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 외유내강(外柔內剛) (3)
사실 다른 조항도 사악하긴 했으나 그리 눈길이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탈출 금지라니!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조항이었다.
사실 세가의 서기들은 무사들과 달랐다.
무사들이야 가문의 무공을 익혔다는 것 때문에 심심치 않게 무림세가에 발목이 잡히는 예도 있다.
일정 수준 그 가문의 무공을 익힌 무사는 무림세가의 무공을 유출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정 직급 이상의 무사는 가주의 허락이 있어야 무림세가에서 나갈 수 있다.
반면 서기들은 무사와 달리 무림세가에서 퇴직이 자유롭다.
퇴직도 자유로운 서기가 탈출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이건 무림세가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배움을 청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가르침을 겸허히 받겠다는 약속으로 계약서를 썼을 뿐이다.
그런데 사악한 조항들이 줄기줄기 얽혀 있다.
여기까지 생각한 조일순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묘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마치 전설 속 인면지주가 거미줄로 온몸을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조일순은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그러고는 심호흡한 뒤 다시 다른 서기들을 살폈다.
다른 서기들도 모두 의아한 듯 몇 번이고 계약서를 살폈다.
그냥 의아하다고 생각할 뿐, 조일순만큼 불안해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서기 중 몇은 탈출 금지 조항을 놓고 피식 웃고 있었다.
“탈출 금지라니?”
“그러게 말이네. 배움을 청하러 온 우리가 왜 탈출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아래 조항은 뭔가?”
“허허, 재미난 조항이 많구먼.”
그들은 장난스럽게 계약서를 살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던 서기들이 피식 웃으며 계약서를 가리킨다.
누군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마치…….”
“왜 그러나?”
“자세히 보니 노예 계약서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에이, 착각이겠지. 그렇게 열심히 배우라는 뜻으로 적으셨겠지. 설마 진짜 여기 나와 있는 계약서를 적용하시겠나? 여기가 어딘가?”
“어디긴, 하북팽가지.”
“맞네, 맞아. 하북팽가면 강북 정파의 기둥이 아닌가?”
“그렇지. 당연한 말을 왜 그렇게 진지하게 하나?”
“그러니 하는 말일세. 하북팽가가 정파이니 이 계약서는 믿어도 된다는 말일세. 설마 이 내용을 모두 지키라고 적으셨겠나? 이걸 전부 지키라고 한다면 사파도 울고 가겠지. 안 그런가?”
“허허, 맞네그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장유중이 있는 곳을 힐끔 봤다.
그들의 시선을 받은 장유중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기들이 다시 속삭였다.
“저걸 보게. 우리 막내 공자님은 장유중 어르신이 보증하는 사람이네. 우리 믿고 따르세.”
“그 말이 맞네. 막내 공자님을 못 믿는 건 하북팽가, 아니 정파 전체에 대한 배신일세.”
서기들은 계약서에서 눈을 뗐다.
그들은 계약서를 소중히 접어 품속에 넣었다.
물론 조일순만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자신이 의심이 많은 건지?
다른 서기들이 멍청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조일순은 다시 계약서를 살펴봤다.
마지막까지 읽어 본 조일순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건 탈출 불가가 문제가 아니었다.
죽어도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었다.
글공부하다 죽는다는 건은 금시초문.
조일순의 불길함은 배가되었다.
거기에 더해 한빈이 말한 만류귀종이란 말을 그제야 이해했다.
계약서마다 모든 내용은 똑같았다.
그들이 서명한 계약서는 동일하게 악랄했으니까.
불안감을 느낀 조일순이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자신의 친우인 장문수가 있는 쪽이었다.
장문수는 이미 한빈의 사람이 된 듯 설화의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조일순은 자신도 모르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계약서의 내용을 읽어 봤냐는 말이었다.
친우의 입 모양을 본 장문수가 입 모양으로 답했다.
스승을 안 믿으면 누굴 믿느냐는 답이었다.
조일순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 조일순은 이 계약에서 벗어나는 것이 살길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제까지 친우인 장문수의 뒤를 따라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만은 아니었다.
지금만은 발을 빼야 한다고 본능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조일순은 황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가주 팽강위였다.
조일순은 재빨리 가주 팽강위의 앞에 다가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가주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허허, 말해 보게.”
팽강위가 다급히 뛰어온 조일순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일순은 최대한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하오나, 저희 서기가 모두 자리를 비우고 사 공자에게 배움을 청한다면 하북팽가의 문서는 누가 관리하겠습니까?”
이것은 누가 봐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었다.
조일순이 다급하게 떠올린 것은 이곳에 모인 서기의 수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었다.
조일순은 한빈과 서기 전체의 계약을 모두 무로 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만이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건의했을 뿐이었다.
가주 팽강위도 그의 말이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헛기침한 가주 팽강위가 한빈을 바라봤다.
팽강위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한빈이 포권했다.
“거기에는 대책이 있습니다.”
“무슨 대책이냐?”
