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 중원일검(中原一劍) (6)
한빈은 그저 흉내 낸 것이 아닌 현문의 태극권을, 위력 그대로 펼치고 있었다.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에 온몸이 따끔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치 바늘로 살갗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말이 바늘이지, 멀쩡한 살갗을 바늘로 찌르면 어떨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예측되는 고통도 아니고 간헐적으로 느껴지는 고통은 최악이었다.
강유찬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호신강기로는 둘의 기세를 온전히 받아 낼 수 없는 것이다.
뒤쪽을 보니 서재오가 살짝 움찔거린다.
강유찬은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제는 그들에게 중지해 달라고 부탁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서재오의 깨달음은 먼지가 되어 날아갈 것이었다.
강유찬은 이를 악물며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었다.
하지만 한빈과 현문이 만들어 내는 기파(氣波)는 강유찬의 호신강기를 점점 자극했다.
강유찬은 자신의 호신강기가 그저 사기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에 비하면 한빈과 현문이 만들어 내는 기파는 망치와도 같았다.
만약 망치가 사기그릇을 때린다면?
당연히 조각이 나서 흩어질 것이었다.
그때였다.
강유찬의 눈을 감았다.
선택을 해야 할 때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기파의 범위가 점점 넓어져서 자신의 호신강기를 깨부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자신이 펼친 호신강기가 깨지게 되면 뒤쪽에 있던 서재오도 영향을 받게 될 터.
호신강기가 깨져서 서재오를 보호하지 못할 바에야 지금 그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맞았다.
강유찬이 몸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그의 등에 가벼운 충격이 전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충격은 아니었다.
누군가 강유찬의 등에 장심을 갖다 댄 것이다.
이어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이 그의 신체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간다.
순간 강유찬은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제 날아드는 기파를 방어할 정도는 되었다.
이제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가는 강유찬은 뒤쪽에서 자신을 도와준 이가 누군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앞쪽의 대결에 온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었다.
강유찬은 현문이 펼치는 태극권이 장삼봉 조사가 펼쳤다 전해지는 태극권과 닮았음을 깨달았다.
장삼봉이 펼치던 태극권을 강유찬이 보았을 리는 없지만, 화산의 원로들의 입을 통해 대대로 내려오던 이야기에 의하면 상당히 비슷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장삼봉이 펼치는 태극권은 무당 무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했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권과 장은 잊히고 허공에는 태극만이 남는 현상이라고 했다.
강유찬은 이 말이 추상적인 의미인 줄로만 알았었다.
지금은 그것이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 구체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상황이 정확히 그랬다.
현문의 움직임에서 날카로운 공격은 볼 수 없었다.
오직 허공에 태극만을 그리는 듯했다.
마치 그의 권과 장이 붓처럼 움직였다.
그 붓은 허공에 수많은 태극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 낸 작은 태극은 다시 커다란 태극이 된다.
자신의 공간을 모두 태극으로 만들어 버린 것.
화산에서는 장삼봉이 펼치는 태극권을 진태극권이라 부르기도 했다.
장삼봉이 펼치는 태극권만이 진짜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지금 현문이 장삼봉의 무공을 재현하고 있다고?
사실 그것만 해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빈도 현문과 똑같은 태극권으로 대결을 이어 가고 있었다.
지금 강유찬의 앞, 한빈과 현문 사이의 공간은 완벽하게 태극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유찬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이해되지 않는 것은 한빈도 마찬가지였다.
천급 초식이라고는 하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빈은 현문에게 천급 구결 하나를 더 획득했다.
다행히도 이번에 획득한 구결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구결과 짝이 맞았다.
한빈이 획득한 구결은 상(相).
그렇게 만들어진 구결이 바로 유유상종(類類相從)이었다.
[천급 초식 유유상종(類類相從)을 획득하셨습니다. 유유상종은 어떤 고수도 초식이라도 따라 할 수 있습니다. 유유상종은 지속해서 구결을 소모합니다. 소모되는 구결은 무작위입니다. 유유상종은 보름에 한 번 펼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설명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실 유유상종을 펼치기 전까지 한빈은 상당한 고민을 했다.
현문과의 대결을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한빈이 보여 주기로 초식은 모두 세 걸음이었다.
그러나 한빈이 천라신선보의 세 번째 걸음을 펼쳤음에도 현문은 승복하지 않았다.
마치 맹수를 향해서 달려드는 사냥개와도 같았다.
한빈은 아직 한 걸음의 여유는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한 걸음을 보여 주기는 싫었다.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는 것도 마땅치 않았지만, 현문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한문이 진태극권을 꺼내 든 것이다.
한빈도 장삼봉이 펼쳤다는 진태극권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런 무공이 실전하는지는 몰랐다.
여기서 더 놀란 것은 진태극권을 펼친 현문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구결을 나타내는 황금빛 점이 변했다.
토끼 가면에게서 알 수 없었던 구결을 얻었던 바로 그 점이었다.
한빈은 그 구결을 얻기 위해서 유유상종을 써 보기로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한빈은 이번에 얻은 초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 것만 같았다.
유유상종은 적과 완벽하게 동수를 이룰 수 있는 초식이었다.
