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중원일검(中原一劍) (7)
현문은 표정을 다급히 수습하고 물었다.
“혹시 진짜 전서구가 맞느냐? 설화야.”
“네, 맞아요. 아저씨!”
설화가 해맑게 웃자 현문이 한빈을 바라봤다.
“허허, 자네의 무공보다 설화의 능력이 더 놀랍구나.”
이것은 현문의 극찬이었다.
한빈이 펼친 천라신선보와 유유상종보다도 설화의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한참 동안 설화를 물끄러미 보던 현문이 품속을 뒤졌다.
그러고는 전낭에서 돈을 꺼냈다.
설화가 반응하기도 전에 현문은 재빨리 전낭 속에 은자 몇 닢을 설화의 손에 떨어뜨렸다.
툭.
“신기에 가까운 묘기를 보여 준 것에 대한 답례다. 나중에 당과나 사 먹거라.”
“아저씨. 그 칭찬은 제가 감당할 수 없지만, 성의는 받을게요.”
설화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아니다. 너는 이미 어떤 경지에서는 최고의 단계에 다다른 것 같구나.”
현문이 설화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설화가 그에게 붓을 내밀었다.
붓을 받은 현문이 다시 한번 감탄했다.
“내 마음마저 꿰뚫어 보는구나.”
“헤헤. 전서구를 가져왔으면 당연히 서찰을 쓸 붓도 필요하잖아요. 여기 종이도 받으세요.”
설화가 내민 것은 전서구 통에 들어갈 만한 조그만 종이였다.
종이를 건넨 설화는 활짝 웃으며 현문이 건넨 은자를 품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현문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은 헛웃음을 삼켰다.
설화가 저리 바라보는 것은 다 속셈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화는 용돈을 더 바라는 것이 분명했다.
암제의 재산을 획득한 후 설화는 남들에게 용돈을 받지 않아도 되는 재력을 지니게 되었다.
지금 품속에도 야명주 몇 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야명주를 하나만 팔아도 목 좋은 곳에 점포 몇 개는 살 수 있을 정도다.
거기에 금와 전장에 맡겨 둔 금은보화 중 일부는 설화와 청화의 몫도 있었으니, 딱히 돈을 모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설화는 언제나 알뜰살뜰하게 돈을 모으고 있었다.
언젠가 한빈이 설화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다.
하지만 설화는 비밀이라는 말로 대답을 회피했다.
한빈도 비밀이 많은 처지이니 더는 묻지 않았었다.
잠시 후 전서를 보낸 현문이 말했다.
“내 사형에게 자네가 준비됐으니, 하북팽가로 오시라고 했네.”
“꼭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사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어찌 자신이 무림삼존 중 하나인 태극검제를 오라 가라 할 수 있겠는가?
용건이 있으면 무당을 지나가는 길에 찾아가면 되었다.
그때 현문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건 사형이 뜻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럼…….”
전서구를 날리려고 하던 현문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제가 생겼네.”
“무슨 문제입니까?”
“사형은 아마도 무당에 없을 것일 텐데……. 전서구를 어디로 보낸다는 말인가?”
현문이 허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한빈이 웃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대신에 저희가 하북으로 돌아가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것도 같이 표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좋네. 그렇게 적겠네.”
현문은 다시 쪽지에 일시를 덧붙여 전서구를 날렸다.
푸드덕.
비둘기가 날갯짓하며 어디론가 날아간다.
그 모습에 현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저 비둘기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
“뭐, 비둘기 마음이죠.”
“하하, 우문현답이네.”
현문이 활짝 웃자 한빈은 멀어지는 비둘기를 바라봤다.
비둘기가 향한 곳은 하오문 군자현 지부였다.
하오문이라면 상대가 누가 되었든 정확히 파악해서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 * *
한 달 뒤 하북팽가의 가주전.
하북팽가의 가주전에서는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주전 뒤쪽, 그것도 정중앙에 걸린 족자였다.
족자의 길이는 성인 신장의 두 배 정도 되었으며, 바탕은 황금색이었다.
황금색이 어찌나 찬란한지, 염료가 아닌 진짜 황금 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족자를 바라보던 가주 팽강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흠.”
“왜 그러십니까? 형님.”
집법당주 팽대위가 조심스럽게 묻자, 팽강위가 족자를 가리켰다.
“이걸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황제께서 하사하신 족자인데 가주전에 걸어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하지만 문구가 문제 아닌가? 동생.”
“문구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팽대위가 피식 웃으며 족자를 가리켰다.
가문의 각주들은 이미 족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팽강위의 말대로 족자에 적힌 문구가 문제였다.
하북팽가를 북경을 지키는 용이라 표현했으며, 그 용은 여의주 대신 검을 물고 있다고 했다.
그야말로 황제가 내릴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문구를 보던 팽강위가 입맛을 다셨다.
“그냥 여의주로 해 주시지. 중원일검이라…….”
하북팽가를 중원일검으로 표현했다.
아쉬운 듯한 팽강위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중원일검이라는 문장을 인정해 버리면 하북팽가 무공의 정체성이 흐려진다.
가주 팽강위를 비롯한 모든 이의 생각은 비슷했다.
하지만 그들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하사한 족자를 창고에 처박아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중원일검이란 글자가 적힌 족자를 가주전에 놓아둘 수도 없었다.
