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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33화 (519/621)
  • 533. 목불식정(目不識丁) (2)

    팽강위는 장유중을 바라봤다.

    그는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꿈틀대는 눈썹을 겨우 진정시키고 장유중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 장유중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 팽한빈 유생은 우수한 성적으로 유림 서원의 과정을 마쳤습니다.”

    “대체…….”

    “이걸 보시죠.”

    장유중은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별다른 특징 없는 평범한 봉투였다.

    팽강위는 아무렇지 않게 봉투를 열었다.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서찰을 펼친 팽강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조용히 뒤쪽에 걸린 족자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팽강위는 족자와 서찰을 번갈아 바라봤다.

    황금 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반짝이는 재질의 종이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순간 팽강위는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누가 봐도 서찰은 황제의 하사품이었다.

    탁.

    “황명을 받겠습니다.”

    “예를 취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팽강위는 말없이 장유중을 바라봤다.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선을 받은 장유중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이건 유림 서원의 수료증입니다. 증서는 황궁에서 가져왔지만, 내용은 제가 썼으니 예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증서라고 하셨습니까?”

    고개를 갸웃한 팽강위는 증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팽한빈이라는 이름 아래는 통(通)이라는 글자와 함께 장유중의 서명이 있었다.

    “그런데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모든 과정을 마쳤다니…….”

    팽강위의 놀란 모습에 장유중이 말을 이었다.

    “모든 강사와 동료 유생이 인정했기에 얻은 성과입니다.”

    “허허.”

    팽강위가 웃자 장유중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밖에는 금의위의 무사들이 도착했을 겁니다. 저희를 호위하기 위해서 온 무사들이니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

    팽강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장유중을 바라봤다.

    장유중을 바라보던 팽강위의 시선은 다시 한빈을 향했다.

    팽강위는 지금의 일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유림 서원의 모든 과정을 조기에 통과했다는 것은 천하제일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 집법당주 팽대위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짐부터 풀고 쉬신 다음에 연회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리오.”

    장유중이 밝게 웃자 팽대위는 앞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는 뜻이었다.

    팽대위가 앞장서서 가주전의 문을 열었다.

    덜컹.

    문을 활짝 열어젖힌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주전의 앞에 수많은 식솔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 죽어 가는 표정이었다.

    그냥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어깨까지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얼굴이 아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중급 서기인 장문수였다.

    그 옆을 지나치려던 팽대위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죽을상을 하고 있느냐?”

    “그, 금의위가 왔습니다.”

    장문수가 조심스럽게 가주전의 앞쪽에 도열해 있는 금의위를 가리켰다.

    팽대위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되긴……. 어서 연회 준비를 하거라.”

    “네?”

    “유림 서원에서 오신 귀빈과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고생한 금의위의 고수들에게 대접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게 무슨…….”

    “오늘 우리 가문에 경사가 났네.”

    “경사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집법당주님.”

    “우리 막내가 유림 서원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게 가문의 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팽대위가 마지막 말에 내공을 담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충 식솔들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지금 도열해 있는 금의위 무사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누가 봐도 위협적인 모습이다.

    사실 무림인이나 일반 백성 모두 관군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관에서 나왔다고 하면 죄를 짓지 않은 사람도 떨기 마련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유는 간단했다.

    힘이 없는 일반 백성이라면 없는 죄도 만들어서 옥에 집어넣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 바로 관리였다.

    그런데 일반 관리도 아니고 무려 금의위였다.

    한빈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하북팽가를 방문한 전력이 있지만, 그들의 눈에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질 터였다.

    그게 바로 권력이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거기에 더해 장유중과 나눈 대화는 주변에 몇몇 사람밖에는 들을 수 없었다.

    밖으로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기막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서기들은 안쪽의 대화를 전혀 들을 수 없었던 것.

    팽대위는 식솔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한빈에 대한 자랑을 대놓고 외쳤다.

    오해를 풀겠다는 의도만은 아니었다.

    팽대위는 가문 내에서 한빈의 입지를 굳히고 싶었다.

    첫째 팽혁빈이 가주의 자리를 잇겠지만, 하북팽가가 중원제일가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한빈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팽대위는 문서를 읽는 것은 지독히 싫어하지만, 무림과 가문 내부의 판세에 대해서는 정확히 읽고 있었다.

    첫째 팽혁빈에 대한 권위는 인정하면서도 막내 한빈에 대한 권위는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빈이 행한 많은 공적 중 대부분이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이었다.

    밖에서는 생불이니 천수장의 성인이니 하며 추앙받기도 하지만, 한빈에 대한 내부 평가는 아직도 박하기만 했다.

    말을 마친 팽대위는 부드러운 눈길로 식솔들을 훑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부드럽게 바라본다고 해도 팽대위의 험악한 인상은 어디 가지 않았다.

    턱선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묘하게 일그러지자, 웃는 게 아니라 호랑이가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장문수를 비롯한 서기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팽대위의 말에 동의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위압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팽대위가 지나가자 그들은 바로 표정을 풀었다.

