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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27화 (513/621)

527. 중원일검(中原一劍) (3)

살짝 말끝을 흐린 강유찬이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의 말을 한빈이 받았다.

“태극의 기운도 느껴지는군요.”

“그렇다는 건?”

“화산과 무당이란 얘기지요.”

말을 마친 한빈도 담벼락 너머를 바라봤다.

담장을 넘어 두 신형이 날아왔다.

휙. 휙.

둘은 한빈의 앞에 나비처럼 가뿐히 착지했다.

순간 그들 중 하나가 나오더니 강유찬을 향해서 포권했다.

“사숙 어르신, 인사드립니다.”

“그래, 자네도 잘 지낸 것 같군. 매화검협.”

“놀리지 마십시오, 사숙.”

사내는 다시 공손히 손을 모았다.

손을 모으자 그의 소매가 펄럭이며 만개한 매화 꽃잎이 찰랑거린다.

그는 다름 아닌 화산파의 매화검수 서재오였다.

한빈과 만나며 소매에 수놓아진 매화가 계속 늘어난 운 좋은 사내.

이제는 세상에 매화검협이라는 별호로 더 잘 알려진 사내가 바로 서재오였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헛기침한다.

“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순간 강유찬이 그에게 포권했다.

“현문 대협!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험, 이제야 나를 봤군.”

“아닙니다. 사질을 오랜만에 보니 잠깐 감회에 젖어서 실수했습니다.”

강유찬이 활짝 웃자 현문이 손을 저었다.

“예의는 차리지 말게.”

“죄송합니다, 현문 대협.”

강유찬이 다시 한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마치 서열이 철저히 지켜지는 동물의 왕국과도 비슷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자리는 배분과 나이가 명확했다.

정확히는 현문이 이곳의 최고 어른이었다.

거기에 한 성깔 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바로 현문이었다.

하도 사고를 치자 무당에서도 도를 깨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 내보낸 희대의 사고뭉치.

강유찬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표정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무당 장문의 사제이기도 한 현문은 강유찬조차 껄끄러워하는 존재였다.

강유찬이 긴장하고 있을 때, 현문이 무표정하게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현문이 왜 그렇게 정색하며 자신을 바라보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현문이 물었다.

“팽 공자가 가는 길에 이리 피바람이 부는 이유는 뭔가?”

“아마도 바람 잘 날 없는 나뭇가지인가 봅니다.”

“나뭇가지라…….”

“나뭇가지가 어찌 혼자 움직이겠습니까?”

“…….”

“가만히 있으려 해도 바람이 불어 흔들고 지나가는 걸 제가 어쩌겠습니까?”

“내 사형도 자네가 이럴까 봐……. 사천당가에 칠 년 동안 머물라 한 것이거늘!”

“나무는 뿌리를 내리려고 했지만, 목수가 나무를 베어 옮겼습니다.”

한빈이 씩 웃었다.

한빈은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가문과 황제가 자신을 옮겼다는 말이었다.

“허허, 우문현답이라고 해야 하나? 도사보다 더 도를 잘 아는구먼.”

“현문우답으로 해 두시죠.”

“겸손은 고맙네만, 이번 일은 경솔했네. 사형의 부탁을 자네는 지켜야 했네.”

“앞으로는 조용히 있겠습니다.”

“흠. 자네는 내 은인이라는 걸 잊지 말게. 만약에 자네에게 해를 가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 무당은 좌시하지 않을 걸세.”

“감사합니다.”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대화에 강유찬이 긴장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과 무당파 사이에 끈끈한 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위기감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강호란 어떤 곳일까?

가장 기본적인 것이 강자존의 법칙이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된다.

이것은 구대문파에도 적용된다.

오래전에는 화산이 무당의 위라는 얘기가 돌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평가는 무당의 아래였다.

비록 강유찬이 화산을 떠나 황궁에 몸을 담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화산파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화산파는 자신의 고향과도 같았다.