무공의 격차 때문에 용린검법을 펼칠 수 없다는 글귀만 나오지 않으면, 상대가 지칠 때까지 며칠 밤낮을 싸우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자신이나 상대 모두 다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일대일 비무에 있어서는 완벽한 방패를 얻은 셈이었다.
지금도 심화편의 구결을 소진하면서 계속 현문과 맞서고 있지만, 주변을 돌아볼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이 초식의 단점도 명확했다.
이 초식은 일대일의 상황에서만 쓸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다수의 적과 맞닥뜨린다면?
이 초식은 쓸모없었다.
그때 다시 현문의 주먹이 날아왔다.
권과 장이 교묘하게 섞여 조화를 이룬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대단하군요.”
“칭찬 감사하네.”
그들은 권을 나누며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한빈은 진심으로 현문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현문의 권법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권왕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팍.
팍.
서로의 주먹이 교차하며 상대의 견정혈에 주먹이 적중했다.
한빈과 현문이 동시에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뒤로 물러난 한빈이 현문을 향해서 포권했다.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허허, 내가 팽 공자를 가르쳤다니…….”
“아닙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한빈은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현문을 통해서 유유상종이라는 천급 초식을 얻었으며, 마지막 한 수로 획득한 글귀를 확인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알 수 없는 구결을 획득하셨습니다.]
[알 수 없는 구결 : 이(二)]
알 수 없는 구결이 하나 더 늘어났다.
알 수 없는 구결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제 천급 초식 여섯 개가 남은 상태였다.
아무렇지 않게 웃음 짓는 한빈의 모습에, 현문이 권기(拳氣)를 갈무리했다.
순간 팽팽했던 둘의 비무는 막이 내렸다.
잠시 한빈을 바라보던 현문이 입맛을 다셨다.
“팽 공자가 말한 게 진짜였구먼. 내 사형이 준 일곱 걸음을 이해하고 있는 게 맞았어…….”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내 태극권을 그리 침착하게 막아 낼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자네가 권장법을 익힌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네.”
“음,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주먹을 보게. 검객과 다르지 않은가?”
현문이 자신의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의 주먹은 마치 자갈이라도 박아 놓은 것 같았다.
한빈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는 무당에서 내려와 불상을 깎으면서는 무공을 수련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권법의 수련 흔적은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그에 비교해 한빈의 주먹과 손바닥에는 수련의 흔적이 미미했다.
물론 한빈의 경우는 예외였다.
수련으로 얻은 권장법이 아니라 용린검법의 깨달음으로 얻은 초식이니 말이다.
한빈이 물었다.
“그런데 제가 태극권을 침착하게 막아 냈다는 것만으로 태극검제가 남긴 일곱 걸음을 이해했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네. 같은 붓으로 쓴다고 해서 필체가 다 똑같지는 않지 않은가? 자네의 태극은 무당의 기운이 아니었다네.”
“무당의 기운이 아니라고요?”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네. 무당의 기운이 아닌데 무당의 태극을 그린다면……. 중원의 무공이 아니라고 보는 수밖에 없지 않나?”
말을 마친 현문이 웃었다.
이제는 완벽하게 인상 좋은 도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에 한빈도 마주 웃었다.
“말씀하신 조언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빈이 말끝을 흐리자 현문이 물었다.
“대체 왜 그러는가?”
“저기 보십시오.”
한빈이 가리킨 것은 현문의 뒤쪽이었다.
그곳에서는 강유찬과 서재오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들을 본 현문이 말했다.
“깨달음에 들었는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한빈은 조용히 강유찬과 서재오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들을 호위하고 있는 제갈공려의 앞에 섰다.
“누님! 어떻게 된 일인가요?”
“팽 공자.”
“대체 왜 둘이나 무아지경에 빠진 건가요?”
“내가 왔을 때는…….”
제갈공려는 자신이 본 광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은 간단했다.
제갈공려가 왔을 때는 서재오가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고 강유찬이 호법을 서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강유찬이 한빈과 현문의 대결이 만들어 낸 기파를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했다.
그때 제갈공려가 그를 도운 덕분에 무사히 위기를 넘긴 것이다.
그 후 제갈공려를 본 강유찬은 묘한 말을 남긴 채 무아지경에 들었다고 한다.
그 말에 한빈이 물었다.
“강 대형이 남긴 말이 무엇이었나요?”
“모든 게 허울이었다는 말을 남기고 저렇게 눈을 감았어요.”
“아.”
한빈은 조용히 입을 벌렸다.
옆에 있던 현문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지나가고 현문이 한빈을 바라봤다.
“혹시 무당에 연락할 전서구를 구할 수 있겠는가?”
“전서구라면…….”
말끝을 흐린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무아지경에 든 서재오와 강유찬에게 방해가 안 될 만큼 적당한 크기의 소리였다.
현문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 정도의 소리로 누군가를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현문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한빈의 앞에 하얀색 무복이 나타났다.
눈처럼 하얀 소매를 펄럭이며 나타난 설화의 오른손에는 보따리 대신 새장이 들려 있었다.
그 모습에 현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빈과 무공을 겨를 때보다 더 놀라는 모습이었다.
손가락 한 번 튕겼을 뿐인데, 전서구가 든 새장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