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 외유내강(外柔內剛) (4)
모두가 전각 안으로 자리를 옮긴 상황.
전각 안으로 들어가려던 장문수는 허전함을 느꼈다.
친우인 조일순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문수는 본능적으로 밖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조일순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거대한 호롱불이 보름달처럼 비추고는 있지만, 혼자 남아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장문수는 재빨리 친우에게 뛰어갔다.
“대체 자네는 아까부터 왜 그러는가?”
“…….”
조일순은 넋이 나간 것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문이 점점 쌓여 가던 장문수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푹.
조금 강하게 찔렀지만, 반응은 미미했다.
미간을 좁힌 장문수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친우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제야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넋이 나간 듯 고개만 들어 올린 조일순의 모습에, 장문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장문수가 보기에는 아까부터 그의 행동이 이상했다.
모두가 희열에 떨며 사제 계약서에 흥분하고 있을 때, 오직 조일순만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은 아예 점혈이라도 당한 것처럼 저러고 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마치 주화입마에라도 든 것처럼 보였다.
그때 조일순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공자님께서 내게 전음을 보내왔네.”
“전음이라고? 대체 뭐라고 하셨는가?”
“낙장불입(落張不入)이라고 하셨네!”
“낙장불입이라…….”
장문수가 눈을 크게 떴다.
낙장불입이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해석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순간 장문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야 조일순의 상태가 이해가 갔다.
조일순은 분명히 학문적 깨달음이 될 화두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화두란 무엇인가?
수행을 위해 실마리가 될 단어를 던지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불교나 도교뿐 아니라 학문적 수행에서도 중요하다.
낙장불입이란 말을 깨닫게 된다면?
무림인들이 말하는 환골탈태를 이루게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환골탈태란 학문적인 뼈대가 바뀌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화두를 받았으니 친우인 조일순이 끝없는 사색에 잠기는 것은 당연했다.
“허허, 어찌 자네에게만 화두를 주셨다는 말인가? 막내 공자님, 아니 스승께서 자네를 어여삐 여기시나 보군.”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네. 자네의 사색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그리고 알려 줘서 고맙네. 내 안에 들어가서 이 말을 조용히 전하겠네.”
장문수는 흥분한 얼굴로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멀어져 가는 장문수의 모습에, 조일순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정신 차린 조일순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가 즐거워하는 가운데, 자신만이 두려움이 떨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는 낙장불입을 한번 맺은 계약은 무를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장문수의 말대로 깨달음을 위한 화두일 수도 있었다.
* * *
이틀 후.
한빈 일행은 다시 천수장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장유중을 비롯한 유생 무리도 한빈을 따라 이곳에 왔다.
물론 한빈과 계약을 맺은 파견 서기들도 왔다.
마을 어귀에 들어선 서기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기억하던 마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기들은 마을에 들어서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장문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변을 가리켰다.
“이 마을이 이렇게 번성했던가?”
“그러게 말이네…….”
조일순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마을을 둘러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이 이렇게 변할 수는 없었다.
조일순도 이 마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작물도 자라지 못하는 토양 덕분에 이곳은 죽음의 땅이라 불리기도 했다.
덕분에 이곳에는 관리조차 배치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생기가 돌고 있다. 아니 생기가 도는 정도가 아니었다.
마을 어귀부터 시작해서 점포들이 쭉 늘어서 있으며 사람들이 저잣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기에 사람들의 얼굴도 보기 좋아 보였다.
사람들은 가게 앞에서 밝은 얼굴로 물건값을 흥정하고 있었다.
흥정하는 주민이나 가게 주인 모두 차림새가 말끔한 것이, 경제가 제법 자리가 잡혔음을 짐작게 했다.
서기들이 한빈의 뒤를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흥정하던 마을 사람과 가게 주인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순간 서기들은 발길을 멈춰야 했다.
주민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두운 밤에 달빛을 받은 짐승의 눈처럼 번뜩이며 한빈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광기가 가득 찬 눈빛이었다.
서기들은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친 듯 눈을 번뜩이는 주민들이 천천히 발길을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주민들이 갑자기 한빈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타다닥.
한두 명도 아니고 가게 주인까지 모두 한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눈빛은 광신도.
걸음걸이는 좀비 같은 느낌이었다.
그 모습에 서기들이 기겁했다.
그중 조일순이 소리쳤다.
“일단 자리를 피하게!”
“그러는 게 좋겠군.”
다른 서기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민들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느라 남아 있던 서기들도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인원은 더욱 늘어났다.
뒤쪽에서는 희뿌연 먼지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조일순은 하북에 살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가장 궁금한 것은 무슨 원한이기에 이렇게 광기 어린 눈빛으로 다가오느냐였다.
“대체 막내 공자님은 저들과 무슨 원한을…….”
조일순은 말을 맺지 못했다
먼지를 피워 내며 걸어오는 자들 사이에 조그만 신형 하나가 툭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체구로 봐서는 아이가 분명했다.
그 아이의 손에는 뾰족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일순이 외쳤다.
“자객이다!”
그 외침과 동시에 설화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설화가 바라본 곳은 조그만 아이가 아니라 조일순 쪽이었다.
