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46화 (532/621)

546. 판돈의 주인 (1)

현감은 재빨리 응시생 명부부터 뒤졌다.

장유중이 눈여겨보고 있는 서생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몇 번씩 응시생의 명부를 확인했다.

현감은 난감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어디에서도 장유중이 관심을 둘 만한 응시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살피던 현감은 장유중이 관심을 둘 만한 응시생이 없다고 판단했다.

누군가를 눈여겨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면…….

현감은 장유중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러고는 장유중과 응시생 명부를 번갈아 봤다.

절대 장유중의 의중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장유중은 중요한 인물이었다.

매의 눈으로 응시생 명부를 살피던 그는 속으로 한숨을 삭였다.

한참을 살폈지만, 주목할 만한 유생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감은 계속 힐끔힐끔 장유중을 살폈다.

아무 표정 없이 관청의 내부를 살펴보는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향시가 아닌 이곳 현에 원하는 것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현감은 고민을 끝냈다.

분명히 노잣돈이 필요해서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관리들이 현을 지날 때면 현감은 거마비(車馬費)를 챙겨 주곤 한다.

이것은 뇌물이 아니라 마치 인사를 주고받는 과정과도 같았다.

상대가 청렴한 관리라면 더더욱 거마비가 필요할 터였다.

지역이 광활하다 보니 생일 인사 한번 가려고 해도 몇 달을 달려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니 중원을 횡단하려면 관청의 지원은 필수였다.

확신이 들자 장유중에 대한 걱정은 모두 사라졌다.

슬쩍 눈치를 본 현감은 다른 이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현감은 응시생의 명부를 유심히 보고 몇 개의 이름을 머릿속에 넣었다.

그들의 이름 옆에는 바를 정(正)자가 쓰였었다.

어떤 응시생의 이름에는 아래 하(下)자가 적혀 있기도 했다.

사실 그들의 이름 옆에 적힌 기호는 뇌물을 바친 가문의 자제를 표시해 놓은 것이다.

가장 적게 준 자의 이름 옆에는 한일(一)자를 적어 놓고 뇌물의 수준에 따라 획을 하나씩 그어서 최상위의 수준의 가문에는 바를 정(正)자를 적어 놓은 것이다.

향시에 통과하는 서생의 수는 대략 스무 명.

그중에 급제가 예정된 명단을 적당히 끼워 넣어야 했다.

그러니 이번 향시가 끝나면 당연히 제법 큰 돈이 굴러들어 올 터.

현감이 명단을 머릿속에 새겨 넣었을 때였다.

관리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현감 나으리, 지금 빨리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거지들이 시험을 보겠다고 들어와서 다른 서생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요.”

“거지라……. 일단 가 보자.”

관리를 따라 현장에 도착한 현감은 고개를 갸웃했다.

서생들 사이에 누가 봐도 행색이 초라한 이들이 끼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조금만 다가가면 퀴퀴한 냄새가 올라올 것 같은 차림이었다.

물론 서기들에게 냄새는 나지 않았다.

천수장에서 서기들은 평상시 입던 옷을 무복처럼 관리했다.

수련에 임한 무사들은 의복을 어떻게 관리할까?

거대 문파에서는 무공에 막 입문한 제자들에게는 보통 하얀색 무복을 지급한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 무복이 검은색이 될 때까지 수련하라는 뜻이었다.

때가 찌들어 무복의 색이 변하면 그들의 노력이 옷감에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흰색 무복이 검은색 무복이 되고 기초 수련을 통과한 무사로 인정받은 후에야 문파의 문양이 새겨진 정식 무복을 받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었다.

사실 며칠은 안 빤 것처럼 지저분해 보였지만, 서기들은 자신들의 의복을 일과가 끝나면 잘 빨아서 말렸다.

그런데도 이 꼴이 되었으니, 그들이 어떤 수련 과정을 거쳤는지는 짐작이 갈 만했다.

물론 이것은 서기들의 사정이었다.

현감은 그들의 복장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한눈에 다른 이들이 왜 불만을 제기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현감은 시험장의 구석을 가리키며 관리에게 지시했다.

“저자들은 모두 저곳으로 몰아넣어라!”

“헉, 저 자리는 아무래도…….”

관리가 말끝을 흐렸다.

현감이 가리킨 자리는 다름 아닌 뒷간이 있는 곳이었다.

거기에 가까운 곳에 퇴비를 쌓아 놓은 곳도 있었다.

시험장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관리가 뭔가 상상한 듯 숨을 참았다.

저곳에서 시험을 치른다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관리의 표정을 본 현감이 말했다.

“향시를 보게 해 주는 것만 해도 다행 아니더냐! 그리고 자리가 이상해서 시험을 못 봤다는 등 말한다면 바로 내치거라. 그런 것은 모두 궁색한 변명이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나으리.”

관리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을 때였다.

현감의 뒤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현감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 장유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구, 어르신…….”

“다 들었네. 어찌 된 일인가?”

장유중이 묻자 현감은 하북팽가의 서기들을 가리켰다.

서기들은 관리의 안내로 기존 시험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현감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거지들이 시험을 보러 왔기에 몇 가지 지시를 내렸습니다.”

“저곳이 아니어도 피해를 주지 않고 시험을 치를 장소가 있지 않은가?”

“백로가 노니는 곳에 까마귀를 풀어놓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백로라…….”

“네, 백로지요. 아마 저 작자들은 누군가에게 매수되어서 시험을 방해하기 위해 온 자들이 틀림없을 겁니다.”

