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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29화 (515/621)
  • 529. 중원일검(中原一劍) (5)

    서재오가 마음의 갈피를 못 잡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한빈과 자신이 비교되었기 때문이었다.

    현문과 대등하게 서 있는 한빈의 모습은 누가 봐도 태산을 떠올리게 했다.

    현문이야 무당 장문의 사제.

    거기에 강호에서 수많은 사건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어떠한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몰랐던 무명의 검객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객이라고 봐야 했다.

    하북팽가에 검객이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짧은 시간에 어찌 저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한빈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재능의 격차가 있었다.

    서재오는 여유 있게 미소 짓는 한빈을 바라보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질투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하고 그것을 인정해야 하지만, 묘한 호승심이 가슴에서 피어났다.

    서재오는 매화 무늬가 선명한 소매를 털었다.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싶은 기분에서였다.

    그때였다.

    서재오의 눈이 빛났다.

    자연스럽게 허물어지는 서재오의 몸.

    정확히는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이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강유찬이 눈을 크게 떴다.

    서재오의 호흡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 청아한 기운이 실려 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 강유찬이 혼잣말을 뱉었다.

    “자하신공?”

    숨결 사이에 섞여 있는 기운은 자하신공의 첫 단계가 분명했다.

    사실 모자하신공이라고 하면 화산파의 일대제자들만 익힐 수 있는 심법으로 모두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반만 맞는 것이다.

    화산파의 기본 심법과 검법이 일정 수준에 들게 되면 자연스레 자하신공의 첫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의 서재오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신공을 익힐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이런 과정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기에 자하신공은 일대제자 이상에게만 전수된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

    만약에 서재오가 지금 깨달음을 얻는다면?

    화산으로 돌아가 자하신공을 익힐 수 있는 자격이 된다.

    강유찬은 재빨리 서재오의 앞을 막았다.

    호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누군가 말했다.

    깨달음의 과정이란 도자기를 빚는 과정과도 같다고 말이다.

    도공이 도자기를 빚을 때 사용하는 것은 질 좋은 반죽일 거다.

    깨달음의 과정에 들어가면 단전은 그 반죽과 같은 상태가 되기 마련이었다.

    판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반죽은 도공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그 과정의 끝에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었다.

    만약에 반죽에 외부의 힘이 개입하면 어떻게 될까?

    자칫 잘못하면 깨달음의 과정이 해변의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수도 있었다.

    거기에서 끝나면 다행이었다.

    최악의 경우는 단전까지 상할 수도 있는 법이었다.

    강유찬은 사질인 서재오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뺀질거리는 모습에 호통도 쳤지만, 요즘은 변한 서재오의 모습을 대견해하고 있었다.

    사실 한빈과 현문에게 대결을 잠시 중지하라고 하고 싶었다.

    문제는 서재오가 한빈과 현문의 대결을 보고 무아지경에 들었다는 점이다.

    대결이 갑자기 멈추게 되면 깨달음의 과정에 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의 대결은 그대로 두고 서재오를 호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강유찬은 비장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때 한빈이 현문에게 외쳤다.

    “이제 두 걸음입니다!”

    “어서 오게.”

    현문이 여유 있게 손짓했다.

    그들의 대화에 강유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강유찬이 듣기로 태극검제가 알려 준 무공은 모두 일곱 걸음이라고 했다.

    강유찬은 그 걸음이라는 의미를 초식으로 알아들었다.

    첫 번째 걸음은 첫 번째 초식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고 두 번째 걸음은 두 번째 초식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그 해석대로라면 일곱 초식 중 한빈이 깨친 것은 세 번째 초식까지였다.

    그런데 첫 번째 초식의 의미는 대충 알아봤다.

    첫 번째 초식은 힘과 속도를 중시하는 초식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초식의 의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첫 번째 초식과 비교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둘이 주고받는 공방의 속도가 엄청나다는 것은 변함없지만, 강유찬이 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한빈의 말대로 두 번째 걸음이라면 분명히 변화가 있어야 했다.

    강유찬은 안력을 돋웠다.

    자신이 놓친 부분이 있을까 생각해서였다.

    사질인 서재오처럼 강유찬도 그들의 대결에서 무언가 얻기를 갈구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금의위를 맡은 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는 지금의 생활에는 만족하지만,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그것은 바로 무학의 끝을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하지만 황궁에서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어찌 보면 이렇게 고수들의 비무를 관전하는 것이 한계를 깰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었다.

    강유찬은 내공을 이용해 조금 더 안력을 돋웠다.

    그때였다.

    강유찬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풍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풍압의 근원은 한빈과 현문이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나뭇잎이 밖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강유찬은 뒤를 힐끔 봤다.

    서재오는 아직도 무아지경에 들어 있었다.

    강유찬은 최대한 진기를 끌어올려 호신강기를 펼쳤다.

    진기를 앞쪽으로 펼치자 바람에 휩쓸리던 나뭇잎들이 강유찬을 피해 간다.

    강유찬은 서재오를 위해서 조금 더 범위를 넓혔다.

    그 상태에서 앞을 바라봤다.

    순간 강유찬이 한숨을 토했다.

    “허.”

    놀라움의 감정이 담겨 있는 한숨이었다.

    나뭇잎과 흩날리는 먼지 덕분에 그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흩날리는 먼지들은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그들의 손동작에 따라 휩쓸리고 있었던 것.

    둘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므로 불규칙하게 보였을 뿐이었다.

    안력을 최대한으로 돋워야만 볼 수 있을 정도라니!

    탄성을 내지르는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 허전함을 느꼈다.

    강유찬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과 현문의 대결은 계속 이어졌다.

