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34화 (520/621)

534. 목불식정(目不識丁) (3)

설화와 청화에 소군까지 문장을 겨루는 자리에 참석한 것은 장유중의 제안 때문이었다.

장유중은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을 유림 서원의 유생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설화와 청화의 참여 덕분에 하북팽가 식솔들은 적잖게 당황하고 있었다.

한빈은 모르겠지만, 그 시비들까지 장유중에게 인정받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의문을 입 밖에 내는 자는 없었다.

상석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가주 팽강위와 장유중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대 가득한 눈으로 가운데에 마주 앉은 일곱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접객당주가 손뼉을 쳤다.

짝. 짝.

그 소리에 맞춰 하북팽가의 서기들이 지필묵이 놓인 쟁반을 들고 등장했다.

일곱 명의 유생 옆에 선 서기들은 그들의 탁자에 지필묵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능숙하게 먹을 갈기 시작했다.

그들이 먹을 갈자 설화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아, 이거 적응이…….”

“왜 그래요? 언니.”

소군이 조심스럽게 묻자 설화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낯설어서. 조금 전에 분명히 공자님께서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겨야 했거든. 그리고 내가 먹을 갈면 공자님이 붓을 들고……. 원래 그게 정상인데 아쉽네.”

“지금은 언니도 문장을 써야 하잖아요.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왠지 소중한 임무를 빼앗긴 것 같아서 그러지…….”

“뭐, 나중에 갈아 드리면 되죠.”

“내가 먹을 갈아 드려야 일필휘지로 팍팍 써 나가실 텐데. 어쩌나?”

“에이, 저기 보세요. 저분도 먹을 잘 가시는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여. 먹을 가는 데는 속도도 중요하거든.”

설화의 말에 소군이 고개를 갸웃했다.

“속도요?”

“일정한 속도와 힘으로 갈아야지 먹물이 곱기 마련이란다, 소군아.”

“아.”

그들의 대화에 설화의 옆에서 먹을 갈던 서기가 움찔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힐끔 그를 바라본 설화가 손을 저었다.

“저는 상관하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해 주세요. 헤헤.”

“네, 알겠…….”

설화를 돕던 서기는 말끝을 살짝 흐렸다.

그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설화를 힐끔 바라봤다.

자신이 하북팽가의 밥을 먹고 있긴 하지만, 막내 공자 한빈의 시비보다 신분이 낮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을 높일 수도 없고 낮출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었던 것.

서기들은 사실 살짝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런 행사에 자신들이 동원된 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유림 서원에서 온 유생들의 실력까지 믿지 않고 있었다.

학문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가문의 힘 덕분에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막내 공자 시비의 시중까지 들어야 하니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화는 그의 말투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끝내 아쉬운 듯 한빈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 표정에 소군과 청화가 피식 웃었다.

소군도 설화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설화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을 돕는 서기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한빈의 옆에는 중급 서기 장문수가 있었다.

장문수는 지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설화가 바라보는 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는 이곳에 불려 올 때부터 한빈의 험담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이곳에 불려 와서 유생들이 문장을 쓰는 것을 돕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한빈의 옆이라니!

마치 일부러 그를 이곳에 배치한 것만 같았다.

거기에 더해 장문수는 이곳이 가시방석 같았다.

그도 어릴 적부터 관직을 위해 글공부를 한 서생이었다.

그런데 한빈 일행을 빼면 모두가 명성이 쟁쟁한 명문가의 자제들이었다.

장문수는 그들의 가문을 듣는 순간 기가 눌린 것이다.

그때였다.

접객당주가 가주 팽강위를 향해 가볍게 포권했다.

팽강위가 장유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행사가 하북팽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긴 하나, 어찌 보면 유림 서원의 일이기 때문이다.

장유중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관없으니 진행하시오.”

“그럼.”

살짝 고개 숙인 팽강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앞에 있는 물건 하나를 집었다.

어찌나 빠른지 그가 무엇을 잡았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이 감탄할 틈도 없이 팽강위는 물건을 어디론가 날렸다.

팽강위가 날린 물건은 연회장의 입구로 쏜살처럼 날아갔다.

휙.

날아간 물건이 연회장의 입구 위 대들보에 박혔다.

푹.

물건은 조그마한 붓이었다.

붓을 화살처럼 쏘아 낸 것.

화살처럼 날아간 붓대는 대들보 위에 묶어 놓은 끈에 적중했다.

붓대가 끈을 잘라 내자 거대한 족자 하나가 펼쳐졌다.

족자 위에서는 거대한 붓으로 쓴 듯 보이는 문구가 나타났다.

[다(多).

기(奇).

근(近).

전(旃).

수(雖).]

필체는 마치 용과 봉황이 어울려 노는 듯 장엄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연회장에 모인 이들은 족자의 내용보다 그 필체에 입을 떡 벌렸다.

그것은 장유중 학장이 낸 시제였다.

대들보에 묶인 족자는 여섯 개가 더 있었다.

총 일곱 개의 족자가 대들보에 걸려 있었던 것.

장유중은 이 행사에 앞서 팽강위와 함께 이 족자를 만들었다.

장유중은 족자에 적힌 시제를 썼고 팽강위는 족자를 대들보에 걸었다.

시제는 장유중과 팽강위만이 알고 있었다.

둘은 그 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할 말이 많았다.

팽강위는 만류귀종이라는 말을 장유중으로부터 느꼈다.

무공에 대한 대화를 나누거나 학문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서로는 막힘이 없었다.

