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 천수장에서의 내기 (1)
호기심에 눈을 빛내던 장유중이 표정을 바꾸었다.
그는 한빈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 내기가 끝나고 얻을 보상 때문에 음식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그게 이렇게 설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이긴다면 한빈에게 요청할 것은 딱 하나였다.
그것은 한빈을 그의 후계자로 삼는 것이었다.
한빈을 후계자로 삼을 수만 있다면, 이 나라의 기둥을 엿가락 뽑아내듯 만들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 그들의 앞에 심미호가 다시 나타났다.
심미호가 절벽 쪽을 가리켰다.
“주군, 교육 준비가 다 끝났어요. 어떻게 지금부터 실시할까요?”
“실시.”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네, 알았어요. 주군.”
심미호는 입가에 미소를 피우며 서기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심미호는 서기들을 보며 손뼉을 쳤다.
짝!
내공이 담긴 소리에 서기들의 바싹 긴장했다.
그들의 앞으로 다가간 심미호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받을 교육은 천수장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관문이에요.”
“…….”
“여기에 오시기 전 계약서를 작성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맞죠?”
“네, 맞습니다.”
서기 대표인 조일순이 고개를 끄덕이자 심미호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 계약서 말이에요…….”
심미호가 말끝을 흐리며 조일순을 바라봤다.
그 미소에 조일순은 자신도 모르게 주눅 들었다.
“계, 계약서에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저희도 이곳에 왔을 때 작성한 계약서예요. 저희는 무공을 얻었지만, 여러분들은 학문에서 성취하시길 바라요. 각오는 됐겠죠?”
“네. 각오는 돼 있습니다.”
조일순은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심미호와 적혈맹호대가 이류 무사에서 절정의 무인이 된 것처럼 자신도 변하고 싶었다.
물론 살짝 의심이 들기도 했다.
적혈맹호대가 쓴 계약서와 자신이 쓴 계약서가 같다는 점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들기도 했다.
그때 심미호가 손뼉을 쳤다.
짝.
동시에 서기들의 주변에 적혈맹호대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장삼과 조호를 비롯한 적혈맹호대 무사들이 사람 좋은 얼굴로 서기들의 뒤편에 섰다.
순간 심미호가 외쳤다.
“출발!”
그 지시에 적혈맹호대 무사들이 그들의 소매를 잡고 절벽 쪽으로 이동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기들이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적혈맹호대 무사들이 손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픽. 픽.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서기들의 눈이 커졌다.
적혈맹호대 무사들이 그들의 아혈을 제압한 것이다.
아혈을 제압당한 서기들이 비명을 지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기들은 힘없이 절벽 쪽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멀리서 보고 있던 장유중은 이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서기들이 적혈맹호대의 무사들을 뒤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장유중에게 술잔을 건넸다.
“일단 한 잔 받으시죠.”
“허허, 그럴까나…….”
장유중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호리병을 들었다.
호리병에 든 죽엽청이 시냇물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내렸다.
한빈과 장유중 그리고 유생들이 앉아 있는 정자는 마치 신선들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한참 동안 술을 즐기던 중 양석봉이 한빈에게 다가왔다.
눈빛에는 호기심이 한가득하였다.
양석봉은 조심스럽게 한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는 장유중에게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한빈을 데려갔다.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팽 유생, 내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시지요.”
“왜 그런 내기를 했습니까? 내가 봤을 때는 그건 무조건 질 수밖에 없는 내기입니다.”
“저는 우리 하북팽가의 서기를 믿습니다.”
“허허, 그자들이 성취를 이를 자질을 타고났다면 무림세가의 서기가 되었겠습니까?”
“제가 봤을 때는 잘못된 교육일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교육이라…….”
“누군가 그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제공해 준다면 언제든 향시 정도는 합격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팽 유생 내기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걱정돼서 그럽니다. 장유중 학장님이 이 내기에서 이긴다면 무엇을 요구할 줄 압니까?”
“뭐, 후계자가 되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내기를 했습니까? 팽 유생은 이기면 무엇을 요구하려고 이런…….”
“그건 비밀입니다.”
한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마침 최유지도 술병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최유지도 한빈에게 궁금한 게 많다는 듯 눈매를 좁히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한빈은 선수를 쳤다.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보시지요.”
“하하, 역시 팽 유생은 내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군. 제가 궁금한 건 딱 한 가지입니다. 아까 붉은색 상자에 사람의 내면을 단단하게 해 줄 물건이 들어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랬지요.”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궁금합니까?”
“네, 궁금해서 술이 목으로 안 넘어갈 지경입니다.”
“제 생각인데…….”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곳은 절벽이 있는 곳이었다.
절벽의 너머로는 천수장과 마을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허허롭게 풍경을 보는 한빈의 모습에 최유지가 재촉했다.
“빨리 좀 말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팽 유생.”
“일단 음식부터 먹고 설명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궁금해서 술이 안 넘어간다니까. 왜 그러십니까!”
최유지가 목을 길게 뺐다.
