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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43화 (529/621)
  • 543. 천수장에서의 내기 (3)

    그의 표정에 장문수는 뭔가 일이 꼬였음을 깨달았다.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저렇게 날아갈 것 같은 표정을 짓다니!

    표정만 보면 등선을 앞둔 도인과도 같았다.

    거기에 아까 하던 말을 떠올려 보면 이곳에서 얼마나 굴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즉, 계약에 서명한 것은 호구 짓이었던 것이다.

    마른침을 삼킨 장문수가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의원 어르신.”

    “뭐, 그런 일이 있다네. 허허,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어떻게 우리 팽 공자님에 대해서 모르는 건지 말이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아는데 계약서에 덜컥 서명했단 말인가?”

    “죄송하지만, 계약서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자네는 이곳 천수장에 가장 먼저 들어온 자가 누군지 아는가?”

    “그, 그건…….”

    “바로 나네. 참, 정확히는 나와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이지.”

    “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이곳 천수장에서 넘긴 죽을 고비만 해도……. 한두 번이 아니라네.”

    “의원님이 말입니까?”

    “음, 정확히는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이지……. 물론 심 부대주와 소대섭 대주도 포함해서라네. 나는 그들을 치료하는 것 때문에 과로로 죽을 뻔했고.”

    “대, 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자네들이 한 수련이 가장 가벼운 단계라면 믿겠는가?”

    “이게 가벼운 단계라고요?”

    장문수는 세상을 잃은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장자명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장자명이 말을 이었다.

    “그래, 가장 가벼운 단계지.”

    “저희는 일개 서생, 아니 서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왜 저런 수련을 해야 합니까?”

    이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사실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다.

    수련을 할 때는 심미호와 적혈맹호대의 기세에 눌려 누구도 질문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상대의 신분이 의원임이 밝혀지자, 그들은 이제야 질문을 쏟아 내고 있었다.

    사실 의원에게는 못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의 은밀한 비밀까지 털어놔야 치료할 수 있는 법이었다.

    거기에 더해 환자를 돌보며 불평을 털어놓은 장자명의 모습은 그들과 같은 처지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런 이유로 장자명에게만은 편히 말할 수 있었다.

    장문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았지만, 장자명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네는 밧줄을 잡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장문수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라고 하니, 그냥 잡고 있던 것이다.

    장문수와 장자명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서기들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역시 그 이유에 대해서 아는 자는 없었다.

    그들의 표정을 본 장자명이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바로잡기 위해서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바로잡다니요? 저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바로잡습니까! 그럼 이게 벌이라는 이야기입니까?”

    “허허, 내 얘기를 오해했구먼.”

    “오해라니요?”

    “바로잡는다는 것은 붓을 바로잡는다는 걸세. 내가 이 침을 바로잡는 것처럼 말이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적혈맹호대는 칼자루를 바로잡기 위해 사흘 밤낮을 사신대에 드리워진 밧줄에 매달렸다네. 자네는 칼자루를 놓친 무인은 어떻게 될 것으로 생각하나? 아니 편하게 전쟁이라고 생각해 보게……. 전쟁에서 무기를 놓친 병사에게 적군이 ‘아이쿠, 실수하셨군요.’ 하고 봐줄 것 같나?”

    “…….”

    “무기를 놓친 병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네.”

    “자, 잠시만요. 의원 어르신. 어찌 붓대와 칼자루와 똑같습니까?”

    “허허, 자네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문수는 계속 같은 질문을 쏟아 낼 수밖에 없었다.

    병사가 무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은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그 무기와 붓이 어찌 같다는 말인가?

    “팽 공자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지. 침 하나로 열 명의 고수를 죽일 수도 있고 열 명의 고수를 살릴 수도 있다고 말이야.”

    “의원이시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붓은 다르지 않습니까?”

    “자네는 전쟁에서 많은 이를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뭐라 생각하는가?”

    “그런 무기라면……. 화약 아니겠습니까?”

    “틀렸네.”

    “흠…….”

    장문수는 턱을 어루만졌다.

    다른 서기들도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그때 장자명이 말을 이었다.

    “바로 붓일세.”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군이 내리는 군령에 따라 수만이 죽기도 하고 수만이 살기도 한다네. 그 군령을 무엇으로 내리겠는가?”

    “…….”

    장문수는 할 말을 잃었다.

    말이 되는 듯하면서도 절대 수긍할 수가 없었다.

    장군의 붓과 서생의 붓이 어찌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때 장자명이 피식 웃었다.

    “하하, 그 표정을 보니 아직도 마음을 열지 않았군.”

    “의원님은 마음을 여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아까는 저희처럼 불평을 쏟아 내지 않았습니까?”

    “힘드니 당연하지. 나는 자네들처럼 온실의 화초처럼 편한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네. 물론 천수장에 들어와서는 말이지.”

    “…….”

    “사흘 밤낮을 꼬박 새우고도 뒷간도 못 간 적도 있고 중독된 적혈맹호대를 치료하기 위해서 열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적도 있다네. 그리고…….”

    장자명은 끊임없이 자신의 무용담을 털어놓았다.

    자랑이긴 해도 남들이 듣기에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이 중 거짓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남정가에서는 가주를 치료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뒷간도 가지 못한 채 말이다.

    장운현에서 천독과 마주쳤을 때는 열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음식에 어떤 독이 섞여 있을지 몰라서였다.

