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 목불식정(目不識丁) (1)
하북팽가에서 일하는 서기들은 향시에 번번이 떨어진 서생 출신이 대부분이기에, 유림 서원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유림 서원은 학문의 열정을 채워 줄 곳이 아니었다.
그곳은 출세의 지름길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림 서원의 모든 과정을 마치게 되면 향시에 통과한 것과 같은 신분이 된다.
무가의 자제가 향시를 통과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거기에 이곳은 하북팽가.
힘과 성깔로는 장원급제는 떼 놓은 당상이라는 소리를 듣는 하북팽가가 아니던가?
하북팽가에 유림 서원 출신의 인재는 어울리지 않았다.
잠시 뒤 그들의 웅성거림은 멈췄다.
멀리서 하북팽가 막내 공자의 행렬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서기 중 하나가 검지로 행렬을 가리켰다.
“저건 또 뭐지? 자세히 보니 완전히 홍일점이네.”
약간은 비아냥대는 말투였다.
그는 하북팽가에서 일하는 중급 서기인 장문수였다.
어찌 보면 서기 중에서도 한빈에게 가장 반감을 품고 있는 자였다.
자신이 향시를 통과했다면 무림세가가 아닌 하북성 혹은 황궁의 관리로서 일했을 터였다.
하북팽가에서의 대우도 섭섭지 않았지만, 관리와 하북팽가 서기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니 우연히 유림 서원으로 간 막내 공자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때 다른 서기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홍일점이라니…….”
그는 말끝을 흐렸다.
막내 공자의 행렬은 장문수가 말한 대로였다.
누가 봐도 홍일점이란 단어를 떠올릴 듯했다.
모든 이가 하얀 무복을 입고 있는 가운데, 오로지 한빈 혼자만이 붉은 무복을 입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얀 종이 위에 붉은 물감을 하나 떨어뜨려 놓으면 저런 광경이 될 터였다.
가장 처음 막내 공자의 행렬을 가리키던 서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동료에게 물었다.
“막내 공자의 시비가 저렇게 많던가?”
실제로 한빈의 행렬은 제법 규모가 있었다.
서기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지만, 가까이서 보니 무복을 입은 시비만이 아니었다.
뒤쪽에서는 하얀 의복을 입은 이들이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서기는 그들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일세.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이의 입술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들이 행렬의 숫자를 셀 동안 한빈은 점점 가까워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한빈의 모습에 서기들은 다급하게 입을 막았다.
한빈이 다가오자 서기들은 공손히 포권했다.
“사 공자님을 뵙니다.”
똑같은 목소리가 가주전 앞에서 울리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저었다.
“그리 예의를 취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공자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모든 식솔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기들은 아직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빈이 유림 서원에 간 것에 대해서는 조금 질투가 나긴 했지만, 신분의 차이는 엄격한 법이었다.
거기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빈을 안주 삼아 씹지 않았던가?
한빈이 지나가자 서기들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서기들은 동시에 석상이 되었다.
한빈의 뒤를 따르던 수많은 이는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다만, 그들이 무사가 아니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유생들이었다.
유생의 신분을 나타내는 관을 쓰고 있었으며 빳빳하게 다린 의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행렬에는 유생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학사도 끼어 있었다.
문제는 그 학사의 모습이었다.
의복의 소매에는 유림(儒林)이라는 글자가 녹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녹색으로 유림이라 표시하는 곳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그곳은 유림 서원.
그중에서도 저런 의복을 입을 자격이 되는 사람은 그곳에서 강의하는 학사들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유림 서원의 강사들이라는 말이었다.
유림 서원의 학사들이 대체 왜?
이것이 서생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그들의 행렬은 순식간에 가주전 안으로 꼬리를 감추었다.
그들이 모두 가주전으로 사라지자 가주전 문이 닫혔다.
순간 서기들은 자신의 추측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유림 서원의 학사들이 왜 하북팽가에 온 거지?”
“…….”
하지만 그 의문에 답해 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장문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네.”
“그게 무슨 말인가?”
“잘 생각해 보게. 유림 서원의 학사들이 얼마나 고고한지 다들 알지 않나?”
“흠, 그렇지. 성주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이 유림 서원의 학사들이지.”
“그런데 여기에 왔다는 건……. 왜일 것 같나?”
“그야…….”
“잘 생각해 보게. 보통 일이면 그들이 여기까지 왔겠는가?”
“흠.”
“지금 막내 공자가 돌아왔다는 것은 과정을 못 마치고 돌아온 것이 아닌가? 중간에 돌아왔는데 유림 서원의 학사와 같이 왔다면…….”
“그렇다면 혹시?”
“사고를 친 것이 분명하네.”
“사고라……. 대체 무슨 사고를 쳤기에 유림 서원의 학사들이 따라왔단 말인가?”
“그야 나도 모르지. 다만, 일이 심상치 않으니…….”
장문수가 살짝 말끝을 흐리더니 주변을 살폈다.
그 모습에 동료 서기 중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는가?”
“자네는 무림세가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곳이 어딘지 아나?”
“혹시 마교?”
“마교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관이라네.”
“관이라……? 그 얘기를 왜 하는가?”
