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 중원일검(中原一劍) (2)
서찰의 내용은 뜬금없었다.
신선 오라버니를 보호할 힘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그 힘을 얻는 순간까지 폐관 수련에 들어가기로 했다고 했다.
서찰은 기다려 달라는 마지막 말로 끝을 맺었다.
상당히 다급하게 쓴 흔적이 보인다.
마치 납치당하기 전 부랴부랴 썼다는 상상까지 들 정도였다.
* * *
같은 시각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효명 공주는 뚱한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노려보고 있는 상대는 조미였다.
조미는 효명 공주가 어렸을 때부터 옆에 있었던 시녀.
말이 시녀지, 효명은 그녀가 마치 큰누이같이 느껴졌다.
조미가 효명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로 효명은 황궁으로 바로 끌려가고 있었다.
한빈과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끌려가고 있는 효명은 지금 조미에게 단단히 삐진 상태였다.
효명의 눈빛을 본 조미가 말했다.
“공주 마마, 그런 눈빛 저한테는 안 통해요. 이제는 당분간 황궁에서 못 나갑니다. 그리고 폐관 수련이 뭔가요? 공주 마마가 무림인도 아닌데 그렇게 적어 놓으면 헷갈리실 거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 내게 금족령이 내려졌다고 알게 되면 신선 오라버니가 걱정하실 것 같아서…….”
효명은 말끝을 흐리며 마차의 뒤를 바라봤다.
마차의 뒤는 막혀 있지만, 그 방향에는 유림 서원이 있었다.
그 모습에 조미가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그리고 신선 오라버니가 또 뭐예요? 그냥 팽 공자 아닌가요?”
“그렇게 이름 부르지 마, 조미.”
“그건 왜요?”
“이름을 막 부르면 신비함이 사라지잖아. 신선 오라버니는 내게 그런 존재야,”
“아, 공주 마마. 황궁으로 돌아가면 당분간은 납작 고개를 숙이셔야 해요.”
“인사라도 한 번 하고 왔으면 좋았을걸…….”
“그래도 편지 쓸 시간은 줬잖아요.”
“시간이 모자랐단 말이야, 조미.”
그때였다.
말발굽 소리가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따가닥. 따가닥.
그 소리에 효명 공주가 표정을 굳혔다.
사실 지금 조미에게 응석을 부리긴 해도 며칠 전까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겪었던 효명이었다.
그때는 한빈이 옆에 있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가 자신을 구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밀실에서 한빈이 사라진 후 효명은 두려움이 점점 커졌다.
밀실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는 한숨도 자지 않았다.
아예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극도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급기야는 제갈공려가 그녀의 수혈을 점하고서야 잠이 들었다.
지금도 그 두려움은 똑같다.
어릴 때 얻은 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의 두려움과 무림의 고수들이 주는 두려움은 차원이 달랐다.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더해 천산혈랑의 내단으로 인해 얻은 생명이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삶에 대한 집념은 더욱 커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에 조미는 효명의 옆에 붙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꼭 안았다.
“진정하세요, 공주 마마. 아마도 진 호위일 겁니다.”
“진 호위?”
“말발굽 소리가 조금 다르잖아요.”
“혹시 조미도 무공을 배웠어?”
“제가 무슨 무공을 배워요.”
조미는 손을 내저었다.
그때 밖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인, 진대명입니다.”
“거봐요, 내 말 맞죠?”
말을 마친 조미는 마차의 창에 드리워진 천을 걷어 냈다.
그곳에는 서른 중반의 무사 하나가 마차와 속도를 맞춰 말을 몰고 있었다.
그를 확인한 조미가 물었다.
“진 호위님, 무슨 일이시죠?”
“현비 마마의 서찰을 가져 왔습니다.”
“일단 주시죠.”
“여기 있습니다.”
진대명은 두 손으로 서찰을 전달했다.
말고삐를 놓았지만, 말은 진대명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마차와 속도를 맞추었다.
조미는 그 서찰을 공손히 받았다.
인장을 확인한 조미는 효명 공주에게 서찰을 건넸다.
그러고는 천으로 창문을 가렸다.
그때 진대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조미 소저.”
자신을 부르는 말에 조미가 천을 걷었다.
천을 걷자 환하게 웃고 있는 진대명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조미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진대명은 아무렇지 않게 말끔한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평범한 천으로 만든 주머니였다.
진대명은 그것을 전하고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전병입니다. 앞마을에서 사 왔습니다. 마차에서 드십시오.”
“고마워요.”
말을 마친 조미는 다시 천을 내렸다.
그 모습에 효명이 물었다.
“조미는 왜 그래?”
“제가 뭘요? 공주 마마.”
“진 호위가 얼마나 무안하겠어?”
“그 사람이 왜 무안해요?”
“딱 봐도 조미를 좋아해서 저러는 거잖아.”
“에이, 저는 공주 마마를 보시는 시비고 그 사람은 현비 마마를 모시는 호위예요.”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거야?”
“죽을 때까지요.”
“제발 그러지 마, 조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크면 신선 오라버니한테 시집갈 거야. 조미는 빨리 진 호위 낚아채.”
“앗,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진 호위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아무 사이도 아니긴, 왜 모른 척하고 그래. 얼굴이 빨개졌네.”
효명은 조미의 얼굴을 가리켰다.
자신의 얼굴을 만진 조미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일단 그 서찰부터 확인하세요.”