“적혈맹호대의 대원 중 문서 관리에 능통한 자를 파견하겠습니다. 대신 저와 계약한 서기는 천수장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오호, 적혈맹호대 대원 중 서기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들이 그렇게 많더냐?”
“물론입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팽강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솔잎으로 쌀밥을 짓는다고 해도 믿을 한빈이었지만, 조금 과장이 심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팽강위가 의심의 눈초리로 한빈을 바라보자, 설화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갑자기 달려온 설화를 본 팽강위가 물었다.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느냐?”
“다른 게 아니라, 제가 공자님한테 글을 배운 게 불과 이 년도 안 됐거든요.”
“이 년이라…….”
팽강위가 말끝을 흐리며 장유중을 바라봤다.
이 년도 안 됐는데 장유중에게 인정받는 수준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그때 청화도 어느새 나타나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저는 일 년밖에 안 됐어요.”
청화를 이어 소군도 말했다.
“저는 석 달밖에 안 됐어요. 공자님께 배우면 그 속담대로 될 수 있어요.”
“무슨 속담이더냐?”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소군이 말했다.
“서당 개 석 달이면 사서삼경을 읊는다는 속담이요.”
“허허, 뭔가 이상하지만, 네 말을 믿으마.”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서기들은 더욱 눈을 빛냈다.
생각해 보니 설화와 청화의 말이 맞았다.
가문에서 가끔 마주치던 설화와 청화는 백치미가 느껴질 정도로 학문과는 담을 쌓은 아이였다.
그런데 단기간에 유림 서원의 유생들과 문장을 겨룰 정도의 수준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 팽강위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
“…….”
서기들을 비롯한 식솔들은 아무 말 없이 가주 팽강위에게 예를 취했다.
경청하겠다는 뜻이었다.
모두를 확인한 가주 팽강위가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청화는 사천당가의 사람이다. 그리고 설화도 독왕 당무천 어르신의 양손녀이니, 너희가 무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팽강위는 사천당가로부터 온 전서구를 통해서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문 내에 따로 알리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모두가 알게 될 사항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빈이 하북팽가에 머물지 않고 바로 떠나는 바람에 청화와 설화의 신분을 아는 식솔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 상황을 보니 누군가 실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로와 각주 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가문 내의 식솔들은 설화와 청화의 신분을 단순한 시비로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실수라도 한다면?
이것은 가문 내 문제가 아니라, 사천당가와의 문제로 커질 가능성이 있었다.
팽강위의 선언에 갑자기 서기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몇몇 서기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도 했다.
청화와 허물없이 지내던 장문수조차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의 놀라움은 점점 더 퍼져 나갔다.
그 놀라움이 퍼져 나간 것은 유생들이 있는 자리였다.
그중 양석봉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봤다.
최유지나 홍금호도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유생들도 설화나 청화와 있었던 그동안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것도 잠시, 유생 모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착각이 아니라 누가 봐도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유생들 대부분이 무림 문파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관무불가침이라는 암묵적인 규칙 때문이다.
하지만 사천당가라면 다르다.
아무도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가 관 속에 들어가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사천당가였으니까.
가장 떨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한빈과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양석봉이었다.
한빈과 가장 먼저 만난 데다 자신의 호위를 설화와 대결하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거기에 여태껏 한빈의 시비라고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양석봉은 가문을 떠나오기 전에 그의 아비에게 한 가지 당부를 받았다.
절대 사천당가와는 엮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천당가와 엮인 것도 모자라 아무것도 모르고 설화와 청화를 무시하기까지 했다.
양석봉은 자신의 심장과 배를 만져 봤다.
혹시라도 중독 중상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런 행동은 양석봉만이 한 것은 아니었다.
유생 모두가 두려움 속에 기억을 더듬었다.
그들의 모습을 팽강위가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하며 장유중을 바라봤다.
“유생들의 표정이 이상합니다.”
“허허, 날씨가 추워서 그런 것 같으니 가주님은 신경 안 쓰셔도 되겠습니다. 이 정도 추위에 떤다면 어찌 글을 공부하는 사내대장부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장유중의 말에 팽강위가 활짝 웃었다.
“역시 문이나 무나 교육 방침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제 구경은 끝난 것 같으니, 들어가셔서 준비된 음식을 즐기시지요.”
“좋습니다, 가주.”
장유중이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남은 것은 한빈 일행과 서기들밖에 없었다.
조일순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사천당가의 직계가 한빈의 옆에 있다고 생각하자 그들의 믿음은 더욱 커졌다.
그때 조일순이 한빈에게 다가와 포권했다.
“공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계약서를 물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의 일을 내팽개치고 천수장에서 학문을 공부한다는 게 왠지 마음이 꺼려집니다.”
“하하, 우리 조 서기는 항상 정직해서 마음에 들어. 책임감 문제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냥 파견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오면 된다네.”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답했다.
그 미소에 조일순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한빈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전음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빈은 연회가 열리는 전각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기들도 계약서를 소중히 품에 안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오직 조일순만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석상이 된 것처럼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