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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37화 (523/621)

537. 외유내강(外柔內剛) (2)

설화가 신난 듯 팔까지 빙빙 돌리며 몸을 풀고 있다.

어느새 청화도 팔을 걷어붙이고 한빈의 옆에 섰다.

소군이 따라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기들은 줄을 서서 계약서를 들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빈이 눈앞에 놓인 계약서 중 고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장문수 다음으로 서명하려는 서기의 눈동자는 정신없이 돌아갔다.

그는 이 계약이 선착순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계약했던 장문수가 좋은 조건으로 계약했다는 것은 누가 봐도 뻔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다음으로 좋은 계약을 골라야 했다.

덕분에 뒤에 있던 서기들은 불만을 쏟아 냈다.

“거, 빨리 좀 끝내시게.”

“그렇게 계속 계약서만 쳐다보다가 날 새우겠네.”

“아, 나도 빨리 배움을 청하고 싶은데…….”

그들의 불만 섞인 소리에 한빈이 턱짓했다.

순간 설화와 청화가 옆쪽에 있던 탁자를 들고 왔다.

“잠시만요, 서기 아저씨들!”

설화의 말에 서기들은 잠시 뒤쪽으로 물러났다.

설화가 탁자를 붙여 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이어서 청화도 나란히 탁자를 붙여 놨다.

소군도 낑낑거리면서 탁자를 들고 와 나란히 붙여 놨다.

네 개의 커다란 탁자가 나란히 놓이자, 한빈이 말했다.

“자, 이제 다들 모이시지요.”

한빈이 탁자를 가리켰다.

서기들이 재빨리 탁자를 둘러싸고 계약서를 바라봤다.

한빈의 명이 떨어지면 계약서를 집어 들 표정이었다.

그때 첫 번째로 줄은 선 서기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까는 줄을 서라고 해서 저는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순서였는데…….”

서기는 억울하다는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의 이름인 조일순.

중급 서기 장문수의 친구였다.

조일순이 가장 먼저 줄을 선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보기에 장문수는 절대 손해 보는 짓을 하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뭘 하든 장문수의 뒤를 따라가면 중간 이상은 갔다.

조일순이 보기에 장문수는 천재였다.

그런 그가 향시에 번번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조일순은 향시에도 응시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 하북팽가에서 서기를 채용할 때는 같이 묻어 들어왔다는 점이었다.

그는 장문수의 옆에 딱 붙어 일하면서 중급 서기까지 올랐다.

관리에 대한 꿈은 있었지만, 조일순은 현실에 만족했다.

하지만 장문수가 움직인 순간,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장문수가 움직이면 따라가야 하는 것이 그의 본능이었다.

그런데 장문수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빈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여기에서 끝났다면 조일순이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그냥 사제 관계가 아니라 계약을 원했다.

전에 홍칠개와 사제 계약서를 썼다고 했을 때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런데 장문수가 계약서에 서명하자 조일순도 마음이 급해져서 부리나케 뛰어온 것.

장문수 다음으로 좋은 조건을 고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한빈이 순서에 상관없이 서기들을 다 모아 놨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일순의 표정을 본 한빈이 웃었다.

“순서는 상관없습니다. 모두 모여서 상의하면 결론도 빨리 나올 게 아닙니까?”

“그래도 제가 가장 먼저 왔는데…….”

“가장 먼저 고르게 해 드릴 겁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같이 모여서 보면 제가 어떻게 가장 조건이 좋은 계약서를 고릅니까?”

조일순이 고개를 갸웃하며 탁자에 놓인 계약서를 가리켰다.

그들의 모습은 멀리서 구경하던 장유중과 유생들의 이목을 끌 만했다.

그들 중 양석봉이 힐끔 최유지를 바라봤다.

“나는 궁금해서 도저히 못 참겠네.”

“나도 궁금하네.”

최유지도 전각을 빠져나가려는 듯 주변의 눈치를 봤다.

모든 유생이 마찬가지였다.

사제 계약서라니?

이건 듣도 보도 못한 계약서였다.

한빈이 계약서를 좋아하는 것은 유생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한빈과 계약서를 한 번쯤은 써 본 이들이었다.

하지만 사제 계약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기에 처음에는 줄을 서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모두를 모아 놓고 계약서를 펼쳤다.

당연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장유중이 그들을 쏘아봤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저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양석봉이 작게 고개 숙이며 답했다.

장유중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뭐가 그리 궁금하더냐? 이건 하북팽가의 일이다. 그러니 너희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참견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구경만 하겠습니다. 저 불만을 잠재우는 과정을 보는 것은 관리로서의 이목을 기르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허허, 이것 참…….”

그때 최유지도 나섰다.

“저도 궁금합니다.”

“너도 양 유생과 같은 것이 궁금하더냐?”

“아닙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저 계약서의 내용입니다.”

“허허.”

장유중이 슬며시 웃었다.

진심이 묻어 나오는 웃음이었다. 장유중도 한빈이 가지고 있는 계약서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제 계약서란 것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팽강위와의 대화를 통해서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방금 들었었다.

하지만 계약서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장유중이 힐끔 팽강위를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팽강위가 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잠시 저희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가주.”

