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524화 (510/621)

524. 천외천 (3)

백이 조용히 먼 산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하얀 무복의 사내들이 배 위로 뛰어들었다.

그는 백에게 다가와 포권했다.

“장주님, 그자의 흔적은 없습니다.”

“흔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죄송합니다, 주군.”

“자넬 탓하려는 게 아니네. 생각해 보게.”

“…….”

“흘러가는 강물에서 흔적을 찾기는 힘든 것이 자연의 법칙이네. 흐르는 세월 덕분에 우리 백경이 세상에서 잊힌 것도 마찬가지 이치지.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감사합니다.”

“대신 이곳은 깨끗이 치워 놓게!”

백은 주변을 가리켰다.

불은 완전히 꺼졌지만, 배 위에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하얀 무복의 사내는 그을음을 보고 어깨를 살짝 떨었다.

백의 성격이 얼마나 괴팍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판 위에 있는 그을음을 닦으려면 아예 배를 새로 만드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그는 하얀색이라고 다 같은 하얀색이 아니라는 것을 백으로부터 깨달았다.

완벽한 하얀색이 나올 때까지 그는 갑판을 닦아야 했다.

그것은 전장에서 겪을 전투보다도 더 두려운 일이었다.

과연 어떤 방법을 써야 배를 본래의 색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사내는 선실 쪽으로 사라지는 백을 바라봤다.

백의 옷에 역시나 티끌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백의 발은 갑판에서 살짝 떨어져 있었다.

먼지가 묻는 것이 싫어서 초상비(草上飛)의 수법을 항상 쓰는 사람이었다.

티끌이 묻는 것조차 싫어 항상 호신강기를 두르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백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사내는 품 안을 뒤졌다.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바닥의 그을음을 닦기 시작했다.

조용히 바닥을 닦으며 그는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몇 달 지나지 않은 일이지만, 그에게는 오래전 일들로 느껴졌다.

그의 이름은 위지천.

위씨세가의 직계였다.

하북에서의 일로 가문은 완벽하게 무너졌다.

앞으로 자신이 중원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을까?

아마 당분간은 없을 터였다.

위지천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곳 백경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이제까지 지내던 강호에서 위씨세가는 뱀의 머리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비록 이곳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의 지위는 꼬리에 불과하지만, 백경은 용이었다.

용의 꼬리가 뱀의 머리보다 낫다고 위지천은 판단했다.

용이 꼬리를 한 번 흔들면 천 년 묵은 이무기가 나가떨어지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니까.

* * *

한빈과 백경의 격돌이 있고 난 뒤 반 시진이 지난 만향정.

설화는 팔짱을 끼고 멀리 있는 오룡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화는 마치 석상이 된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반 시진 전 멀리 불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설화의 모습에 청화가 물었다.

“언니, 왜 그래요?”

“공자님이 걱정돼서 그렇지.”

“그런데 공자님은 어디 가신 거예요?”

“낚시하신다고 가셨는데…….”

“공자님이 낚시하러 가셨다고요? 왜 저희한테는 얘기 안 해 줬어요? 저도 낚시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그 낚시가…….”

설화는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곳에는 한빈이 웃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지만, 한빈의 모습은 분명 변화가 있었다.

청운사신의 푸른 도포는 벗어 던지고 본래의 붉은 무복을 입고 있었다.

거기에 외모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정자의 기둥에 기댄 채 한빈은 설화를 보고 있었다.

한빈을 살핀 설화가 다급히 물었다.

“다치신 곳은요?”

“없어.”

“낚싯대는 어디 있어요?”

“물고기가 어찌나 큰지 낚싯대까지 물고 도망쳤지 뭐야.”

한빈이 웃었다.

사실 반은 거짓이었다. 낚싯대를 놓고 도망친 것은 자신이니까.

한빈의 웃음에 설화가 작게 한숨을 토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새는 설화의 어깨 위에 앉았다.

설화는 재빨리 새의 다리에 붙어 있는 전서 통을 뗐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설화는 상자에 들어 있던 작은 벌레 하나를 새의 입에 넣어 주었다.

새가 벌레를 오물오물 씹자 설화가 말했다.

“그만 가도 좋아, 조조야.”

꾸꾸.

새가 설화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울었다.

설화가 손짓하자 새가 푸드덕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그 새는 하오문의 영물인 조조였다.

매를 잡아먹을 정도로 힘이 좋으며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하오문의 영물.

본래는 백미랑이 정보를 받을 때 쓰는 영물이었다.

설화에게도 조조가 갈 수 있도록 백미랑이 훈련을 시킨 상태.

지금 조조가 하오문의 소식을 전해 온 것이다.

조조가 점이 되어 사라지자 설화가 전서 통을 확인했다.

전서 통을 확인한 설화가 다급하게 말했다.

“공자님, 빨리 돌아오시라는데요.”

“그럼 빨리 만향각으로 출발하자.”

“그게 아니라 유림 서원으로 돌아오시래요.”

“유림 서원?”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쯤이면 황궁에서 보낸 군사들이 유림 서원에 도착했을 터였다.

그런데 급히 돌아오라는 것은?

한빈이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음을 뜻했다.

미간을 좁힌 한빈이 말했다

“유림 서원으로 가자.”

“네, 공자님.”

말을 마친 설화가 소군의 허리를 잡았다.