“저 중에 백로가 있으면 어떻게 할 텐가?”

“흠, 그럼 제가 책임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어르신.”

“그러게……. 만약 저 중에 백로가 둘 이상 있다면 자네가 책임지게. 하지만!”

장유중이 말을 끊었다.

그 모습에 현감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다.

장유중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말을 이었다.

“백로가 둘이 안 된다면 내 자네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네. 대신 나는 시험의 평가에는 관여하지 않겠네.”

“네?”

“시제는 내가 냈지만, 참관만 할 뿐 관여하지는 않겠다는 게 내 약속일세.”

“감사합니다, 어르신.”

현감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물론 현감은 장유중의 의도를 살짝 오해하고 있었다.

장유중이 자신을 향해 줄을 내려 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사실 장유중은 단순하게 내기를 한 것이었다.

내기를 한 이유는 현감이 한빈이 길러 낸 응시생, 즉 하북팽가의 서기들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한빈과 내기에서 잡은 기준은 하북팽가 서기들 반수 이상이 향시에 통과한다였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성과를 못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인정한 천재인 한빈이라면, 적어도 둘이나 셋 정도의 성과는 내리라 생각했다.

한빈과 내기했지만, 한빈의 자존심이 장유중의 자존심이 된 묘한 상황이었다.

말을 마친 장유중은 조용히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곳은 천수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고얀 친구로군!’

이것은 한빈을 향한 외침이었다.

장유중은 자신이 이렇게 내기를 즐길 줄은 몰랐다.

누군가를 시험하기 위해서 문제를 낸 적은 있어도 내기를 제안한 적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한빈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상대에게 내기를 제안하는 행동은 꽤 중독성이 있었다.

* * *

하북팽가에서 온 서기들은 따로 마련된 곳에 앉았다.

누가 봐도 괄시한 것이 분명하지만, 누구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서기 중 누군가가 말했다.

“이건 하북팽가에서 온 우리 서기들에 대한 특별 대우가 아닌가?”

“그렇고말고. 오래간만에 이렇게 편하게 앉다니…….”

다른 서생들을 보호하려는 조치였지만, 그들은 이곳이 극락이라 생각했다.

한 달 만에 처음 보인 웃음이었다.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던 서생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말세로군. 말세야!”

“하긴, 저 자리가 어울리는 것 같네.”

“쉿, 이제 시제가 나올 것 같네.”

그들이 정색하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 커다란 족자가 펼쳐졌다.

족자에는 중첩되는 글자 몇 쌍이 적혀 있었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이것은 옛 성현의 말씀.

잠시 시제를 바라보던 이들은 동시에 붓을 들었다.

하북팽가의 서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서기들의 붓이 먹을 머금었다.

이제 잠시 뒤면 천수장에서 이루어진 내기의 결론이 날 터였다.

그 내기는 한빈과 장유중 사이에 이루어진 것도 있었고.

유림 서원 유생들 간에 이루어진 내기도 있었다.

사실 유생들도 장유중을 따라 관청으로 들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공정함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장유중이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은 향시를 치르는 장면을 담장 너머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목을 길게 빼고 향시에 응시한 서생들을 바라봤다.

그중 양석봉이 황당하다는 듯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저건 대체 무슨 짓인가?”

“그러게 말일세…….”

최유지가 미간을 좁혔다.

사실 양석봉을 비롯한 유생 일행은 하북팽가의 서기에게 측은지심을 품고 있었다.

하북팽가의 서기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훈련을 수행했다.

그것을 본 양석봉은 말려 볼까도 생각했었다.

튼튼한 육체를 통해 학문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게 가능하다면 어찌해서 자신들의 가문에서 그런 수련법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효과가 없으니 사용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안휘양가도.

산서최가도 말이다.

그것만 해도 안타까운데 그들은 지금 거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나서고 싶지만, 이번 향시에 영향을 미칠 어떤 짓도 하지 말라는 장유중의 명이 있었기에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북팽가 서기들을 바라보던 양석봉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 표정은 뭔가?”

“허허, 다들 웃고 있네그려.”

“뭐가 좋다고 저리 웃는가?”

“혹시 탈이라도 난 게 아닌가?”

양석봉과 최유지는 서기들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홍금호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저기 저 뒷모습, 어딘가 눈에 익지 않은가?”

“어디 말인가?”

양석봉이 고개를 갸웃하자 홍금호가 손을 내저었다.

“내가 잘못 본 것 같군. 미안하네.”

“허허, 눈이 밝은 자네도 실수할 때가 있군.”

양석봉이 웃자 홍금호가 눈을 비볐다.

이상하게 응시생 중 한빈과 비슷한 뒷모습을 본 듯해서였다.

홍금호가 본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응시생 중에는 분명히 한빈이 있었다.

한빈은 지금 천급 초식을 시험 중이었다.

‘유유자적.’

이 초식을 시험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초식의 설명에 의하면 어떤 고수도 기척 혹은 숨결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했다.

완벽하게 적진에 숨어들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이것이 무림인이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통용될까.

한빈은 몰랐지만, 성공했다.

홍금호가 한빈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반박귀진만을 썼을 뿐이었다.

하지만 유유자적을 쓰자 홍금호의 눈에서 벗어난 것이다.

물론 이 문제뿐이 아니었다.

늘어난 ‘지(智)의 구결’과 ‘학문적인 성취의 상관관계’를 시험해 보고자 하는 것도 있었다.

아직까지는 한빈이 응시생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자는 없었다.

장유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하북팽가의 서기들에게 눈을 떼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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