그런데 화산파가 무당파에 밀린다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었던 것.

무당이 좋은 것을 다 차지한다고?

물론 여기서 좋은 것이란 한빈이었다.

한빈은 누가 봐도 장래의 천하제일인이 될 자였다.

앞으로 이십 년? 아니 십 년 뒤면 천하제일인이 될, 강호가 인정할 재능을 가진 인재였다.

지금 상황만 보면 한빈을 무당파에 빼앗기는 분위기였다.

거기에 무림 최고 배분에 속하는 현문이 한빈을 팽 공자라 칭했다.

보통은 말을 낮추면서 자네 혹은 소협이라 칭해야 마땅했다.

강유찬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재빨리 서재오에게 눈짓했다.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라는 신호였다.

갑자기 눈빛이 바뀐 강유찬의 모습에 서재오는 적잖게 당황했다.

하지만 눈치 하나는 백 단인 서재오였다.

상인 가문에서 물려받은 눈치는 매화검수가 되었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서재오가 헛기침했다.

“흠.”

덕분에 대화는 잠시 끊겼다.

현문이나 한빈 모두 서재오를 바라봤다.

고개를 갸웃한 한빈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매화검협.”

“우리 화산도 확실히 해 두고 싶습니다, 팽 공자.”

“그게 무슨 말인지요?”

“우리 화산도 팽 공자의 편입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한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서재오를 바라봤다.

사실 서재오가 왜 이리 나오는지 한빈은 알 수 없었다.

한빈의 반응이 시큰둥하다고 느껴지자 강유찬이 끼어들었다.

“참, 이제부터는 나를 형이라 부르게!”

“형이라니요?”

“자네와 만난 지 벌써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나? 앞으로는 대인이란 호칭 대신 그냥 형이라고 부르게.”

“아, 알겠습니다. 대인.”

“허허. 그냥 형이라 부르라고 해도.”

“네, 그러지요. 대형.”

한빈이 마지못해 웃자 강유찬이 씩 웃으며 현문의 눈치를 봤다.

현문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마치 움직이지 않은 거석과도 같다고 할까.

강유찬이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현문의 표정이 바뀌었다.

얼굴에 지진이라도 난 듯 몇 가닥 주름이 잡혔다.

모두는 고개를 갸웃하며 현문의 입술을 바라봤다.

현문이 그들의 시선에 답하듯 입을 열었다.

“내 긴히 할 말이 있네.”

현문의 말에 강유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희가 비켜 드릴까요? 대협.”

“그래 주면 고맙겠네.”

현문의 말에 강유찬과 서재오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지만, 멀리 떨어진 덕분에 서로는 점으로 보였다.

강유찬은 그 상태에서 한빈과 현문을 응시했다.

그는 한빈과 현문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강유찬의 청력은 금의위에 몸을 담으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황궁의 사건과 암투에 집중하다 보니 감각이 발달하게 된 것.

강유찬은 귀를 쫑긋 세웠다.

청력만으로 따진다면 강유찬은 무림삼존에 버금간다고 봐야 했다.

조용히 대화를 듣던 강유찬의 눈이 커졌다.

* * *

대화를 나누던 한빈의 눈도 커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탈경이라니요?”

“말 그대로일세.”

“저는 처음 들어 보는군요.”

한빈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현문은 지금 무공의 경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가 논하고 있는 것은 조금은 다른 관점은 무공 수준이었다.

현문은 탈경이라는 무공의 경지를 논하고 있었다.

전대 태극검제가 우연히 잡은 것이 탈경이라는 무공의 경지라고 했다.

화경의 벽을 넘어서 현경이란 경지가 있다고는 들었다.

현 무림에서 현경의 경지에 이른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현경도 아니고 탈경이란 어떤 경지일까?

현문은 기존 무공을 벗어난 틀이라고 했다.

순간 한빈은 태극검제가 남긴 일곱 걸음을 떠올렸다.