팽강위는 장유중과의 대화를 통해 명불허전이라는 단어를 뼛속 깊이 깨달았다.

팽강위가 보았을 때 장유중은 무림삼존에 뒤지지 않은 깨달음을 얻은 자였다.

그런 사람이 자기 아들을 이리 칭찬하니,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팽강위는 그 충동을 겨우 참았다.

모두가 장유중의 필체에 대해서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장유중이 규칙을 설명했다.

“자, 지금부터 이전에 못 끝냈던 죽림칠회를 시작할 텐데…….”

규칙은 간단했다.

막히는 자는 탈락이요, 탈락한 자가 없으면 남은 족자를 모두 펼치면 되었다.

먼저 붓을 든 것은 최유지였다.

그는 막힘없이 붓을 놀렸다.

휙. 휙.

문장을 적자 옆에 서 있던 서기가 그 종이를 모두가 볼 수 있게 들어 올렸다.

[다작보화(多作寶化) 결보요기(結步搖綺).]

순간 여기저기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명필이군.”

“허허, 유림 서원의 명성은 진짜였어.”

물론 같이 온 유생들마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보배처럼 풍요롭게 키운 꽃으로 꽃다발을 엮는다는 말이군.”

“마치 이 자리를 비유한 것 같지 않은가? 좋군, 좋아.”

최유지의 필체는 어느 곳 하나 흠잡을 것이 없었다.

물론 문장의 내용도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그때 장유중이 외쳤다.

“통(通)이네!”

장유중의 기준에서 통과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이제 한빈의 차례였다.

한빈의 옆에 있던 장문수가 붓을 건넸다.

순간 그는 문득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먹물을 잔뜩 묻혀 붓을 건넨 것이다.

실수를 깨닫고 다른 붓을 건네려고 했지만 그렇게 멈칫한 것은 더 큰 실수였다.

멈칫하자 먹물이 종이 위로 흩날린 것이다.

한빈이 문장을 쓰기도 전에 종이의 이곳저곳에는 먹물이 묻어 버렸다.

누가 보면 일부러 그랬다고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장문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장 서기님.”

“네?”

“그냥 여기에 쓰면 됩니다. 그러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저기 먹물이 튄 종이를 가리켰다.

“아무리 그래도…….”

장문수는 말끝을 흐렸다.

한빈이 먹물이 튄 종이 위에 문장을 쓸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물론 장문수가 이렇게 실수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장유중 때문이었다.

장유중이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장문수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다시 붓을 들었다.

장문수가 건네려 했던 먹물이 묻은 붓이었다.

한빈의 표정이나 행동은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장문수의 눈에는 그 표정마저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보였다.

장문수의 마음이 살짝 일렁였다.

자신의 흠을 감추기 위해서 불이익을 무릅쓴다니?

누가 봐도 평소에 알던 사 공자가 아니었다.

한빈의 무공이나 학문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인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장문수는 미안한 표정으로 시제가 적힌 족자와 한빈을 번갈아 봤다.

다음 글자는 ‘기(奇)’였다.

문장도 어려운데 필체까지 망치게 되었으니…….

장문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겨우 참았다.

뒤로 한빈을 욕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마음이 완벽하게 바뀌었다.

거기에 더해서 죄책감까지 느꼈다.

그때였다

장문수의 눈이 커졌다.

아무렇지 않게 문장을 적어 나가는 한빈의 모습 때문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한빈이 붓을 움직일 때마다 종이 위의 점들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한빈의 붓놀림은 검은 점들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

장문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한빈의 붓에 집중했다.

자세히 보니 앞선 유생의 필체와는 살짝 크기가 달랐다.

장문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자신의 잘못을 덮어 주면서도 생각지도 못한 문장을 거리낌 없이 쓰다니?

자신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문수가 멍하니 있을 때였다.

한빈이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적었습니다. 제 문장을 보여 주셔도 좋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공자님.”

장문수가 다급하게 종이를 들어 올렸다.

[기초방화(奇草芳花) 불역풍훈(不逆風薰).]

순간 다시 실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림 서원에서 함께 이곳까지 온 유생들이었다.

“허허, 서체가 역시 팽 유생답군.”

“역시 팽 유생의 서체는 남다르다니까.”

“서체뿐인가? 내용을 보게. 앞에서 최 유생이 쓴 것을 받으면서도 살짝 튼 것이 아닌가?”

“기묘한 풀도 아름다운 꽃도 그 향기가 바람을 거슬러서는 퍼지지 못한다니…….”

“우리의 인연이 운명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들은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으며 한빈을 칭찬하기에 바빴다.

물론 앞에서 모든 광경을 목격했던 서기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서 일을 돕던 장문수의 실수를 덮어 주기 위해 먹물이 튄 종이 위에 문장을 썼는데, 지금은 그 먹물이 튄 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교묘하게 행과 글자의 크기를 맞추어 가린다는 게 가능하던가?

중요한 것은 한빈의 행동이었다.

그렇게 완벽한 문장을 써 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득도한 고승처럼 보였다.

물론 최유지를 비롯한 유생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 중 양석봉이 말했다.

“팽 유생은 여전하군.”

“아무렴, 여전하고말고. 겸손하기로는 천하제일이지.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나라면 자랑하고 싶어서 근질거릴 텐데, 저 표정 보게.”

홍금호가 뿌듯한 표정으로 한빈을 가리켰다.

물론 한빈의 표정이 득도한 고승처럼 보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계속 올라가는 심화편의 구결의 숫자를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