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 천수장에서의 내기 (4)
멀리서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는데, 막상 와 보니 성인 하나 정도는 충분히 통과할 크기였다.
그들은 한 명씩 천천히 개구멍을 통과했다.
맨 마지막으로 통과한 것은 장문수였다.
개구멍을 통과한 장문수는 눈을 크게 떴다.
개구멍의 바깥쪽에서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모닥불 주변에서는 두 명의 무사가 술병을 잡고 있었다.
복장으로 봐서는 적혈맹호대가 분명했다.
바람이 불고 모닥불이 일렁이자 그들의 신형이 없어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모닥불이 줄어들었다가 다시 돌아왔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오늘은 달빛 한 점 없이 칙칙한 날이었다.
모닥불이 줄어들면 모습이 보이지 않고, 모닥불이 살아나면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묘하게 오한이 들었다.
그들은 서기들의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술병을 들이켜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먼저 나간 서기들도 적혈맹호대의 무사들 덕분에 바싹 얼어붙어 있었다.
설마 개구멍 밖에 무사가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장문수를 비롯한 서기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보다 못한 장문수는 가볍게 헛기침했다.
“흠.”
하지만 그들은 장문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조용히 술병을 들이켜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무사 하나가 하늘을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옛날 생각 나네요.”
“그게 무슨 옛날이야? 이 년도 안 됐구먼.”
“이 년이면 옛날이죠. 그때 장삼 아저씨는 일류의 경지도 못 이뤘잖아요.”
“그야 그랬지.”
“지금은 일취월장하셨으니 그때는 옛날 맞죠.”
“이놈아, 어른 놀리면 못쓴다.”
“헤헤, 놀린 거 아니에요. 그때 우리가 저 개구멍으로 나올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요.”
“그래, 어찌 보면 행운이었지.”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개구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들의 대화만 보면 마치 개구멍에 추억이 얽혀 있는 듯했다.
그때 무사 중 하나가 힐끔 장문수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손짓했다.
오라는 신호였다.
장문수를 비롯한 서기들은 마지못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모닥불에 가까이 가자 그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장문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호 무사 아니오? 여기는 장삼 무사 맞죠?”
“네. 그래요, 장 서기님.”
조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문수가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궁색한 변명이라도 늘어놔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그냥 산책 나왔다가…….”
“괜찮아요. 저희는 서기님들 심정을 잘 알고 있어요.”
“그, 그게 무슨…….”
장문수가 말을 더듬자, 장삼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끼어들었다.
“우리도 똑같이 이 개구멍으로 탈출하려다가 실패했으니 그 심정을 아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소?”
“아, 장삼 무사님도 탈출하셨다는 말입니까?”
“이건 창피한 일이 아니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누구든 탈출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탈출에는 성공하셨습니까?”
“성공했다면 이 자리에 있겠소?”
“아.”
“뭐, 잡힌 게 행운일 수도…….”
“저희를 잡아가시려고 기다리신 겁니까?”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처럼 보이오?”
“아, 아닙니다.”
“여기서 탈출하든 돌아가든 우리는 못 본 척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
장문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뒤쪽을 바라봤다.
다른 서기들의 의견을 묻기 위함이었다.
장문수는 다른 서기들이 눈짓하는 것을 보았다.
탈출하자는 뜻이었다.
그때였다.
장삼이 사람 좋은 얼굴로 모닥불 위에 올려놓은 꼬치를 들었다.
“보아하니 결심이 선 것 같군. 먼 길 떠날 텐데 요기나 하고 가시오.”
“어, 그건 아닌데…….”
그때 조호는 술병을 내밀었다.
“우리가 주군 옆에 있으면서 늘어난 건 무공보다 눈치예요. 뻔한데 숨기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튀세요. 서기 아저씨들이 없어야 저희도 편해요.”
“조호 무사,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련생이 줄어야 교관이 편한 것은 당연한 이치잖아요. 서기 아저씨들이 향시에 급제해 봤자 저희에게 뭐가 떨어지죠? 아니, 합격이 문제가 아니라 계속 끈질기게 붙어 있으면 저희만 힘들어요. 갈 사람은 그냥 가는 게 저희도 편해요. 안 그래요? 장삼 아저씨.”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들의 대화에 장문수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꼬치와 술병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갚겠습니다.”
“나도 좀 주게.”
뒤쪽에 있는 서기들이 술과 고기를 먹기 위해 장문수의 뒤에 섰다.
그 모습에 조호가 손을 휘휘 저었다.
“목소리 낮추세요. 그러다 들키겠어요. 그리고 술과 고기는 충분하니 천천히 드시고 튀세요. 망은 저희가 봐 드릴게요.”
말을 마친 조호는 뒤에서 술병을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장삼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망을 보러 간 것이 분명했다.
장문수는 동료들과 함께 꼬치를 베어 물었다.
“휴, 적혈맹호대에 저런 성인군자들이 있을 줄이야.”
“그러게 말이네. 빨리 먹고 여길 떠나세.”
동료 서기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다른 서기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이리 졸리지?”
“그야 긴장이 풀려서 그런…….”
장문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잠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몸은 축 늘어졌고 눈꺼풀은 천근이 된 것처럼 저절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귓가에 풀벌레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청각만 빼고 나머지 감각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장문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마음만 그렇게 먹었을 뿐, 입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조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내가 이겼죠?”
“허허, 이놈들이 이렇게 속아 넘어갈 줄을 몰랐구나.”
“어서 은전 한 닢 주세요.”
“옜다! 대신 내일 술 한잔 사야 한다.”
“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의 음성에 장문수는 사태를 깨달았다.
* * *
일각 후.
