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 중원일검(中原一劍) (1)
강유찬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유생들의 시선이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나온 유생은 다름 아닌 양석봉이었다.
양석봉은 한빈에게 포권했다.
포권은 유생들이 쓰지 않은 강호의 인사법.
순간 다른 유생들도 똑같이 포권한 상태로 멈췄다.
그때 양석봉이 허리를 들었다.
양석봉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구명지은(救命之恩)에 감사하네, 팽 유생.”
그 뒤에 모든 유생이 허리를 펴고 양석봉의 말을 따라 했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리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복창하는 모습이 마치 잘 훈련된 병사와 같았다.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양 유생. 그러니 예는 거둬 두십시오.”
“아니오, 팽 유생.”
“괜찮습니다.”
“이건 우리의 마음이니 받아 주시오.”
양석봉은 비장한 표정으로 유생을 나타내는 관을 벗었다.
관을 벗자 상투를 감싼 속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생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두발을 정리한다.
자신의 가문에서 가져온 천으로 상투를 정리하고 그 위로는 속관을 써서 상투를 가린다.
속관의 위에 유생의 신분을 나타내는 관을 쓰는 것이 유림 서원의 법칙이다.
속관은 모두 유림 서원에서 나눠 준 것이었다.
그 의미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유생 간에는 높고 낮음이 없이 평등하다는 것.
두 번째는 대나무와 같은 곧은 성품을 항상 유지하라는 뜻이었다.
한빈은 그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강유찬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그들은 녹색의 속관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휙.
녹색의 속관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이제 천으로 동여맨 그들의 상투가 드러났다.
유생들은 상투를 동여맨 천을 풀었다.
휙.
천을 풀자 머리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순간 양석봉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상투를 동여맸던 천이 들려 있었다.
그 천은 사실 그리 볼품없었다.
평범한 하얀색 천이였다.
하지만 그 천에는 양석봉의 성씨가 쓰여 있었다.
정확히는 안휘양가라는 네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이걸 받아 주시오, 팽 유생.”
“이건 무슨 의미입니까?”
한빈이 양석봉만 들릴 수 있게 속삭이듯 물었다.
이것은 어디선가 들어 본 관습이었다.
유생 신분으로 가문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이 머리끈밖에 없다.
이 머리띠를 준다는 것은 가문을 걸고 상대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선언한 것이라 들었다.
한빈이 질문을 던진 것은 그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정확한 의미를 알고 물건을 받는 것은 거래의 기본이었다.
한빈은 이 관습 자체가 거래라고 생각했다.
물론 한빈의 목소리는 사뭇 포근했다.
이전에 양석봉을 대하는 목소리와는 완벽하게 달랐다.
시선을 마주한 양석봉이 답했다.
“은혜를 갚겠다는 우리 가문의 표식이오. 그러니 이 증표를 받아 주시오.”
정중하게 두 손을 내미는 양석봉.
한빈은 그 머리끈을 받았다.
이어서 유생들이 하나둘씩 한빈을 향해 걸어왔다.
“내 것도 받으시오. 산서최가의 증표요.”
“귀주의 조가도 팽 유생의 은혜를 입었소.”
유생들은 한 명도 빼놓지 않고 그들의 증표를 건넸다.
한빈은 그 증표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머리끈은 무명천으로 된 것부터 비단으로 된 것까지 다양했다.
위세를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어떤 끈은 천잠사로 가문의 이름을 수놓은 것도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강유찬은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실 그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런데 지금 진행되는 행사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강유찬이 봐도 그들의 행동은 순수했으며 경건했다.
마치 옛 성현을 위해 봉향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유생들이 모두 머리끈을 전하자 양석봉이 앞에서 포권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팽 유생.”
“이런 인연을 만들어 주신 천지신명께 감사드립니다. 옛말에 친우만큼 더 큰 아군은 없다고 하지요. 앞으로는 여러분과 제가 관중과 포숙의 인연을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관중과 포숙은 강호인뿐만 아니라 유생들도 인정하는 친우의 좋은 예였다.
오죽하면 관포지교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한빈도 그들을 향해서 포권했다.
고개를 든 한빈이 자신의 관을 벗었다.
그들과 똑같이 속관까지 벗은 한빈이 머리끈을 풀었다.
순간 앞에 서 있던 양석봉이 깜짝 놀라 말했다.
“팽 유생, 지금 그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빈이 갑자기 검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단검 만월이었다.
단검이지만 만월은 기묘한 예기를 뻗어 냈다.
그 냉랭함 앞에 선 양석봉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빈은 자신의 머리끈을 허공에 던졌다.
머리끈이 나풀거리며 천천히 내려온다.
만월을 잡은 한빈의 손이 꿈틀했다.
하지만 만월은 검집에서 뽑혀 나오지 않았다.
양석봉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보기에 한빈은 떨어지는 머리끈을 자르려 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한빈은 그저 움찔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풀거리던 한빈의 머리끈이 바닥에 떨어졌다.
양석봉이 보기에 그저 머리끈을 떨어뜨린 것밖에는 없었다.
아무리 봐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제가 드릴 증표가 하나밖에 없어, 부득이하게 손을 썼습니다.”
“…….”
양석봉은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땅에 떨어진 한빈의 머리끈은 여전히 하나였다.
손을 썼다는 말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감돌고 강유찬이 나섰다.
“팽 공자, 잠시 나 좀 보세.”
“네. 알겠습니다, 대인.”
한빈 일행은 소호각을 빠져나갔다.
점이 되어 사라진 한빈 일행을 보던 양석봉이 조용히 바닥에 떨어진 머리끈을 바라봤다.
