로 젖혔다.
의자와 함께 넘어지려고 하는 순간 하얀 신형이 그를 잡았다.
“아저씨, 왜 그렇게 놀라세요?”
“서, 설화구나!”
그 신형의 정체는 바로 설화였다.
설화는 당과 꼬치를 들고 방긋 웃고 있었다.
설화가 이렇게 등장한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장문수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웃었다.
설화가 이 정도로 고수라는 것은 천수장에 와서야 알았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설화의 모습에 장문수는 이전처럼 대하고 있었다.
설화를 본 장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무공이라면 답지의 내용을 아무도 모르게 살폈을 수도 있었다.
그때 설화가 말했다.
“공자님은 아마도 비밀이라고 하실 거예요.”
“하하, 궁금하지 않구나. 나는 이미 비밀을 찾은 것 같다, 설화야.”
“정말로요?”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만은…….”
“중요한 게 뭔데요? 서기 아저씨.”
“향시에 합격해도 우리는 당분간은 가문을 떠나지 않을 거란다.”
말을 마친 장문수는 한빈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한빈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군.”
장문수의 말에 주변에 있던 서기들도 고개를 숙였다.
“주군으로 받들겠습니다.”
그들의 말은 진심이었다.
세상을 살며 자신을 인정해 주는 자도.
자신의 능력을 일깨워 주려는 자도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향시의 결과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칠 정도로 누군가를 밀어붙인다는 것은 웬만한 정성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보내는 눈빛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순간 그들의 몸에 나타난 점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에 있던 점들이 허공에 뜬 용린검법에 흘러들어 온다.
그 점들은 용린검법 안에서 구결이 될 터였다.
그 순간 구결의 숫자가 더욱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 * *
같은 시각.
한빈보다 더 놀란 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장유중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채점관들의 가운데 있는 답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필체였다.
서체에서 마치 빛이 흘러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화려하면서도 단아하며 획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듯 보였다.
이 필체는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최근에 말이다.
저 종이에 쓰인 필체는 다름 아닌 한빈의 흔적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문장이 자(子)로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순간 장유중의 머릿속은 멍해졌다.
바람에 날리는 답지를 잡으려고 동분서주 움직이던 바로 그 서생의 정체가?
순간 장유중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 답지가 어떤 결과를 만들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현감과 채점관들을 당황하게 만든 것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초지종은 천수장으로 돌아가서 물어보면 될 터.
장유중은 조용히 현감과 채점관을 바라봤다.
현감과 채점관은 가운데 놓인 답지를 보고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이 정도의 문장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 문장은 어떠한가?
군신과의 관계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의무가 아닌 권리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논리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문제는 이 논리에 반박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 답지가 장원이 되어야 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장원은 내정되어 있는바.
그렇다고 이대로 덮기에는 문장 자체가 너무 대단했다.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자가 속해 있는 가문이라면 필시 보통 가문이 아닐 터였다.
그때였다.
채점관 중 하나가 외쳤다.
“이름이 없소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현감이 다급히 묻자 채점관이 답지의 아래를 가리켰다.
순간 현감의 눈이 커졌다.
채점관의 말대로 그곳에는 응시생의 이름이 없었다.
장원을 주려 해도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일단 장원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이 생기자 현감은 그 문장을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순간, 현감의 눈이 더욱 커졌다.
마음을 정리하자 그 문장이 더 대단하게 보였다.
그들은 그 후 한참 동안 문장을 감상했다.
그때 채점관 하나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름이 없으니 장원의 자리는 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다른 채점관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지 않아도 답지에 대해 감복하면서도 찝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기에 모두가 귀를 쫑긋했다.
“이 문장을 황궁으로 올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모든 채점관이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들의 말에 현감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도 찬성하는 바입니다.”
만약 이 답지가 고위 관료나 황궁과 관계된 자가 쓴 것이라면 나중에 사달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일단 보고부터 하는 것이 나중에 일어날지 모르는 분란을 막을 수 있을 것.
그렇게 답지에 대한 논의는 마무리되었다.
정신을 차린 현감은 장유중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그는 다시 품을 뒤져 두둑한 전낭을 꺼냈다.
전낭을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린 현감은 고개를 갸웃했다.
장유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 * *
향시가 끝난 지 이틀 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수장의 아침이 밝았다.
그들은 아침 일찍 식사를 챙기고 천수장을 나섰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관청의 담벼락이었다.
관청의 담벼락에는 향시 합격자가 굵직한 글자로 쓰여 있었다.
하북팽가의 서기들은 천천히 담벼락으로 걸어갔다.
한빈과 장유중 일행도 담벼락으로 향했다.
이번 향시는 서기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한빈과 장유중의 내기도 걸려 있었다.
거기에 더해 유림 서원에서 온 유생들 사이의 내기도 있었다.
담벼락 앞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서생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서생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발길을 돌렸다.
드디어 앞까지 간 장문수와 서기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담벼락을 확인하던 장문수의 눈이 커졌다.
나머지 서기들은 눈을 크게 뜨고 장문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담벼락으로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던 서기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동시에 그들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것도 잠시, 그들의 눈빛은 바로 살아났다.
그들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장유중을 바라봤다.
“제가 졌군요. 내기는 내기이니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예상했던 바였다.
향시에서는 실력만으로는 급제할 수 없었다.
운이라는 것이 따라야 했다.
물론 운 중에는 부모 잘 만난 운이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절반의 성공이었다.
담벼락에는 서기 중 하나의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바로 장문수였다.
만약 실력대로라면 장문수는 하북팽가에 서기로 들어오기 전 급제했어야 했다.
다행히 장문수는 이번 향시 맨 끝자락에 겨우 이름을 올려놨다.
한 명이라…….
한빈은 이번 내기에서 진 것이다.
하지만 내기에 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한빈은 계획이 있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장유중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하하, 내기는 내가 졌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결과가 이렇게 명백히 나왔는데, 자신이 졌다고 하는 장유중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이상했다.
서기들도 둘 사이의 내기는 알고 있었다.
그들도 한빈과 장유중의 대화에 집중했다.
유림 서원에서 온 유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장유중이 말을 이었다.
“나는 향시에서 모든 답지를 확인했네. 내 기준으로라면 여기 있는 서기들 모두 급제여야 했네……. 그래서 제안 하나 하겠네.”
“…….”
서기 중 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멍하니 장유중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