    거기에 사천당가는 어떠한가?

    이야기를 털어놓던 장자명은 잠시 말을 멈추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자랑을 늘어놓다 보니 그중 한 가지만 놓고 봐도 강호를 들어다 놨다 하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에 장자명 자신도 있었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재앙을 몰고 다니는 악신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는 곳마다 사건이 끊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물론 한빈이 장자명의 이런 생각을 안다면 억울해할지도 몰랐다.

    한빈이 사건을 몰고 다닌 것이 아니라 그 낌새를 눈치채고 선수를 친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하지만 장자명의 눈에는 한빈이 사건을 몰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한빈에 대한 믿음은 흔들릴 염려가 없었다.

    한빈 덕에 백독곡에서 지낼 때보다 독에 대한 지식이 일취월장했다. 거기에 더해 해박한 치료법은 덤이었다.

    장자명의 표정에 장문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표정을 보니 후회 안 하시는 모양입니다.”

    “팽 공자 덕분에 나는 최고가 되었으니까!”

    “최고라니요?”

    “의원으로서 최고가 되었다네!”

    물론 독 이야기는 뺐다.

    한빈과 같이 있으면서 겪은 경험 하나만은 자신 있었다.

    최고라는 말에 장문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전 중원을 통틀어 장자명, 나보다 환자를 더 많이 치료한 의원은 없을 것이네.”

    장자명이 엄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의 표정에는 뭐라 표현 못 할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대체 어떤 방법을 쓰셨기에…….”

    장문수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꺼져 가던 희망의 불꽃이 다시 타올랐다.

    그 모습에 장자명이 씩 웃었다.

    “자네의 눈이 불꽃 같구먼. 지금 그 눈빛 참 좋아 보이네. 사실 방법이라고 해 봤자 별것 없었네. 팽 공자는 환자를 만드는 데는 탁월하신 분이니까!”

    “환자를 만드신다니, 그게 무슨…….”

    “뭐, 주변 사람들도 팽 공자의 옆에 있으면 환자가 되니 하늘이 내린 환자 제조기가 아니고 뭐겠는가? 어차피 강호의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른다네. 그러니 시간을 기다리게!”

    그 말은 마친 장자명은 자리를 떠났다.

    장자명은 그들의 숙소에서 나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고 나자 서기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망치는 것이 살길이라는 것이 대세였다.

    하지만 장자명의 말 때문에 희망을 본 이도 있었다.

    “그럼 우리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자네는 귀가 막혔는가? 지금 의원이 뭐라 했는가?”

    “막내 공자 때문에 최고가 되었다고 했지.”

    “그게 아니라 마지막 말을 잘 들어 봐야지. 마지막에 분명히 환자 제조기라고 하지 않았나?”

    “그야 그렇지…….”

    “지금 우리도 환자가 아닌가? 의원의 얘기를 들어 보니, 조금도 나아질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군.”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며칠은 두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장문수가 나섰다.

    “잠시만 기다리시게!”

    모두는 대화를 멈추고 장문수를 바라봤다.

    시선이 한곳에 모이자 장문수가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계약서네. 분명히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이 있다고 들었네.”

    “에이, 그런 말 하지 말게. 무리가 누군가? 하북팽가의 서기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그깟 글귀를 놓친다고?”

    서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북팽가는 규모 있는 가문이었다.

    서기가 해야 할 일이 관청의 업무에 버금간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문서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런 그들이 단체로 글귀를 못 볼 리가 없었다.

    장문수는 그들을 무시한 채 자신의 계약서를 꺼냈다.

    그러고는 찬찬히 읽어 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읽던 장문수는 계약서를 떨어뜨렸다.

    툭.

    다른 이들도 자신의 계약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장자명의 말은 사실이었다.

    계약서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생각지도 못한 독소 조항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서기 중 몇은 결심한 듯 눈을 빛냈다.

    장문수도 입술을 잘근 씹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조일순이 뒤쪽에서 나타나 장문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왜 그렇게 인상을 쓰나?”

    “흠, 자네한테만 말하는 건데……. 난 오늘 밤에 여길 탈출하기로 결심했네.”

    장문수가 눈을 빛내자 조일순이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 계약서대로라면 우린 죽네. 아니 죽으라면 죽어야 하네.”

    “탈출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그들의 대화에 서기들이 동요했다.

    장문수와 조일순은 천수장에 들어오기 전까지와 완벽하게 달라졌다.

    이곳까지 끌고 왔던 장문수는 탈출하자고 선동했다.

    처음에 반대했던 조일순은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조일순은 상황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정확한 상태를 말하면 체념한 것이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탈출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곳에 오지 말라고 외친 바로 그 본능이었다.

    * * *

    그날 밤.

    몇 명의 사내들이 까치발을 들고 전각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 선 이는 서기 장문수였다.

    장문수는 뒤쪽을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이제 거의 다 왔네. 조금만 참게나.”

    그들의 발소리는 더욱 은밀해졌다.

    스슥.

    마치 낙엽 스치는 소리와 흡사한 소리가 전각의 사이사이에서 울렸다.

    장문수는 정문에서 한참 떨어진 담장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서기 중 하나가 눈여겨봐 뒀던 담장이였다.

    그 담장에는 운이 좋게 개구멍이 뚫려 있었다.

    담장 아래에 도착한 서기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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