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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28화 (514/621)

528. 중원일검(中原一劍) (4)

고개 숙인 한빈의 얼굴은 현문이 보기에도 들떠 있었다.

현문은 이 점이 궁금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던 한빈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기세를 피워 내자 바로 반응한 것이다.

현문은 한빈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때 한빈이 물었다.

“이야기는 끝난 것 같고……. 아무래도 공정한 판단을 내릴 사람이 필요하겠죠?”

“팽 공자가 원한다면…….”

“강 대형! 이쪽으로 오시죠.”

한빈은 멀리 떨어져 점으로 보이는 강유찬에게 외쳤다.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

하지만 강유찬은 바로 반응했다.

마치 사냥개가 먹잇감을 발견한 듯 바로 달려온 것.

마치 이형환위를 펼치듯 한빈의 앞에 온 강유찬.

그를 본 현문이 눈을 흘겼다.

“허허, 금의위의 수장이 그리 방정맞아서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그리 달려오면 우리의 이야기를 엿들은 게 다 표시 나지 않는가?”

“네?”

강유찬은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자리를 피해 멀리 떨어진 이유는 현문이 한빈과의 독대를 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빈이 소리치자마자 달려왔으니,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힌 꼴이 되었다.

강유찬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현문이 말했다.

“들어도 상관없는 이야기네. 그리고 자네는 나랏밥을 먹는 사람이 아닌가? 어차피 나중에는 알아야 할 이야기일세.”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습니다.”

“다만, 자네만 알고 있게나. 화산파의 도사들은 몰라도 되는 일일세. 관과 무림의 일을 구별할 수 있겠지?”

현문은 턱짓으로 멀리 떨어진 서재오를 가리켰다.

“그리하지요.”

강유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유찬이 화산파의 제자이긴 하지만, 무당파의 심정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화산파와 무당파 사이에 대대로 전해지는 선의의 경쟁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지 않는다.

상대에게 위기가 닥쳤을 때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오는 것이 둘의 사이였다.

하지만 매화와 태극이라는 상징적인 단어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었다.

매화나 태극,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위라는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다면 천년이 넘는 강호의 역사에 있어 그 결론이 났을까?

당대로만 본다면 결론이 났다고 할 수 있지만, 강호 역사 전체를 두고 보면 엎치락뒤치락하는 형국이 반복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산과 무당의 무공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무공을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그 위력이 나타나는 법.

같은 무공이라도 하늘이 내린 기재가 그것을 펼친다면 그 무공은 천하제일의 초식이 된다.

어찌 보면 이것은 하늘의 이치였다.

문파의 세대가 바뀔 때마다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화산과 무당은 무림인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그들의 경쟁심에 어떤 이들은 치를 떨기도 했다.

사실 강유찬의 경우, 화산파에 있었을 때는 이런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화산을 최고의 문파로 올려놔야 한다는 목표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림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나랏일을 하다 보니 시야가 조금 넓어진 것이다.

한빈은 묘한 기세 싸움에 웃음 지었다.

하지만 시선은 현문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마치 수확을 앞둔 농부의 눈빛이었다.

한빈이 이렇게 눈을 빛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현문이 기세를 피워 내자 전에는 없던 황금빛 점이 일렁였기 때문이다.

한 개도 아니고 무려 세 개였다.

물론 세 개를 다 획득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건 기회였다.

한빈은 조용히 허공을 바라봤다.

이제는 지워졌지만, 그 전에 봤던 문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용린검법은 자신이 가야 할 바를 말해 주고 있었다.

다음 경지를 밟기 위해서는 천급 초식 열 개를 모아야 한다고 했다.

이제까지 모은 천급 초식은 세 개, 천급 구결은 세 개였다.

현문의 몸에서 반짝이는 황금빛이 모두 천급 구결이라면?

아마도 세 개의 구결을 더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기존에 획득한 천급 구결과 맞는 조각이 있다면, 완성된 천급 초식은 네 개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남은 천급 초식은 불과 여섯 개.

단서가 될 만한 그 문구를 확인하고 나서 한빈은 그다음 경지에 대해서 고민했었다.

다음 경지는 과연 무엇일까?

처음에는 그 경지를 현경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문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그 경지가 탈경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아니, 어쩌면 자신은 벌써 탈경의 경지를 밟았을지도 모른다.

기존의 체계와는 전혀 다른 무공을 펼치고 있으니까.

다음 경지를 밟게 되면 용린검법의 실체에 대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

한빈은 현문을 향해서 포권했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자네가 검을 놨으니 삼 초를 양보하겠네.”

현문은 확신이 있었다.

검을 손에서 놓은 한빈은 자신보다 한참 아래라고 생각했다.

현문은 눈을 반짝였다.

진심으로 권법을 쓰는 한빈의 모습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삼 초를 양보하겠다고 했지만, 현문은 은근히 한빈의 한 수를 기대하고 있었다.

과연 하북팽가의 손맛은 어떨까 하고 말이다.

현문은 도를 깨치기 전까지는 강호의 쌈닭이라고도 불릴 만큼 싸움을 좋아했다.

현문과 한빈 사이에서 묘한 기류가 흘렀다.

현문의 입꼬리가 보기 좋게 올라갔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강유찬은 눈에 힘을 주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서재오가 옆으로 다가왔지만, 그의 집중력을 흩트려 놓지는 않았다.

분명히 이건 친선 비무였다.

거기에 병장기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권법 대결이었다.

그런데도 둘은 마치 검을 든 것만 같았다.

착각이 아니라 그들의 투기가 강유찬의 살갗을 자극했다.