차라리 중원일도(中原一刀)라고 써져 있었으면 자랑스럽게 걸어 놨을 것이었다.
한마디로 처치 곤란이었다.
모두가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상황에 집법당주 팽대위만이 족자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팽강위가 물었다.
“동생은 뭐가 그리 좋아서 웃나?”
“그래도 막내가 대견하지 않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팽강위가 한빈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견하긴 하지. 하하.”
팽강위는 황제에게 받은 하사품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잠시 잊었다.
그저 막내 한빈을 떠올리고는 미소 지었다.
팽대위도 크게 웃었다.
“하하.”
그들의 호탕한 웃음이 가주전을 가득 채웠다.
웃음이 희미해질 때쯤 족자를 바라보던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님, 그런데 막내 조카가 이번에는 무슨 공을 세웠답니까?”
“흠. 그건 비밀이네, 동생.”
“허, 형님도 막내를 닮아 가십니다.”
“뭐, 칭찬으로 듣겠네.”
팽강위가 조용히 수염을 쓸어내리며 웃자, 팽대위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가문 내의 한빈의 위상이 이리될 것이라고는 몇 해 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팽강위가 칭찬으로 듣겠다는 말은 비록 농담이지만,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한빈을 닮았다는 것은 하북팽가뿐 아니라 하북 전체에서도 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가주 팽강위는 동생 팽대위의 의미심장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족자를 바라봤다.
황궁의 명으로 하북의 성주가 팽가를 방문한 것이 어제 일이었다.
그는 황궁에서 가져온 수많은 보물과 함께 이 족자를 내리고는 사라졌다.
재미있는 것은 황제가 상을 내리는 이유를 하북성의 성주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황명이라면서 대답을 회피했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그때였다.
가주전의 문이 열렸다.
덜컹.
그 소리와 함께 무사 하나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달려왔다.
타다닥.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집법당주 팽대위가 재빨리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지금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당주님.”
“누가 도착했다는 말인가?”
“막내 공자님이 도착했습니다.”
“한빈이 도착했다는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아, 역시…….”
팽대위는 조용히 팽강위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팽강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팽대위가 물었다.
“아쉽지 않으십니까?”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도 유림 서원인데…….”
“무가에서 유림 서원의 과정을 정상적으로 마친다는 게 가능한 일이던가? 동생.”
“하긴 그렇습니다. 그래도 제법 오래 버텼습니다.”
팽대위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화를 듣던 접객당주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유림 서원의 모든 과정을 마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실 제갈세가나 모용세가 같은 가문 빼고는 유림 서원에 발을 디딘 무림세가의 자제는 없지 않습니까?”
“…….”
“정확히는 유림 서원의 모든 과정을 마친 인재를 보유한 무림세가는 제갈세가 한 곳입니다.”
“그건 그렇다네, 집법당주.”
“유림 서원에서 한 학기를 견뎠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거기에 붓 대신에 강한 호랑이의 이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호랑이의 이빨은 팽가의 도를 의미함이었다.
접객당주는 가주전 뒤쪽에 있는 팽강위의 거도를 가리켰다.
접객당주는 하북팽가에서 학문이 가장 높은 자 중 하나였다.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사실 접객당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내 공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이 변할 리 없는 법.
하북 제일의 겁쟁이라 불리던 한빈을 접객당주는 경계했다.
거기에 갑자기 비약적으로 발전한 막내 공자의 무공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계속 쌓이는 막내 공자의 공적을 접객당주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경계하던 접객당주가 바뀐 계기는 바로 막내 공자 한빈의 유림 서원 입학이었다.
황실의 힘으로 이루었든 한빈의 실력으로 이룬 성과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북팽가의 구성원이 유림 서원에 발을 들여놨다는 자체가 접객당주의 가슴을 뛰게 했다.
접객당주는 어릴 적부터 학문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 열망을 풀어 줄 곳이 바로 유림 서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림 서원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했다.
그런 접객당주의 꿈을 한빈이 대신 이루어 준 것이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유림 서원에 갔다는 자체만으로 막내 공자는 하북팽가에 공을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도착하면 막내 공자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황실에서 세운 공적과는 별개로 말입니다.”
접객당주의 눈빛은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았다.
팽강위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접객당주의 말이 맞네. 비록 통과는 못 했지만 말이네.”
“감사합니다, 가주님.”
접객당주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 가주전 밖에서 대화를 엿듣던 세가의 식솔들이 귓속말로 소곤대기 시작했다.
“접객당주가 줄을 잘 타네.”
“그래도 버티지 못하고 나온 것은 사실 아닌가?”
“그렇지. 그래도 다행이네.”
“뭐가 다행인가?”
“막내 공자가 학문에도 능통하다면 우리는 뭘 먹고 사는가?”
“하긴 그렇긴 하네. 유림 서원은 뒷배에 상관없이 공정하다고 하더니만, 진짜인가 보군.”
“허허, 공정하기로는 소문이 난 곳 아닌가? 실력이 없으면 버티지 못하는 곳이니, 중간에 쫓겨난 것이지.”
“쉿, 듣겠네.”
“에이, 여기서는 안 들리니 걱정하지 말게.”
“그런가…….”
그들은 하북팽가 내에서 사무를 보는 서기들이었다.
무림세가에서 업무를 볼 만큼 학문에는 소양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서기 중 몇은 한빈을 질투하는 이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향시에 번번이 떨어진 서생 출신이 대부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