양석봉이 고민하는 것은 한빈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아니었다.
한빈이 남긴 증표를 어떻게 나누느냐였다.
그때 최유지가 그의 옆에 다가왔다.
“양 유생, 왜 그러나?”
“팽 공자가 우리에게 증표라고 남기고 갔다네. 그런데 그 증표가 딱 하나밖에 없다네. 이걸 누가 가져가야 될지 모르겠네.”
그 말에 다른 유생들도 다가왔다.
모두가 말없이 한빈이 남긴 머리끈을 바라봤다.
섣불리 자신의 것이라고 우길 수는 없었다.
한빈이 남긴 증표는 그만큼 의미가 컸다.
모두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최유지가 양석봉을 가리켰다.
“일단 자네가 보관하고 있게.”
“내가 보관하라고?”
“팽 유생과 가장 먼저 만난 것이 자네가 아닌가? 우리도 그걸 인정해서 자네를 유생 대표로 정한 것이고.”
“흠.”
양석봉이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그는 실질적인 유생 대표를 맡았다.
최유지와 경합을 벌여서 따낸 자리가 아니었다.
한빈과 가장 먼저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생들이 준 자리였다.
잠시 머리끈을 보던 양석봉이 할 수 없다는 듯 허리를 숙여 머리끈을 잡았다.
그 순간 양석봉의 눈이 커졌다.
“이게 대체…….”
* * *
한빈은 그들을 뒤로하고 소호각에서 빠져나왔다.
강유찬이 별도로 전할 게 있다고 해서였다.
소호각을 빠져 나와 인적이 드문 담벼락 아래에 도착하자 강유찬이 말했다.
“자네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처음 보는군. 안 보는 사이에 많이 변했네그려.”
“저는 변한 게 없습니다, 대인.”
“허허,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네. 내가 보기에 자네는 한 단계 더 성장했네. 무공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자네도 알겠지?”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품성을 보여 줬을 뿐입니다. 본래 실력의 삼 할은 숨기는 법 아니겠습니까?”
“삼 할이나 숨긴다고?”
“뭐, 저는 조금 더 많이 숨기는 편이죠. 제 품성도 숨겼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인.”
“허허, 그런가……. 나는 자네가 그깟 형식적인 인사에 감동할 줄은 몰랐다네.”
“형식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지요.”
“그렇군.”
너무나 태연하게 얘기하는 한빈의 모습에 강유찬은 혀를 찼다.
사실 강유찬은 한빈이 형식적인 증표를 보고 진심으로 기뻐할 줄 몰랐었다.
강유찬이 바라보는 한빈은 증표 대신 계약서를 받아야 만족할 위인이었다.
그런데 증표만 받고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강유찬이 이전에 봤던 한빈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빈이 장사치 같다는 것은 아니었다.
한빈이 행한 모든 일은 대의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거기에 적절한 보상을 얻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의 목숨을 구하고도 별다른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보상이라고는 그들이 자발적으로 전한 증표밖에 없었다.
사실 이 증표도 대단한 것이긴 했다.
유생의 머리끈은 가문을 나타내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문제는 유생 하나하나가 가문을 대표할 처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증표를 통해서 조금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가문의 어른들이 결정할 일이었다.
거기에 한빈도 그들에게 증표를 주었다.
이것은 서로 공평하게 은혜를 교환한 것이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 때,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머리끈들은 어떻게 할까요?”
“가문하고 계약서하고 맞춰서 보관해 놔.”
“네! 딱 맞춰서 보관해 놓을게요, 공자님.”
“그래. 고맙다, 설화야.”
그들의 대화에 강유찬이 눈을 크게 떴다.
“계약서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한참 전에 유생들과 내기를 한 게 있습니다. 그때 제가 필요한 계약서를 챙겼습니다. 왜 그렇게 놀라시죠?”
“아, 아무것도 아닐세. 혹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는가?”
“네. 말씀하시죠, 대인.”
“아까 머리끈을 준 의미는 무엇인가?”
“아, 그건 별 의미 없습니다.”
“의미가 없다라면…….”
“제 머리끈은 정확히 오십 분의 일이지요.”
“흠, 그 정도 되는 것으로 봤네.”
강유찬은 당시 일을 떠올렸다.
한빈은 떨어지는 머리끈을 정확히 오십 등분으로 잘랐다.
물론 강유찬이기에 볼 수 있던 한 수였다.
무공을 모르는 자의 눈에는 그저 움찔한 것으로 보일 터.
단검을 검집에서 빼 들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터였다.
강유찬의 호기심 어린 표정에 한빈이 답했다.
“어찌 머리끈의 오십 분지 일과 온전한 하나가 같을 수 있습니까? 은혜는 그 크기만큼이지요.”
“허.”
강유찬이 입을 벌렸다.
한빈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마음은 나눴지만, 그 양은 동일하지 않다는 말과도 같았다.
강유찬은 고개를 돌리고 표정을 수습했다.
거기에 한빈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강유찬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어찌나 진지한지 한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대인.”
“이걸 받게. 이건 공주 마마의 서찰일세.”
“공주 마마의 서찰이라고요?”
한빈의 손에는 벌써 서찰이 들려 있었다.
서찰을 받은 한빈이 무릎을 꿇었다.
황족에게 받은 하사품에는 어찌 되었든 예를 취하는 게 법도였다.
그때 강유찬이 다급히 한빈을 일으켰다.
“참, 예는 차리지 말라고 한 공주 마마의 분부가 있었네. 일어나게.”
“그럼 편히 읽겠습니다.”
한빈은 조용히 서찰을 펼쳤다.
서찰을 읽던 한빈의 표정이 변화무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