한빈이 먼저 낙엽 밟는 소리를 내며 사라지자, 이어서 설화와 청화도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사사 삭.

유림 서원의 정문.

숨도 쉬지 않고 단순에 유림 서원에 도착한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금의위의 강유찬과 유림 서원의 장유중이 정문 앞에서 초조한 듯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앞에 도착한 한빈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크, 큰일 났네. 유생들이 갇혀 있네!”

장유중이 다급한 눈빛으로 외쳤다.

“갇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가 숨으라고 한 비동 속에서 아직 못 나오고 있네.”

“비동 안이라면……. 만월경의 비동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 나오지 못한다고 말이네. 그런데 그곳의 사정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야.”

장유중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대나무숲이 위치한 곳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입을 벌렸다.

사실 이것은 계산에 넣지 못한 상황이었다.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 비동에서 못 나오는 것도 맞았다.

다만, 열쇠가 없다는 전제하에 말해 준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비동의 열쇠가 단검 만월이라는 점이다.

한빈은 이것을 장유중이나 제갈공려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제갈공려와 장유중 일행은 불당에 있는 밀실에 숨어 있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또한, 나머지 유생들은 비동에 숨어 있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가장 위험한 상황은 비동에 있는 유생들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만약 황궁에서 보낸 병사들이 오기 전에 그들이 나온다면?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지금은 금의위와 황군이 이곳을 장악하고 있다니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그들이 며칠간 비동 속에서 떨었던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한빈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네가 해결한다고…….”

장유중은 눈을 크게 떴다.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 문이 못 열 것이라고 했지만, 한빈이 중간에 비동의 문을 잠시 열었던 것을 기억한 것이다.

장유중이 놀란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유림 서원의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옛 성현을 모신 숨겨진 사당이 있다고 들었다.

그 사당의 주인이야말로 유림 서원의 주인이라는 것이 전설의 서두였다.

장유중은 사당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상상의 산물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수십 년간 후학을 양성했지만, 숨겨진 사당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그 사당을 찾은 것이다.

그 사당은 비동의 안에 있었다.

옛 성현들의 석상과 향로가 놓여 있던 곳은 분명히 사당이었다.

그곳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면 주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주인에 대한 예언이 전설의 끝에 나온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주인이 유림과 황궁 그리고 중원을 구하리라는 이야기였다.

이 유림 서원의 학장을 맡은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전설.

장유중은 황당한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전설을 눈앞에 마주하자 등에 소름이 돋아났다.

전설의 중간은 사람의 입을 거치며 대부분 소실되었다.

장유중은 전설의 중간 부분에 앞으로 중원에 닥칠 큰일들이 나와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즉, 숨겨진 사당의 주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혈겁이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중간 부분에 천외천이란 단어만 전해질 뿐이었다.

장유중의 눈빛을 본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들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장유중은 말끝을 흐렸다.

한빈에게 괜한 걱정을 안겨 주기 싫어서였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일단 저는 비동에 있는 유생부터 꺼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바람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 삭.

* * *

다음 날.

소호각에 모든 유생이 모였다.

금의위는 유림 서원의 구석구석을 뒤져서 실종된 유생을 찾아냈다.

유생으로 변장한 정체불명의 세력들은 모두 개봉으로 압송된 상태.

다행히도 진짜 유생들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채 발견되었다.

지금 소호각에서 금의위의 강유찬이 직접 그들을 하나하나 검사하고 있었다.

비동에서 나온 유생들은 어제 한곳에 모여 밤을 지새웠고, 이곳에서 본래의 얼굴인지를 검사하고 있었다.

그 검사를 돕는 것은 역시 한빈이었다.

강유찬의 옆에 있던 한빈이 최유지를 바라봤다.

“아 해 보시죠.”

“아.”

최유지가 입을 벌리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맞습니다.”

“통과.”

강유찬이 최유지를 향해 손짓했다.

모든 검사가 끝나자 강유찬이 말했다.

“노고수처럼 노련하다더니, 변장술에도 일가견이 있군. 팽 공자.”

“아닙니다. 모든 게 어깨너머로 배운 잡기에 불과합니다.”

“흠, 치아를 보고 사람을 구분한다는 생각은 나도 못 했네.”

“강호에서 새로 유행하는 검사법입니다. 모든 것은 속여도 치아까지 속일 수는 없는 법이죠.”

한빈이 씩 웃었다.

치아를 보고 구별하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무림인의 치아는 유생들과는 전혀 달랐다.

항상 이를 악물고 수련하는 무림인들의 특성상 치아는 닳아 있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더해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만 확인해도 유생인지 무림인인지 판단이 가능하다.

한빈의 웃음에 강유찬이 말을 이었다.

“하하,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는가?”

“말씀하시지요.”

“이번에는 어떤 선물을 받고 싶나?”

“선물이라니요?”

“효명 공주와 유림 서원을 구하지 않았나?”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간 많은 선물을 받은 것은 사실이 아닌가? 이왕이면 원하는 선물을 받는 것이 좋지 않은가? 내 황제 폐하께 건의해 볼 테니……. 탁 터놓고 말해 보게.”

“저는 그렇게 간 큰 사람이 아닙니다. 유림 서원에서의 인연이면 족합니다.”

“이곳에서의 인연이라…….”

강유찬이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순간 강유찬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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