한때는 목에 칼을, 아니 붓을 겨눌 정도로 사이가 안 좋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동료였다.
지금처럼 농담을 건네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사이가 된 것.
한빈이 할 수 없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리 따라오시지요.”
“흠.”
최유지가 헛기침하며 한빈의 뒤를 따랐다.
옆에 있던 양석봉도 궁금하기는 매한가지.
그들이 움직이자 나머지 유생들도 자연스럽게 한빈의 뒤를 따랐다.
절벽이 가까워지자 최유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절벽의 끝에는 정체 모를 말뚝이 박혀 있었고 그 말뚝에는 밧줄이 묶여 있었다.
최유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상자에 든 게 말뚝과 밧줄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상자 안에는 뱀이 들어 있었습니다.”
“뱀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시면서 사신(蛇身)이라는 글자를 확인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럼 뱀의 몸이란 뜻입니까?”
“아닙니다. 뱀의 몸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뜻함입니다.”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최유지가 말끝을 흐렸다.
심미호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유생들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주군, 교육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확인하시겠습니까?”
“좋아. 내 글 친구들에게도 안내해 줘. 심 부대주.”
한빈이 유생을 가리키자 심미호가 화사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다들 이곳으로 오시죠.”
심미호가 씩씩하게 절벽을 향해서 걸어갔다.
그들은 주춤거리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유생들의 걸음은 느려졌다.
심미호는 절벽의 한 치 앞에서 멈췄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딘다면 떨어질 정도였다.
유생들은 떨어질까 두려운지 절벽의 끝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말했다.
“여인인 저도 두렵지 않은데, 뭘 그리 두려워하세요?”
“흠.”
여기저기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심미호의 한마디가 그들의 자존심을 긁은 것.
가장 먼저 절벽의 끝으로 간 것은 최유지였다.
조심스럽게 절벽의 끝으로 간 최유지는 비명을 질렀다.
“앗, 저게 대체!”
그의 비명에 유생들이 뒤로 주춤했다.
하지만, 양석봉만은 서슴없이 앞으로 나왔다.
양석봉은 최유지와의 경쟁에서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적벽의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양석봉도 마찬가지로 비명을 질렀다.
“헉. 저건!”
그도 그럴 것이 절벽에는 공부하러 간 줄 알았던 서기들이 밧줄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유생들은 용기를 내어 절벽의 끝에 다다랐고 양석봉이 목격한 장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인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저게 뭔가?”
“아까 분명히 교육을 받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런데 왜 그들이 저러고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황당한 듯 속삭이고 있을 때 심미호가 말을 이었다.
“우리 주군은 항상 말씀하셨지요!”
“…….”
유생 중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미호의 표정은 그만큼 진지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마른침만을 삼키고 있자 심미호가 설명을 이었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요.”
심미호의 말에 최유지가 고개를 흔들었다.
“건강한 정신이 깃들기 전에 죽을 것 같소이다.”
이건 누가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절벽에서 아래까지는 꽤 높았다.
저기서 떨어진다면 어딘가 부러질 것이 분명했다.
그냥 부러지는 게 아니라 바로 즉사할 정도의 높이였다.
그 말에 심미호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적색 상자에 있는 게 아까 뱀이라고 했죠?”
“그건 들었소이다.”
“저 아래에 풀어 놓은 게 다 뱀이에요. 저 아래로 떨어질 테니까 죽을 리는 없어요.”
“그, 그러니까…….”
“네, 뱀에 물릴 수는 있어도 죽지는 않는다는 거죠.”
“헉. 대체…….”
최유지가 말을 맺지 않고 조심스럽게 아래를 확인했다.
아까는 몰랐는데 지금 바닥에서는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심미호가 말한 뱀인 것 같았다.
적어도 수천 마리는 풀어 놓은 것 같았다.
그때 한빈이 심미호에게 물었다.
“심 부대주, 독사는 다 뺐지?”
“최선을 다해서 걸러냈어요. 그런데 몇 마리를 섞여 있을 수도 있고요…….”
심미호가 말끝을 흐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최유지는 서기들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독사라는 말에 손등에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주고 있다.
최유지는 더욱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밧줄에 매달려 있는 것은 서기들만이 아니었다.
옆에 밧줄에서는 적혈맹호대의 무사들이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적혈맹호대의 무사들은 이런 훈련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 손으로는 밧줄을 잡고 있었고 한 손으로는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어찌나 능숙해 보이는지 적혈맹호대 무사들이 잡은 밧줄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안정적으로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서책을 들고 있고 서기들은 밧줄에 매달려 뭔가를 외우고 있었던 것.
최유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책은 무엇입니까?”
“논어입니다.”
“저 상황에서 사서삼경을…….”
“우리 주군은 항상 말씀하셨어요. 목숨이 위태로울 때 진정한 실력이 나온다고요.”
심미호는 말을 마친 후 한빈을 바라봤다.
최유지를 비롯한 유생들은 그 뒤로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심미호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한빈의 미소가 너무 묘했기에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빈은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밧줄에 매달려 있는 서기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