장자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장삼! 조호! 이자들을 내게 데려오면 어찌합니까? 나도 쉬어야지.”
“죄송해요, 장 의원님. 둘이서 다섯을 끌고 오려니까 오는 도중 조금 상해서…….”
“휴, 가면 갈수록 팽 공자를 닮아 갑니다?”
장자명은 기가 찬 표정으로 조호와 장삼을 바라봤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천수장에 처음 왔을 때 한빈은 장삼과 조호를 여기에 던져 놓고 갔다.
그런데 이제는 장삼과 조호가 서기들을 들고 온 것이다.
이 야심한 밤에 치료하라고 말이다.
한빈 덕에 독과 의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장자명도 사람이었다.
잠을 잘 때 자야 일을 할 수 있었다.
사실 영약의 힘이 아니라면 이렇게 버티지도 못할 터였다.
장삼과 조호가 사라지자 장자명은 조용히 침을 들었다.
그러고는 널브러진 서기 중 하나를 골라 그의 목덜미에 찔렀다.
그 서기는 다름 아닌 장문수였다.
순간 장문수의 감겼던 눈이 번뜩 떴다.
상상도 못 할 통증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눈을 떠 보니 장자명이 희미하게 웃고 있다.
장문수가 아무리 용을 써도 아직 입이 열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장문수는 그저 멍하니 장자명을 바라봤다.
그때 장자명이 입을 열었다.
“흠, 장 서기님이시군요. 제가 아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저는 환자를 진짜 싫어합니다.”
“…….”
장문수는 그저 듣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장자명은 상대의 표정을 보고도 무관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제 개인 시간을 뺏기 때문이죠. 지금처럼요.”
“…….”
장문수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게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장자명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 침은 치료용이 아닙니다. 제가 침을 놓은 곳은 정목혈이라고 하죠. 사람의 신체 중에 세 번째로 고통을 많이 느끼는 곳입니다. 만약에 또 환자가 되어서 찾아온다면 두 번째와 첫 번째 고통도 알게 해 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또 잡히면 저한테 죽는 겁니다. 아니, 다쳐서 일거리를 만들어도 죽습니다.”
말을 마친 장자명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침을 더 깊숙이 찔렀다.
물론 이 중에 반만 진실이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혈 자리 중 하나가 맞았다.
하지만 치료와 관계없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장자명은 가장 회복이 빠르면서도 가장 고통스럽게 치료를 하는 중이었다.
순간 장문수의 입이 열렸다.
“앗.”
장문수가 나머지 서기도 마저 치료를 끝냈을 때였다.
방문이 다시 열렸다.
덜컹.
장자명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설화야, 청화야. 너희는 또…….”
“죄송해요, 장 의원 아저씨. 저희도 잡았어요.”
“알았으니……. 그냥 놔두고 가거라.”
장자명의 말에 설화가 어깨에 걸쳐 멘 사내를 내려놓았다.
풀썩.
사내를 내려놓은 곳은 장문수의 옆이었다.
장문수는 그가 서기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쓰러진 사내를 확인했다.
“앗.”
장문수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장문수의 친우인 조일순이였다.
자기는 탈출하지 않겠다더니 이렇게 잡혀 온 것이다.
조일순도 눈만 끔뻑이고 있는 상태.
사실 조일순은 조금 민망했다.
장문수가 숙소를 나간 후, 그와 다른 방향으로 탈출하면 잡히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서기 몇 명을 규합해 행동에 옮긴 것.
하지만 담장을 넘기 전에 설화에게 덜미를 잡혔다.
그들의 귓가에 설화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청화야, 빨리 가서 공자님한테 현상금 받자.”
“네, 언니.”
그들의 말에 장문수와 조일순은 그제야 모두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혈맹호대 그리고 설화.
거기에 인자한 척 미소 짓는 의원 장자명까지…….
그들은 진정한 악마들이었다.
어찌 정파에 저런 사악한 자들이!
이게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그렇게 첫날이 지나갔다.
침을 다 놓고 난 장자명은 한숨을 쉬었다.
“휴.”
많은 의미가 담긴 한숨이었다.
내일도 모레도…….
오늘과 상황은 다르지 않을 터였다.
전에 적혈맹호대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결과도 같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 * *
한 달 후.
향시가 열리는 관청의 입구.
임시 시험장으로 쓰이는 관청의 앞마당으로 들어가기 위해 서생들은 줄을 섰다.
그들은 관청의 정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며 초조함을 수다로 풀고 있었다.
“자네는 자신 있는가?”
“이번에는 이 지역에서 콧방귀 꽤 뀐다는 공자들이 모두 시험을 치르지 않는가?”
“자신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왜 딴소리인가?”
“이번에 떨어져도 그건 실력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지.”
“벌써 꽁무니 빼려고?”
“거기에 시험관도 문제가 있네.”
“시험관이라니?”
“이번 시험은 황궁에서 직접 시험관을 보냈다지 뭔가?”
“흠.”
“그러니 어려울 수밖에 없지. ……그런데 이건 무슨 냄새지?”
서생이 코끝을 매만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대 서생도 눈을 가늘게 뜨며 냄새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동시에 한 곳을 가리켰다.
“헉, 저게 뭔가?”
“그러게 말일세. 개방도가 왜 향시에 응시한단 말인가?”
“나도 이해가 안 되네. 거지가 향시에 응시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네.”
그들이 가리키는 곳에는 누가 봐도 거지로 보이는 이들이 힘없이 걷고 있었다.
그들은 향시에 응시하기 위한 줄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다 해진 옷에 산발한 모양새가 완전히 거지였지만, 오른손에는 붓 한 자루를 꼭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