따끔거리는 감각은 느낌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강유찬이 이리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강호의 투견(鬪犬) 혹은 투계(鬪鷄)라 불리는 현문 때문이었다.

현문은 십 년 사이에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남겼다.

근 십 년은 강호의 평화기라 불리기에 그가 남긴 족적은 수많은 문파 사이에서 떠돌았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피를 보면 이성을 잃는다는 점이었다.

하나를 잃으면 열 배로 갚아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현문이었다.

그 때문에 무당파에서 나와 수만 개의 불상을 깎으며 수행을 했던 그였다.

도를 깨쳤다고는 하지만, 그의 본성이 변했으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물론 한빈도 만만치 않다.

이제까지 그가 손해 보는 장사를 했던 적이 있는가?

비무를 장사라고 표현하기는 뭐하지만, 비무나 대결의 끝에는 뭔가를 꼭 건져 갔던 한빈이었다.

각자의 개성이 분명한 두 명이었기에 강유찬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강유찬은 이를 악물었다.

옆에 있던 서재오의 귀에 부드득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강유찬은 비장한 표정으로 외쳤다.

“비무를 시작합니다!”

뒤쪽으로 물러난 강유찬은 둘을 바라봤다.

만약에 불상사라도 생기면 바로 비무를 중지시켜야 했다.

바로 달려들 것 같던 한빈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강유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한빈의 평소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재오도 마찬가지였다.

한빈이 이렇게 고민하며 비무에 임한 적이 있던가?

일단 달린 후에 검을 뽑았던 것이 한빈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할 때 한빈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쓸 보법부터 밝혀야겠습니다.”

“말해 보게.”

현문이 손을 까닥이자 한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쓸 초식은 하북팽가의 혼원장입니다.”

“흠, 하북팽가의 무공을 견식할 수 있겠군.”

“보법은 일전에 태극검제가 보여 주신 일곱 걸음을 바탕으로 펼치겠습니다.”

“좋군. 좋아. 그걸 보기 위해서 이 비무를 하는 것이 아니겠나!”

“다만, 세 걸음이 한계입니다.”

“세 걸음이라? 벌써 포기하는 건가? 세 걸음이면 온전한 초식을 얻지 못했다는 건데…….”

“이해는 하고 있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합니다.”

“흠, 일단 확인해 봐야겠군.”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말해 보게. 손 속에 사정을 두라면 그리하겠네.”

“삼 초를 양보하겠다는 말을 거둬 주시죠. 단 세 걸음인데 삼 초를 양보하신다면 이 승부는 의미가 없습니다.”

“허허, 검객으로서의 자부심은 인정하나 지금은 공수(空手)의 대결이네.”

“그럼 먼저 손을 쓰겠습니다. 첫 번째 걸음입니다.”

한빈이 가볍게 한 걸음을 걸었다.

그저 평범한 준비 동작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강유찬과 서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의 눈에는 한빈의 첫 번째 동작이 너무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초식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오른손을 앞으로 뻗은 채 한 걸음 앞으로 나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현문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여유가 넘치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표정으로 현문이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하북의 권을 만만하게 봤던 것 같군. 삼 초를 양보하겠다는 말은 취소하겠네. 내가 쓸 초식은 무극현공권(無極玄功券)이네. 태극에는 그 시작과 끝이 없으며 태극의 중심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지혜가 숨겨져 있지.”

말을 마친 현문이 가볍게 주먹을 뻗었다.

순간 현문의 몸이 한빈의 바로 앞에 다다랐다.

그 모습에 강유찬은 눈을 크게 떴다.

바로 현문이 쓴 첫 번째 무공 때문이었다.

무극현공권이 어떤 무공이던가?

일권(一拳)에 무당 무공의 정수를 담은 초식이라 평가되는 무공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 현문의 말이었다.

현문은 마치 무당의 무공을 전수하려는 듯 구결의 핵심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때 현문의 권이 한빈의 가슴에 다다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펼쳐진 초식.

무극현공권의 첫 번째 초식인 무극일수(無極一手)였다.

순간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팡!

순간 현문과 한빈의 사이에 공간이 생겨났다.

동시에 둘이 한 걸음 뒤로 밀린 것이다.

강유찬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하지만 서재오는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고개를 갸웃한 서재오가 강유찬을 바라봤다.

“혹시 제가 놓친 게 있습니까?”

너무 광범위한 질문이지만, 이것은 서재오의 본심이었다.

분명히 둘은 일 합을 겨뤘다.

문제는 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서재오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저 권과 장이 한번 오갔을 뿐인데, 서로 밀려 나 있는 것도 신기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간격을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서재오는 지금 자신의 힘으로 이 의문을 풀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진지하게 물어본 것이다.

서재오의 질문에 강유찬이 입을 열었다.

“지금 둘 사이에는 열 번의 합이 오갔다네.”

“열 번이라고요?”

“너무 빨라서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 무당의 무공은 진짜 심오하군.”

“그럼 팽 공자는 열 번의 공격에 당했다는 말인가요?”

“그 열 번은 혼원장으로 쳐 냈네. 팽가의 권장법도 무당의 무공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게지.”

“음.”

서재오는 침음을 흘리며 자신의 소매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소매에 새겨진 수십 개의 매화 무늬가 들어왔다.

여기에 오기까지 서재오는 수없이 많은 땀을 흘렸다.

매화검수라는 이름을 얻는 데 이십 년.

소매에 매화를 채우는 데 삼 년이 걸렸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한빈과의 인연으로 얻어진 매화였다.

오늘따라 소매에 수놓인 매화가 그저 껍질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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