    그의 기세에서 벗어나자 다시 의심이 싹튼 것이다.

    그들 중 몇몇 서기는 팽대위의 뒷모습을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때였다.

    장문수는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막내 공자 한빈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장문수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한빈의 시선은 그대로였다.

    한빈은 장문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팽대위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에 팽대위가 물었다.

    “저자를 왜 그렇게 유심히 보느냐?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이라도 한 것이냐?”

    “마음에 안 들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그저 재능이 있어 보여서 유심히 봤을 뿐입니다.”

    “허허, 재능이라……. 이제는 상대의 재능도 알아보는 것이냐?”

    “그런 건 아니고 그의 눈에 총기(聰氣)가 보여서 유심히 살폈습니다.”

    그들의 대화에 뒤따라오던 총관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총기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자님.”

    “그냥 하는 말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저 서기의 이름이 아마도 장문수였지요?”

    “허, 이름까지 아십니까?”

    총관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답했다.

    “식솔 모두 제 가족과도 같은데, 어찌 이름을 모르겠습니까? 그 옆에 있는 자의 이름은…….”

    한빈의 말에 총관뿐 아니라 팽대위까지 놀랐다.

    자신도 모르는 식솔들의 이름을 한빈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팽대위는 힐끔 총관을 바라봤다.

    한빈이 말한 내용이 정확한지를 묻는 것이었다.

    팽대위의 시선에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을 확인한 팽대위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유림 서원에서 공부한 게 헛것이 아니구나.”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제게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한빈은 푸근한 얼굴로 긍정했다.

    이건 진심이었다.

    이리 식솔의 이름을 하나도 안 빠지고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심화편에 ‘지(智)’의 구결이 추가되었기 때문이었다.

    지의 구결은 저절로 차는 것이 아닌 사람에게만 얻을 수 있는 것.

    한빈은 모든 유생과 강사들로부터 지의 구결을 획득했다.

    이제는 유림 서원에서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생각하던 한빈의 눈에, 지의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들어왔다.

    유생들도 아니고 장유중 학장도 아니었다.

    가문에서 일하는 서기들에게 보인 것이다.

    문제는 서기들에게 어떻게 지의 구결을 얻어 내느냐 하는 점이었다.

    한빈은 지금 구결 하나가 아쉬운 상태였다.

    지의 구결을 완벽하게 모으다 보면 백경을 상대할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몰랐다.

    거기에 더해 구결을 모으는 것은 이제 본능과도 같았다.

    닭이 새벽에 울고.

    토끼가 호랑이를 피해 달아나고.

    맹수가 배고프면 먹이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한빈도 본능적으로 구결을 보면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빛내던 한빈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 * *

    연회를 준비하는 하북팽가 식솔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갑자기 백 명에 가까운 연회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서기들까지 모두 총동원되었다.

    그중 중급 서기 장문수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동료가 물었다.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가?”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러네. 어떻게 반년 만에 유림 서원의 과정을 마칠 수 있단 말인가?”

    장문수는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유생들과 한빈의 행렬이 사라진 곳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동료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확인하지 않았나? 왜 이리 의심이 많은가?”

    “증서만 가지고 어찌 확인할 수 있겠나. 부마 후보이기에 준 특권일 수도 있지 않나?”

    “부마 후보라…….”

    동료 서기는 말끝을 흐렸다.

    사실 하북팽가의 내부에 그런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때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다.

    터벅터벅.

    그 소리에 그들은 재빨리 대화를 멈췄다.

    장문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나는 곳에서는 그들을 향해 하북팽가의 총관이 걸어오고 있었다.

    장문수의 앞에 선 총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는가?”

    “아, 아닙니다. 총관 어르신.”

    장문수가 손을 저으며 어색하게 웃자 총관이 말을 이었다.

    “표정을 보니 뭔가 있는 것 같네만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나를 따라오게.”

    총관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장문수에게 손짓했다.

    “무슨 일입니까? 총관님.”

    “참, 자네만으로는 안 되겠군. 여기서 일손을 돕고 있는 서기를 다 불러와야 할 것 같네. 다들 내 방으로 오라 전하게.”

    “…….”

    “연회 때 행사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 지레짐작하지 말게.”

    “지레짐작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까 표정을 보니 겁먹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네. 상대가 없을 때는 나라님도 험담할 수도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하하.”

    총관은 활짝 웃었다.

    * * *

    몇 시진 후.

    한빈은 유림 서원의 친구들과 마주하고 있었다.

    유림 서원에서 결론을 못 내었던 죽림칠회를 이곳에서 마무리 짓자는 한빈의 제안 때문이었다.

    연회에 앞서 서로의 문장을 뽐내는 자리는 흥을 돋우기에도 적당해 보였다.

    한빈과 양석봉 그리고 최유지와 홍금호가 자리에 앉아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까지 함께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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