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36화 (522/621)

536. 외유내강(外柔內剛) (1)

장유중이 한빈에게 털어놓은 사실은 간단했다.

장유중이 하북팽가까지 온 이유는 한빈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어릴 때 헤어진 동생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최근 가문을 나간 동생의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의 동생이 오래전 정착한 곳이 하북 지역이라고 했다.

당시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장유중은 회상하듯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이 가문에서 나간 이유가 장유중 때문이라고 했다.

동생은 가문 내에서 장유중과 비교당하기 싫다며 가문을 나간 것.

가문을 빠져나가는 동생을 봤지만, 장유중은 동생을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세상에 나가 뜻을 펼쳐 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생이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때 가지 말라는 한마디만 했어도 장유중은 이렇게까지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빈에게 털어놨다.

동생이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장유중은 생각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장유중이 하북까지 오며 한빈에게 한 말이었다.

장유중은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것은 한빈이 처음이라고 했다.

장유중은 동생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동생의 흔적이라도 보고 싶다고 그는 밝혔다.

여기까지가 장유중의 이야기였다.

재미있는 것은 장문수의 이야기 역시 이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장문수의 아비는 학문적 견해가 달라서 가문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때 누구도 장문수의 아비를 잡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세상에 나가 뜻을 펼쳐 보라 부추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장문수의 아비는 하북 지역에 흘러들어 조그만 서당을 하고 있었던 것.

거기에 성씨도 같지 않은가?

한빈은 그들의 이야기와 용린검법이 준 단서들을 곱씹어 봤다.

용린검법은 인연을 찾는 것이 구결 획득의 방법이라고 했다.

한빈은 단순한 구결 획득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장문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더 중요한 계획이 있었다.

바로 ‘지(智)’의 구결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지금 획득한 지의 구결은 모두 쉰 개였다.

중원의 인재가 모두 모인다는 유림 서원에서 마흔 개만 손에 넣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지의 구결을 한계까지 채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한빈은 지의 구결을 획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만드는 것이다.

한빈은 이미 적혈맹호대가 수련을 통해서 강해지면서 구결이 생겨나는 것을 봐 왔다.

적혈맹호대를 통해 초식의 기본이 되는 구결을 적잖게 획득했었다.

그렇다면 장문수나 나머지 서기들도 학문에 집중한다면 지의 구결이 추가로 더 생겨날 수 있을지 몰랐다.

물론 장문수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학문에 뜻을 한 번이라도 뒀던 자라면 분명히 지금의 미끼를 물 터였다.

이것이 한빈이 노리는 점이었다.

물론 시간은 넉넉했다.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백경과의 싸움을 위해서는 먼저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기다리면 되었다.

그동안 한빈은 용린검법을 확실하게 완성해야 했다.

만약 용린검법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채 평생 눈치만 보고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한빈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장문수를 바라봤다.

그 눈빛만으로 장문수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한빈의 눈빛은 마치 거대한 바위 위에 우뚝 선 호랑이의 눈빛 같았다.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장문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한빈의 주변 사람들은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설화는 앞에 놓은 음식을 뒤로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사-삭.

설화가 바닥 쓰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지자, 한빈은 조용히 장문수를 불렀다.

“장 서기님은 잠깐 따라오시죠.”

“네, 공자님.”

장문수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한빈은 연회가 열리는 전각을 빠져나왔다.

터벅터벅.

한빈의 발소리는 오늘따라 웅장하게 울렸다.

마치 일부러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는 듯했다.

이렇게 시선을 끌었는데 사람들이 한빈을 못 볼 리 없었다.

술잔을 들려 했던 사람들의 고개가 점점 돌아갔다.

그들은 말없이 한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상석에 앉아 있던 가주 팽강위가 고개를 돌리자 장유중이 눈짓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그러는 게 좋겠군요.”

가주 팽강위와 장유중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한빈은 멀리 가지 않았다.

그가 자리한 것은 연회가 열리는 전각의 앞마당이었다.

전각의 앞마당에는 빈 탁자가 몇 개 있었다.

연회가 열리는 이곳 전각 앞에 항상 배치되어 있는 곳으로, 연회를 준비하는 일꾼들이 쉴 수 있도록 구석에 마련된 자리였다.

평소 같으면 어두컴컴해서 얼굴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오늘 열리는 연회 덕분에 앞마당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마치 보름달이 수십 개는 떠 있는 듯 커다란 호롱불이 두꺼운 줄에 매달려 있었다.

호롱불은 마치 수십 개의 보름달처럼 보이기도 했고 사람의 눈처럼 보이기도 했다.

장문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한빈을 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전각 안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한빈에게 집중된 것은 당연했다.

모두가 한빈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평온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팽강위도 눈매를 좁혔다.

