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 목불식정(目不識丁) (4)
한빈은 꽤 많은 지(智)의 구결을 획득했다.
현재도 구결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올라가던 지(智)의 구결이 드디어 멈췄다.
[심화편]
[……]
[지(智) : 오십(五十)]
심화편이 담을 수 있는 구결의 한계는 각각 백 개였다.
그중 지의 구결은 마흔 개를 채웠었다.
이번 성과로 쉰 개가 되었으니 이제는 한계 용량 중 반을 채우게 된 것이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더니, 벌써 여기까지 왔다.
지의 구결을 얻는 순간, 한빈은 많은 상상을 했다.
유림 서원에서 얻은 새로운 지의 구결이 상단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지의 구결이 늘어나자 그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마도 백 개를 모두 채우고 나면 용린검법이 연자에게 주고 싶은 안배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순간 갑자기 용린검법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용린검법의 주인에게 알려 드립니다.]
[구결을 획득할 수 있는 조건이 추가되었습니다.]
[강호에 흩어진 인연은 구결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뭐지? 이게 끝?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뜬금없이 나타난 글귀는 지의 구결을 쉰 개나 채운 한빈으로서도 풀이할 수가 없었다.
용린검법의 구결을 획득하는 방법과 강호에 흩어진 인연이라니!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불만 섞인 감정을 드러냈다.
그때까지도 한빈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빈의 표정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장유중이었다.
처음에는 허허롭게 허공을 보는 한빈의 행동에서 고승의 풍모를 느꼈다.
이 모습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 전에도 항상 봐 왔던 낯설지 않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장유중은 평소에도 사색에 빠져 허공을 바라보는 한빈을 봐 왔었다.
그 모습에는 한 점 욕심도 보이지 않았다.
한빈이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경전을 바라보는 도인의 모습과도 같았다.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실제 경전을 바라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빈의 표정이 바로 변했다.
지금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못 보던 모습이었다.
대체 저것은…….
장유중은 잠시 눈을 감았다.
분명히 자신의 문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유중이 보기에 한빈이 써낸 문장은 완벽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출제자의 탓이었다.
즉, 장유중 자신의 실책이라는 것이다.
장유중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토해 냈다.
“허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저희가 실수라도…….”
가주 팽강위가 바로 반응하자, 장유중이 그때야 눈을 떴다.
“가주님은 제가 낸 시제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시제라니, 그게…….”
“저 족자에 걸린 시제 말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덕분에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팽강위와 장유중의 대화에 쏠렸다.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팽강위가 답했다.
“저는 저 시제의 운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다만, 학장님의 서체가 훌륭하다는 것만 일고 있을 뿐이죠. 사실 아까 학장님이 커다란 붓을 잡으실 때 저는 놀랐습니다.”
“놀라다니요?”
“마치 거도를 쥔 무인의 기세를 느꼈습니다. 이건 빈말이 아닙니다.”
“하하,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입니다.”
“말씀해 보시죠.”
“부럽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부럽다니요?”
“제가 품을 수 없는 유생은 처음 보는군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도(刀)만 잡다 보니 학장님이 말씀하시는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말 그대로입니다.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아까 제가 시제에 대해서 아시냐고 물어봤었죠?”
“네, 그렇습니다.”
“제가 낸 시제의 운은 모두 사서삼경과 불교사경에서 가져온 겁니다. 사서삼경과 불교사경을 모두 외우고 있다면 문장은 문제가 안 됩니다.”
“아, 제게는 어렵군요.”
“팽 유생이 문장의 첫머리로 쓴 기(寄)는 사실 사서에서 뽑은 운입니다. 그런데 팽 유생은 그걸 불경으로 받아쳤습니다. 어찌 보면 제 의도에서 완벽하게 비껴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치 학생에게 문제를 내는 훈장처럼 팽강위를 바라봤다.
장유중이 이 문제를 낸 의도는 간단했다.
문장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었다.
공부한 문장을 이용해 시를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빈은 자신이 미리 뽑은 최적의 문장보다 더 뛰어난 문장을 불경에서 찾아 쓴 것이다.
거기에 남의 흠을 가리기 위해 쓴 필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명필이었다.
문제는 장유중의 말이 꽤 깊이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대화에 집법당주 팽대위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아무래도 불똥이 자신에게 튈 것을 염려해서였다.
글자라면 보고서만 해도 지긋지긋했다.
술자리에서 이렇게 학문을 논하는 것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물론 가주 팽강위도 마찬가지였다.
가문 내에서 뛰어난 머리를 인정받으며 가주의 자리까지 올라온 팽강위였다.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그의 머리를 짓눌렀다.
마치 머리에 제천대성의 긴고아를 채워 놓은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팽강위는 당황한 표정으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흠.”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옆에서 먹을 갈아 주던 서기의 잘못을 덮어 주기 위해 가장 최적의 문장을 뽑은 것이죠. 사실 제가 생각하고 있던 문장보다 팽 유생이 뽑은 문장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런 이유가…….”
물론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유중의 답변에 토를 달면 더욱 심오한 대화가 나올 것 같았다.