“아, 보나 마나 뻔한데…….”
“그래도 확인해 보셔야죠. 폐하께 덜 꾸중을 들을 방책이라도 적혀 있을지 누가 알아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효명은 자연스럽게 서찰을 펼쳤다.
서찰의 내용을 확인하던 효명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러고는 조미를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미가 다급하게 물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시는 거예요?”
“내용이 이상해서 그러지. 내가 상 받을 일을 한 거야?”
“상이요?”
“여기 적혀 있잖아. 폐하께서 상을 내리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야. 이거 내가 도망갈까 봐 어마마마가 거짓말한 건 아니겠지? 조미.”
“그건 저도 잘…….”
조미도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도 없이 나가서 죽을 뻔했는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을까?
순간 조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 *
소호각에 남은 유생들은 천 조각을 하나씩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들은 조용히 천장을 바라봤다.
촉촉한 자신의 눈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모든 유생이 천장을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수십 마리의 새끼 새가 모이를 받아먹기 위해 목을 길게 빼는 광경과도 같았다.
지금 막 소호각에 들어온 제갈공려는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 황당했다.
제갈공려는 가장 앞에 있던 양석봉에게 다가갔다.
“양 유생, 무슨 일이죠?”
“팽 유생 때문에 그럽니다, 제갈 학사님.”
“혹시 팽 유생이 때렸나요?”
“허, 그런 일이 아닙니다. 팽 유생이 저희에게 증표를 주었습니다.”
“아.”
“이것 보십시오.”
양석봉이 머리끈 조각을 내밀었다.
제갈공려는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했다.
“은혜의 증표를 교환했군요.”
“네, 하나밖에 없으니 이렇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저는 팽 유생이 그렇게 고수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호호, 팽 유생이 조금 실력이 있는 편이긴 하죠.”
제갈공려가 머리끈 조각을 가리켰다.
사실 머리끈을 베어 낸 한 수에 제갈공려도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그것은 토끼 가면과의 대결보다 더 놀라웠다.
천을 베어 낸 한 수에는 수만 가지 변화를 담고 있음을 제갈공려는 알 수 있었다.
제갈공려는 이제까지 한빈을 조사했던 내용을 모두 지워야 했다.
사실 제갈세가에서는 한빈을 하북팽가에서 키운 비밀 병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내린 결론은 달랐다.
하북팽가에서는 사 공자와 같은 고수를 길러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북팽가는 그럴 역량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간단했다.
검날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연마석이었다.
강철을 갈아서 날을 세우기 위해서는 강철이 갈려 나갈 정도의 연마석이 필요하다.
나무로 검날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북팽가에는 팽한빈이라는 검날을 세울 연마석이 없었다.
정의맹의 군사로 있는 그녀의 오라버니가 이야기하기로는 정의맹에서도 도움을 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늘이 내린 기연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제갈공려는 앞으로 그 기연을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때 양석봉이 물었다.
“제갈 학사님은 팽 유생과 잘 아시는 사이입니까?”
“뭐, 인연이 있지요.”
“혹시 팽 유생에게 정인이 있습니까?”
제갈공려는 그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황당한 질문이었다.
순간 제갈공려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주변을 바라봤다.
다른 유생들도 제갈공려의 입술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갈공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지만, 일단 답해 주기로 했다.
“내가 알기로는 없어요.”
“감사합니다, 제갈 학사님.”
양석봉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갈공려의 고개가 한 단계 더 기울어졌다.
오늘따라 양석봉의 눈빛이 더욱 빛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유생들의 눈빛도 똑같았다.
* * *
같은 시각.
서찰을 다 읽은 한빈의 모습에 강유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화산파를 떠나서 황궁에 몸을 담고 있지만, 강호의 사소한 일까지 모두 그의 귀에 들어온다.
과연 무림 역사상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사건에 연관되었던 인물이 있었을까?
강유찬은 단연코 그런 인물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 하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사실, 이제까지의 모든 일들보다 이번 일에 대한 의미가 컸다.
그것은 금의위가 황제의 명을 받아서 쫓던 조직을 일망타진했기 때문이었다.
그 조직을 쫓던 것은 벌써 수십 년이 된 일이었다.
조사가 완벽하게 끝나면 아마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상이 내려질 것이었다.
물론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게도 자세한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황궁의 비밀과 관련된 일이니 말이다.
그때였다.
한빈의 손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화르륵.
순식간에 서찰이 불타오르자 손 위에는 재만 남았다.
“그게 대체 무슨 짓인가?”
“화근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어찌 공주 마마의 서찰이 화근이란 말인가?”
“이 서찰이 남게 되면 강호의 은원에 공주 마마가 휘둘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런 화근은 없애야겠지요.”
“허허, 생각이 깊구먼.”
강유찬은 감탄했다.
이런 면에서 강유찬은 한빈을 좋아하고 있었다.
항상 정도를 걷는 한빈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합리적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감정을 숨기고 상대를 챙기는 모습이었다.
한빈은 강유찬을 보며 작게 웃었다.
“하하.”
사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웃음이었다.
한빈이 서찰을 태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황궁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잘못해서 깊숙이 들어갔다가는 강호와 황궁 중 선택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몰랐다.
거기에 더해 황궁의 법도는 한빈에게 맞지 않은 옷과도 같았다.
강유찬과 한빈이 서로 다른 감정을 숨기며 웃고 있을 때였다.
강유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