한빈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지난번에 태극검제께서 남겨 주신 일곱 걸음이 탈경의 무공입니까?”

“그렇다네, 팽 공자.”

“흠.”

“혹시 말입니다…….”

“말해 보게.”

“그 무공을 익히게 되었으면 탈경의 경지에 도달할 겁니까?”

“그 일곱 걸음을 익혔는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태극검제께서 남겨 주신 일곱 걸음은 해석했습니다.”

“사형은 이렇게 말했네. 그 일곱 걸음을 해석하면 또다시 이면에 숨겨진 일곱 걸음을 찾아야 한다고 말이네.”

“숨은 일곱 걸음도 찾았습니다.”

“…….”

“…….”

“숨은 일곱 걸음도 찾았다고 했나? 팽 공자.”

“아마도요.”

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라신선보를 떠올렸다.

지선에게서 얻었던 천라신선보도 일곱 걸음이었다.

태극검제가 남겨 준 일곱 걸음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의 천라신선보를 온전히 깨치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면?

현문이 말한 이면에 숨겨진 일곱 걸음이 천라신선보를 말함이 아닐까?

사실 그렇다면 탈경이라는 무공의 경지도 이해가 된다.

한빈의 용린검법은 일반적인 무공이 아니었다.

한빈은 불과 일류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검기를 검 끝에 피워 낼 수 있었다.

바로 용린검법의 일촉즉발이었다.

한빈은 일류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절정 고수의 쾌검을 능가할 수 있었다.

용린검법의 전광석화였다.

용린검법을 익히면서 항상 드는 의문이 바로 이 점이었다.

용린검법을 통해 펼치는 무공의 수준을 기존의 무공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했다.

용린검법은 사실 누구에게 전수할 수 없는 무공이었다.

그중 융합편에 있는 몇몇 무공은 전수가 가능했지만, 전광석화나 일촉즉발 그리고 성동격서 같은 초식은 타인에게 전수가 불가능했다.

그때 현문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는 없다네. 내 사형인 태극검제는 십 년을 내다봤다네.”

“십 년이라니요?”

“그게 사형이 탈경의 끝자락을 잡은 기간이라네. 즉, 자네는 태극검제 본인과 같은 수준으로 평가한 것이지.”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현문 대협.”

“말해 보게, 팽 공자.”

“대체 제게 그런 무공을 전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어는 빠졌지만, 누굴 의미하는지 현문이 모를 리 없었다.

무당 혹은 태극검제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현문이 답했다.

“강호를 위해서라고 하셨네. 자세한 것은 자네가 그 경지에 이르게 되면 전하겠다고 하셨네.”

“그럼 지금 알고 싶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일곱 걸음의 이면에 있는 초식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습니다.”

“증명할 수 있겠나?”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나를 꺾어 보게.”

“대협을 꺾다니 그게…….”

“검을 버리고 권장법으로 말일세.”

현문이 월아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면 되겠습니까?”

“충분하네.”

현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세를 피워 냈다.

순간 바닥에 가라앉았던 흙먼지가 그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쏴악!

가공할 만한 기세를 보여 준 현문은 한빈을 조용히 바라봤다.

현문의 의도는 간단했다. 검술의 고수라고 해서 권법의 고수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신체 조건 공격의 간격 등 여러 요소 때문이다.

현문은 권법에 특화된 무인이었다.

검술이라는 한 우물을 판 한빈이 자신을 꺾는다면 사형이 말한 탈경에 경지에 이르렀다고 판단해도 될 것 같았다.

그 결과야말로 기존 무공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니 말이다.

어쨌든 현문이 이렇게 기세를 보여 준 의도는 한빈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현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현문이 보기에 그 이유는 한 가지였다.

현문이 물었다.

“자신 없나? 자신이 없다면 내 제안은 없던 것으로 해도 좋네. 팽 공자.”

“아닙니다. 꼭 한 수 부탁드립니다.”

한빈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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