    현문에게는 아직 여력이 있었다.

    현문의 권을 한빈의 장이 막고.

    한빈의 장을 현문의 권이 막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제 현문은 한 가지 결심을 해야 했다.

    현문은 본격적으로 한빈이 태극검제가 전한 일곱 걸음을 온전해 이해했는지를 시험해야 했다.

    과연 어떤 방법으로 시험해야 할까?

    현문도 시험해 볼 정확한 방법을 알 수 없었다.

    현문은 태극검제가 남긴 일곱 걸음에 대한 의미를 몰랐다.

    당연히 그 일곱 걸음을 이해했는지도 시험해 볼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현문은 한 가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것은 태극검제가 남긴 현묘한 초식이라면, 자신의 성명 절기를 쏟아부어도 상대가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공수를 주고받던 현문이 나지막이 외쳤다.

    “이제부터 조심하시게! 내가 가장 자신 있는 태극십절지(太極十節指)와 유운신법(流雲身法)이네. 태극의 이치를 보여 주겠네.”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세 번째 걸음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빈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그와 동시에 현문이 주먹을 활짝 폈다.

    이제까지 펼쳤던 권법을 뒤로하고 장법으로 바꾼 것이다.

    한빈은 현문의 태극십절지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무당의 무공 중 가장 험악하다고 말하는 무공이 바로 태극십절지였다.

    전생에도 이 무공 덕분에 며칠 동안 누워 본 적이 있었다.

    태극십절지의 가장 무서운 것은 손가락 열 개가 각기 다른 태극의 도를 담고 있다는 점이었다.

    휙.

    오른손이 한빈의 어깨로 날아온다.

    한빈은 그것을 피하며 재빨리 좌수를 날렸다.

    그때 현문의 손이 묘하게 뒤틀리며 한빈의 좌수를 낚아챈다.

    맹렬하게 들어오던 기세와는 달리 여우처럼 날래게 방향을 바꾼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의 검지와 중지가 간격을 벌린다.

    중지는 한빈을 옭아매고 검지는 한빈의 손마디를 노리고 기세를 피워 낸다.

    마치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과 싸우는 듯한 착각이 드는 장법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한빈이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요혈을 노리는 태극십절지를 모두 쳐 내면서도 현문의 구석구석을 노리고 있다.

    타다닥.

    둘의 사이에서는 마치 빨래를 터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한 명이 내는 소리는 분명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이 소리만 듣는다면 몇십 명이 동시에 빨래를 터는 장면을 상상할 것이다.

    그 정도로 그들이 만들어 내는 풍압은 다채로운 소리를 만들어 냈다.

    파박.

    팍.

    순간 현문이 몸이 구름처럼 한빈의 옆으로 이동했다.

    유운신법을 칠 성 이상 펼치면 이형환위와 동일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지금 현문은 유운신법을 칠 성 이상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현문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빈의 표정을 보면 아직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팍.

    현문은 어깨에 통증을 느꼈다.

    그는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한빈을 확인했다.

    한빈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 확인하셔야겠습니까?”

    “음.”

    현문은 침음을 토해 냈다.

    이것으로 시험을 끝내야 할지 난감해서였다.

    거기에 현문의 가슴 한쪽에서는 호승심이라는 불씨가 살아났다.

    조금 전까지가 순수한 시험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본능이 꿈틀댔다.

    도를 깨달으며 몸속 깊이 숨겨 뒀던 투견의 본능이 꿈틀대자 현문은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 몇 수만 더 놀아 보세.”

    “그러지요.”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동의는 했지만, 한빈이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한빈은 먼 산을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현문의 착각이었다.

    한빈은 지금 허공에 뜬 용린의 문구를 확인하고 있던 것이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천급 구결 대(大)를 획득하셨습니다.]

    [천급 – 유(類), 유(類), 종(從), 대(大)]

    기분 좋게 올라갔던 한빈의 입꼬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필이면 지금 획득한 구결은 기존에 있던 구결과 딱 맞는 짝이 아니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미소 지었다.

    지금 상대에게는 아직 두 개의 구결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현문의 목소리가 한빈의 귀청을 때렸다.

    “혹시 주화입마?”

    “괜찮습니다.”

    한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현문이 재미있다는 듯 장법의 간격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초식은 다시 바뀌었다.

    무당의 기본 권법이라는 태극권을 펼치고 있는 것.

    사실 현문이 현재 가장 자신 있는 것은 무당의 기본 권법인 태극권이었다.

    물론 이것은 한빈 덕분에 얻은 기연이었다.

    도를 깨닫자 태극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당의 시조인 장삼봉 조사 이후 진정한 태극권을 펼친 제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무당의 입장이었다.

    이런 무당의 의견에 강호인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저잣거리의 아이들도 펼치는 무공이 태극권이 아니던가?

    태극권은 무당파의 고유 무공이기도 했지만, 강호에 널리 알려진 무공이었다.

    그렇다면 무당에서 말한 진정한 태극권이란 무엇일까?

    현문은 지금 그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멀리서 대결을 보고 있던 강유찬은 다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렸다.

    현문의 무공은 분명 태극권이 맞았다.

    그런데 그 위력은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현문의 주먹에서는 무형의 강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팍.

    팍.

    서로의 가슴에 권과 장이 적중했다.

    물론 본 것은 아니었다.

    소리를 듣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순간 강유찬의 심장은 요동쳤다.

    이것은 무인으로서의 본능이었다.

    그것도 잠시, 강유찬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의 초식이 변했기 때문이다.

    물론 강유찬이 놀란 것은 초식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한빈이 쓰고 있는 초식은 누가 봐도 무당의 태극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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