“얼마든지요. 제 아이가 조금 별난 곳이 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별나다니요? 저는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허허”

장유중이 활짝 웃으며 유생들을 향해서 턱짓했다.

허락하겠다는 표시였다.

그 모습에 유생들이 한빈과 서기가 있는 곳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장유중도 수염을 쓸어내리며 발걸음을 뗐다.

물론 다른 이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팽강위도 저 광경이 궁금하기만 했다.

팽강위가 궁금해하는 것은 저 서기들을 어떻게 다룰까 하는 점이었다.

사실 팽강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빈을 소가주에 놓고 첫째 팽혁빈과 저울질했었다.

하지만 한빈과 독대한 후, 팽강위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 이유는 한빈이 가주라는 자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팽강위는 한빈을 미래의 집법당주로 점찍었다.

팽강위가 물러나고 나면 지금 집법당주인 팽대위도 손을 놓으려 할 것이다.

그때는 집법당주 자리가 공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한빈이었다.

문제는 한빈이 팽대위만큼 가문의 식솔을 장악할 수 있느냐였다.

한빈의 무공은 인정하지만, 가문의 식솔들에게 신임을 얻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지금 집법당주인 팽대위는 머리보다는 힘으로 가문의 식솔을 아우르고 있었다.

험악한 인상과 어깨에 걸쳐 멘 거도만으로도 집법당주로서의 권위는 충분했다.

하지만 한빈은 달랐다.

누가 봐도 여리게만 보였다. 팽강위가 보기에 한빈은 힘보다는 머리로 가문의 식솔들에게 인정받아야 할 것 같았다.

팽강위는 한빈이 가문의 식솔들을 장악하는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이번 일이 한빈이 식솔들의 신임을 얻는 그 전초전이라고 봤다.

모든 것이 우연일까?

우연일 리는 없었다.

팽강위는 지금의 일이 기특하기만 했다.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알고 저런 상황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한빈이 자신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이 확실했다.

한빈의 주변은 전보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한빈은 그들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기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서로 논의해서 조건을 검토하다 보면 빠르게 순서가 정해질 거 아닙니까?”

“그런데 순서가 이렇게 섞였는데 어떻게 구분합니까?”

그는 억울하다는 듯 주변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계약을 위해 줄을 섰던 서생들은 모두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저는 기억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배움을 청하겠다는 사람이 스승의 말을 못 믿는다면 과연?”

한빈이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이 눈을 빛내자 그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한빈의 눈빛에서 단호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서기들도 대화를 멈췄다.

기세를 피워 내지 않았지만, 그에 버금가는 분위기가 서기들을 덮쳤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이 빙긋 웃으며 턱짓했다.

신호를 받은 설화가 외쳤다.

“지금부터 딱 열 셀 거예요! 그때까지 서명하지 않으시면 제자는 장 서기님만 받고 끝낼 거예요. 하나…….”

설화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서기들은 깜짝 놀라 붓을 들었다.

쓱쓱.

수많은 붓이 동시에 종이 위를 누볐다.

이것은 본능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계약서를 확인도 하지 않고 서명한 것이다.

그들이 서명한 계약서 중 한 부를 설화가 정성스럽게 걷어 갔다.

이제 그들의 앞에는 한 부의 계약서만 썰렁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 첫 번째 순서였던 조일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뭔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한빈이 웃었다.

“계약서를 썼으니 이제 스승으로서 편하게 말하겠네. 자네는 왜 그렇게 보는가?”

말투가 변했다.

하지만 그 말투는 어느 때보다 자연스러웠다.

조일순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게 첫 번째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순서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가 첫 번째고 그다음은…….”

한빈은 아까 줄을 선 서기의 이름을 순서대로 읊어 나갔다.

순간 조일순의 눈이 커졌다.

물론 그들을 구경하고 있던 장유중과 유생들이 눈도 커졌다.

짧은 시간에 모두의 순서를 기억한 것이 신기했다.

그때였다.

서기 하나가 물었다.

“그 순서를 어떻게 증명하십니까?”

“자네의 소매를 보게.”

한빈이 서기의 소매를 가리켰다.

조일순도 자신의 소매를 확인했다.

그의 소매에는 일(一)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어떻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기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맷자락에 붓으로 순서를 적어 놓다니!

누가 적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실 한빈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설화는 어깨를 딱 펴고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자랑하려는 모습이었다.

한빈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이 수습되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순서는 중요하지 않았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만류귀종.”

한빈은 짧게 한 글자 한 글자에 방점을 찍어 가며 말했다.

조일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모든 계약서의 뿌리는 하나인 것을 어찌 모르는가? 이 계약서가 첫 번째 수업이네.”

“그, 그게 무슨…….”

“지금부터라도 자신이 서명한 계약서를 자세히 읽어 보게.”

한빈의 말에 조일순은 서명하고 남아 있는 자신의 계약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머지 서기들도 계약서의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계약서를 살펴본 이들은 하나같이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 불공정한 계약은 처음 봤다.

제자의 임무만 있고 권한이란 조금도 없었다.

거기에 탈출 금지 조항은 왜 계약서에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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