그때 장유중이 한빈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 표정을 보십시오.”
“제 아이의 표정이 왜…….”
팽강위는 말끝을 흐렸다.
누가 봐도 불만 어린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장유중의 말대로였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아갈 길을 찾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장유중이 말을 이었다.
“저 정도의 성취에도 만족 못 하는 팽한빈 유생의 모습을 보니 저도 공부가 필요할 듯싶습니다. 껄껄.”
장유중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팽강위의 입꼬리가 슬쩍 꿈틀댔다.
대화는 심오했지만, 팽강위는 장유중의 말이 막내를 향한 찬사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순간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때 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떠 있던 글귀의 해석을 포기한 것이다.
얼마나 머리를 굴렸는지 한빈의 눈은 벌게져 있었다.
누가 봐도 심력을 적지 않게 소모한 듯 보였다.
한빈은 자신의 상태는 깨닫지도 못한 채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멀리서 장유중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通)이네!”
실내의 사람들은 그 목소리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결과였기 때문이다.
최유지 때와는 다르게 어떤 함성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한빈은 용린검법이 전한 글귀에 심취해 있었기에 장유중과 팽강위의 대화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지의 구결을 열 개나 모은 것을 보면 한빈의 문장에 다른 서기들도 탄복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라니!
예상과는 너무 다른 반응에 한빈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문장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장문수에게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나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것에 동의한 것 모두 가문에서 생겨나는 잡음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사실 적혈맹호대를 중심으로 한 무사에게는 추앙받는 한빈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유독 사무를 담당하는 서기들의 눈 밖에 나 있었다.
자신의 권위가 흐트러진다는 것은 가문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가문에서 직계의 권위는 하늘이어야 했다.
그 하늘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 그들이 항상 바라보는 진짜 하늘처럼 자연스러워야 했다.
전에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가문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많은 일을 겪으며 한빈과 가문의 관계는 변했다.
이제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고 일을 진행해야 했다.
다소 실망한 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순간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가 한빈을 보며 존경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함성 대신 왜 저런 시선을?
거기에 더해 그들의 시선이 함성보다도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만큼 그들의 눈은 빛났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다들 눈에는 반딧불이를 달아 놓은 듯 희미한 안광은 번쩍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한빈은 장문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장문수의 눈빛이 왠지 촉촉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한빈과 눈이 마주친 장문수가 조용히 포권했다.
그때였다.
그곳에 모였던 서기들이 동시에 한빈에게 포권했다.
한빈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왠지 자신의 의도대로 상황이 풀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의 옆자리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팽 유생, 너무하구려.”
고개를 돌려 보니 양석봉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양 유생.”
“앞에서 기를 죽이면 뒷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지금이라도 포기해야 하나 고민이 들 정도입니다. 하하.”
그의 너스레에 잠시 숙연했던 실내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의 시작은 가주 팽강위였다.
팽강위가 웃자 나머지 식솔들도 따라 웃은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 후 죽림칠회는 무사히 끝났다.
이제는 장유중 일행과 금의위를 위한 연회가 진행되었다.
유생들을 도와 먹을 갈던 장문수와 그 일행도 이번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구성원은 다르지만,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유생들의 문장이었다.
사실 한빈의 문장보다 하북팽가의 서기들이 더 놀랐던 일이 있었다.
그것은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의 문장이었다.
문장이 톱니바퀴처럼 딱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화려한 필체와 속도 그리고 신선함은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구석에 앉아 있는 서기들은 연신 그들을 칭찬하고 있었다.
“일개 시비가 우리보다 낫다니!”
체념하는 서기도 있었다.
“혹시 사 공자에게 학문을 배워서 그런 게 아닐까?”
한빈에게 관심을 보이는 서기도 있었다.
그들 중 장문수는 아무 반응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뭔가 고민하는 듯 음식도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술잔만 바라보는 그의 옆에 한빈이 다가왔다.
“장 서기, 아까는 고마웠네.”
“네?”
“자네가 있었기에 내 문장이 더욱 빛난 것 같았네.”
“그건 실수…….”
“아니네. 실수라 해도 결과가 좋았으면 상을 받아야 하는 법 아니겠나? 무슨 상을 원하는가?”
“저도 배우고 싶습니다.”
“배운다고? 혹시 무공이 배우고 싶은가? 일단 한 잔 받게!”
한빈은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장문수가 술을 들이켜더니 얼굴이 벌게진 채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아니라 학문을 배우고 싶습니다. 알고 보니 제가 목불식정(目不識丁)이었습니다.”
목불식정이란 고무래를 보고도 정자를 알지 못한다는 뜻, 즉 일자무식을 뜻한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가장 좋은 스승이 옆에 있었는데 제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공자님.”
“스승이란 지금 나를 뜻하는 건가? 장 서기.”
“사실 저는…….”
그때부터 장문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야기를 듣던 한빈은 조용히 장유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이야기 중 몇 부분이 장유중이 여기까지 오면서 이야기했던 그의 과거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한빈은 눈을 빛냈다.
이게 용린검법이 말한 인연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