그 옆에 있던 장유중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이 손가락을 튕기면 꼭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한빈은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장문수를 바라봤다.

장문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를 제자로 들이시는 게 싫으십니까? 공자님.”

“…….”

한빈은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장문수를 바라볼 뿐이다.

장문수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빈이 자신을 망신 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장문수의 판단에는 근거가 충분했다.

그가 한빈을 인정한 것은 몇 시진 전이였다.

그 전에는 한빈의 험담을 입에 달고 살던 그였다.

그러니 벌을 내린다면, 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장문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는 결심이 섰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벌을 받고 제자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할 작정이었다.

장문수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죗값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제자로…….”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십니까? 장 서기님.”

“그게…….”

장문수는 말을 맺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신형 하나가 옆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헉!”

장문수가 놀라 뒤로 물러났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질 뻔했다.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 넘어지려는 장문수를 재빨리 잡았다.

덕분에 장문수는 뒤로 넘어지는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자리에 앉아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야, 기척을 드러내라고 하지 않았느냐?”

“공자님, 이게 버릇이 돼서 고쳐지지가 않아요. 헤헤.”

설화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도 잠시, 설화는 진지한 표정으로 보따리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장문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장 서기 아저씨.”

“정말 깜짝 놀랐다. 소리 없이 나타나서 나는 네가 귀신인 줄 알았다. 간 떨어질 뻔했다.”

장문수가 설화를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화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장 서기 아저씨는 절대 간 떨어지면 안 돼요. 저번에 얻어먹은 당과도 있는데……. 이건 배은망덕이죠, 헤헤.”

“그래, 놀라지 않으마.”

장문수가 손을 휘휘 내젓자, 한빈이 재미있다는 듯 설화를 바라봤다.

“달빛도 그렇고 네 무복도 그렇고 착각하기에 딱 좋지.”

“아, 공자님까지 놀리면 어떻게 해요?”

“농담은 이쯤 해서 그만두고 일단 가져온 계약서를 펼쳐 봐라, 설화야.”

한빈의 말에 설화가 빛의 속도로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를 열자 지필묵과 여러 장의 계약서가 나왔다.

한빈은 거리낌 없이 계약서를 장문수의 앞에 펼쳤다.

촤르륵.

장문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턱짓하는 한빈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계약서입니다.”

“계, 계약서라니요?”

“이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고르시지요. 제가 홍칠개 사부와 사제의 연을 맺었을 때도 비슷한 계약서를 썼습니다.”

“그러고 보니…….”

장문수는 당시를 떠올렸다.

분명히 한빈은 홍칠개와 사제의 연을 맺을 때 계약서를 썼었다.

이것은 하북팽가의 식솔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임시 계약이긴 해도 아직까지는 둘 중 누구 하나도 파기 의사를 밝힌 적이 없기에, 사제의 연은 계약에 따라 유지되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장문수는 조용히 계약서 하나를 잡았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장문수에게 붓을 내밀었다.

붓을 전한 설화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장문수는 설화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툴툴거리긴 해도 설화를 볼 때마다 당과를 내밀던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계약서까지 들이밀며 그를 제자로 들일 이유는 없었다.

한빈은 항상 계약서는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

불공정한 계약서지만, 그마저도 자격이 안 된다면 들이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거기에 지금 한빈은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으고 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설화는 고개를 저었다.

한빈이 하는 일에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다.

자신의 잣대로 한빈이 하는 일을 평가하는 것은 참새가 봉황의 날갯짓을 평가하려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설화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문수는 사제 계약서 중 하나에 서명했다.

쓱쓱.

그렇게 한빈과 장문수의 뜻하지 않은 계약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한빈을 지켜보던 가주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하하, 팽 유생은 계약서를 참 좋아하더군요.”

“계약서라니요?”

“설마 모르고 계셨던 겁니까?”

장유중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때였다.

하북팽가의 서기들이 하나둘씩 전각을 나왔다.

그들이 향한 곳은 한빈과 장문수가 있는 곳이었다.

서기들이 한빈을 빙 둘러쌌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한빈에게 배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한빈의 학문에만 감복한 것이 아니었다.

서기들 대부분은 한빈의 인품에 감동했다.

장문수의 실수를 가려 주면서 최고의 문장을 뽐낸 한빈이야말로 그들이 모시고 싶은 스승이었다.

처음에는 한빈이 이룬 학문의 경지에 대해서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장유중이 극찬하자 그들은 확신했다.

장유중은 빈말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대쪽 같은 학자였다.

그런 극찬은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 한 자도 받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한빈에게 배움을 청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입술만 달싹이는 서기들을 본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설화에게 턱짓했다.

신호를 받은 설화가 기다렸다는 듯 그들에게 외쳤다.

“다들 줄을 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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