“자객이 어디 있어요?”
“저, 저기……. 네 앞에…….”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를 가리키는 조일순에게 설화는 시선을 뗐다.
그러고는 황당하다는 듯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소군보다도 어려 보였다.
아기자기한 조그만 얼굴에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자아이였다.
설화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저 아저씨가 너보고 자객이라는데?”
“제, 제가요?”
여자아이가 당황한 듯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자 설화가 답했다.
“오해 맞지?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건 나한테 주려고 가져온 거야?”
“네, 언니한테 주려고 가져왔어요.”
여자아이는 손에 든 당과를 내밀다가 멈췄다.
“왜? 나 주려고 가져왔다면서?”
“그런데, 먼지가 묻어서…….”
“괜찮아, 그냥 줘.”
설화가 당과를 받아 들고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활짝 웃으며 주민들의 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다가온 주민들이 한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촌장으로 보이는 나이 든 주민이 앞으로 나오더니 이번에는 포권지례를 올렸다.
무림인이 아닌데도 무림의 예를 취한 것.
한빈을 따라 같이 온 유생과 서기들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였다.
촌장이 말했다.
“장주님! 어째서 지금에서야 오십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촌장.”
“그, 그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장주님을 보고 싶다고 해서…….”
촌장이 뒤를 돌아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말에 한빈이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제가 뭐라고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아, 아닙니다. 장주님, 아니 신의님이야말로 저희의 은인이십니다.”
“손님이 같이 오는 바람에 이야기는 다음에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제가 주책을 부렸군요. 죄송합니다, 장주님.”
촌장은 허리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자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손짓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힘을 내지요. 다들 다시 출발하시죠.”
한빈이 유생들에게 외치자 다시 행렬이 움직였다.
뒤쪽에서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조일순은 그제야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광기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던 눈빛은 존경의 시선이었다.
자객이라 생각했던 아이는 평범한 여자아이였고 말이다.
설화와 아이의 대화를 들어 보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이를 설화를 무척 따르는 것이 분명했다.
설화가 너무 좋은 나머지 자기가 먹던 먼지 묻은 당과까지 내민 것을 조일순은 암습이라 생각했던 것.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조일순의 등을 장문수가 토닥였다.
“자네는 믿음이 부족하군.”
“아, 부끄럽네. 그런데 자네도 놀라지 않았나?”
“사람들이 저리 몰려오는데 놀라지 않고 어찌 배기나? 그래도 막내 공자님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네.”
장문수의 말이 끝나자 나머지 서기들도 조일순을 타박했다.
“허허, 이 정도로 마을 사람들에게 신망을 얻은 공자님이 있던가?”
“암, 없지, 없어! 십대세가의 어떤 공자도 이런 신망을 마을 사람들에게 얻었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네.”
“역시 우리의 선택이 옳았어.”
그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빈을 칭찬했다.
그 칭찬은 일각이 넘게 이어졌다,
이제는 저잣거리를 완전히 지나쳤다.
앞쪽으로는 잘 관리된 길이 일자로 쭉 뻗어 있었다.
뒤쪽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던 조일순이 조심스럽게 장문수를 바라봤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
“우리 공자님이 이곳에 따로 마련하신 거처의 이름이 천수장이라고 들었네.”
“그런데 이 길을 지나가면 저 위쪽에는 귀국장이 있지 않았나?”
“귀국장이라……. 들어 보긴 했군.”
“밤만 되면 귀곡성을 토해 낸다는 장원 말이네. 요즘 들어서 소식이 뜸하긴 한데…….”
조일순은 말끝을 흐렸다.
한빈이 향하는 곳은 분명히 귀곡장이 맞았기 때문이다.
이쯤 되자 조일순의 머릿속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천수장과 귀곡장이 같은 곳은 아니겠지?”
“설마…….”
장문수가 고개를 갸웃할 때, 앞쪽에서 무사들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터벅터벅.
내공이 실린 발소리에 모든 서기뿐 아니라 유생들도 고개를 돌렸다.
복장으로 봐서는 분명 적혈맹호대였다.
순간 장유중이 감탄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장유중의 옆에 있던 양석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물음에 장유중이 눈을 빛냈다.
“저들이 가장 놀라운 것은 십여 명의 발소리가 마치 한 명의 발소리처럼 들린다는 점이네. 금의위나 황군들에게도 보지 못할 군기네.”
“아, 그렇군요.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들의 대화에 다른 유생들도 입을 벌렸다.
장유중의 말대로였다.
황군이라면 모르겠지만, 일개 무림세가의 무력대에서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림인들은 보통 자유를 추구하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같은 조직에 있더라도 무공의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이렇게 똑같이 걸음을 맞춘다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완벽한 신뢰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유생들은 한빈을 조용히 바라봤다.
적혈맹호대는 한빈과 장유중 일행을 호위해서 천수장 앞까지 안내했다.
기강 잡힌 적혈맹호대의 모습은 서기들을 살짝 주눅 들게 만들었다.
세가 내에서 보던 적혈맹호대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각 잡힌 분위기에 서기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대화를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