“저들이 이곳에 온 것은 막내 공자의 잘못을 따지러 온 것이 분명하네. 그러지 않고서야 유림 서원의 강사들이 저렇게 줄줄이, 이곳까지 따라왔겠는가?”
“아니, 어제 황제 폐하가 상을 내리지 않았는가?”
“나는 그게 불안하다는 말일세.”
“뭐가 말인가?”
“강호에서 하북팽가를 언급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분명히 강호인들은 도(刀)와 호랑이를 떠올릴 것이네.”
“그건 당연한 게 아닌가?”
“그런데 어제 족자에는 분명히 중원일검이라고 쓰여 있었네.”
“흠, 그게 무슨 문제인가? 막내 공자가 검을 쓰니 당연한 게 아닌가?”
“내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하북팽가를 안심시키려는 듯 보이네.”
“안심시킨다고?”
“어제같이 상을 내리고 바로 뒤통수를 치는 거지.”
장문수는 동료 서기의 뒤통수를 치는 시늉을 했다.
동료 서기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장문수를 바라봤다.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그러면 황궁의 병사들이 같이 왔어야지, 왜 학사들만 같이 왔겠나?”
“흠, 하긴 자네 말도 일리가…….”
장문수가 말끝을 흐리자 동료 서기가 물었다.
“왜 그러는가?”
“저, 저기 좀 보게!”
장문수가 하북팽가의 정문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병사들이었다.
황금빛 허리띠가 유난히 눈에 띄는 것으로 봐서 그들은 분명히 금의위였다.
순간 서기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치며 주변을 살폈다.
* * *
가주전 안에서는 가주 팽강위를 비롯한 하북팽가의 고수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한빈이 이끌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유림 서원의 동료 유생과 장유중 학장이었다.
장유중 학장은 가주 팽강위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팽강위는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문제는 장유중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나서였다.
장유중의 명성은 무림세가에도 알려져 있었다.
당연하게도 팽강위는 장유중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호의 명성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장유중은 천하 십대고수에 들 정도였다.
그런 자가 자신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니!
장유중이 포권의 예를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알려졌다.
사실 포권이란, 상대에게 적의가 없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신이 무기가 없음을 나타내는 동작이다.
장유중이 든 것은 평생 서책과 붓.
그의 손에 무기가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상대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장유중은 상대에게 가벼운 눈인사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포권지례를 올리니 팽강위도 당황한 것이다.
사실, 장유중의 그 명성만으로도 팽강위는 무림삼존 중 하나가 자신에게 먼저 포권지례를 올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을 것이다.
팽강위가 손을 내저으며 포권했다.
“예가 과합니다, 어르신.”
“아닙니다. 팽 유생에게 받은 은혜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요.”
“허허, 제 아이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는 몰라도 장 학장님의 예는 과합니다.”
“하하. 팽 유생이 누굴 닮았나 싶었는데, 가주님을 쏙 빼닮으셨군요. 부럽습니다.”
“자꾸 이러시니 제가 숨을 곳이라도 찾아야겠습니다.”
팽강위는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팽강위는 이제 뒤쪽에 있는 유생들이 궁금했다.
그들은 과연 이곳에 무슨 이유로 왔을까?
팽강위의 눈빛을 눈치챈 듯 유생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인사드립니다. 저는 안휘양가의 양석봉이라고 합니다, 아버님.”
“아버님? 안휘양가라면…….”
팽강위의 눈이 다시 커졌다.
안휘양가라면 팽강위도 아는 유명한 가문이었다.
그 가문에서 배출한 재상만 벌써 둘이었다.
중앙 정계에 깊이 뿌리를 내린 가문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때 다른 유생이 앞으로 나왔다.
“인사드립니다. 저는 산서최씨 가문의 최유지라 합니다.”
“허허, 산서최씨라면…….”
팽강위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유림 서원에서 온 유생이라고 해서 대충 명문가의 자제이리라고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가문의 자제들이 유림 서원에서부터 한빈과 같이 올 줄은 몰랐었다.
그들의 인사는 계속 이어졌다.
모든 인사가 이어지자 팽강위는 장유중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장유중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주님의 눈빛을 보니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입니다.”
“네, 맞습니다. 학장님께서 직접 왕래하신 것도 그렇고, 이 많은 유생이 먼 길을 왔다는 게…….”
“하하,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사실 팽 유생은 혼자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아쉬워서 이곳에 동행했습니다. 그만큼 팽 유생이 저희에게 소중하다는 증거이겠지요.”
“못난 자식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못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가주.”
“일단 유림 서원의 과정을 끝내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학장님께도 심려를…….”
가주 팽강위는 순간 말을 멈춰야 했다.
장유중이 손바닥을 보이며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한 것은 장유중의 표정이 묘하다는 것이었다.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는 것도 같았고.
씁쓸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에 팽강위가 다급히 물었다.
“혹시 제가 실수라도 했습니까? 어르신.”
“실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잘못 알고 계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팽강위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자, 장유중이 말을 이었다.
“팽한빈 유생은 과장에서 탈락한 것이 아닙니다.”
“탈락한 것이 아니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