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 천외천 (2)
검을 뽑은 초아가 기수식을 취했다.
그때 옆에 있던 백이 그녀에게 검을 던졌다.
휙.
반사적으로 검을 받은 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백이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 검을 쓰거라.”
“이건 장주님의 검 아니에요?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건 조금…….”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 법이다.”
그들의 말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내가 닭과 토끼가 됐구려.”
“그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노인장.”
백이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순간 초아라 불린 여인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제 검은 빙백검. 만년빙정을 깎아 만든 검이에요. 아마 고통은 없을 거예요.”
“빙백검이라…….”
“들어 보셨군요?”
“처음 들어 보오.”
“…….”
“그런데 나도 마찬가지네. 메뚜기를 잡는 데 칼을 쓸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나?”
“그게 무슨 말이죠?”
“나는 이거면 충분할 것 같네.”
한빈은 탁자에 기대 놓은 낚싯대를 들었다.
그 모습에 초아가 웃었다.
“풉.”
“비웃는군.”
“당신처럼 여유를 부리던 자도 얼마 전 죽었지요……. 심장이 꿰뚫린 채.”
“누군지 몰라도 운이 없었군.”
한빈이 피식 웃었다.
아마도 그녀가 말하는 사람은 적룡대협인 것 같았다.
상대를 속인 것은 확실하고 이제 마지막 한 수를 준비할 때였다.
한빈의 웃음에 초아가 미간을 좁혔다.
“능청맞게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이래 봬도 젊은 시절에는 제법 인기를 끌던 웃음이라네. 그런데 우리 내기 하나 하는 게 어떤가?”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죠?”
“내가 이기면 그 약을 내게 주게.”
“내가 이기면요?”
“당연히 내 목숨을 주지.”
한빈이 미소 짓자 초아가 말했다.
“청운사신이 제게 내기를 걸어오다니 놀랍네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당신의 위명은 귀가 따갑게 들었어요. 이제 당신을 제거한다면 제 임무는 끝이 나는 거네요. 참, 이 약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복용할 수 있는 거니 탐내지 마세요.”
“탐낸다면?”
한빈이 묻자 초아가 피식 웃었다.
“뭐, 그렇다면 한번 시험해 보시든지요?”
말을 마친 초아가 검을 뽑았다.
한빈은 빙백검이라는 명칭에 대해서 이해가 되었다.
만년빙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허세이지만, 아직 검집에서 검을 뽑지 않았어도 한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실 한빈이 놀란 것은 빙백검이 아니었다.
빙백검의 한기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던 백이라는 사내였다.
그의 손에 있었을 때는 한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을 떠나자 빙백검이 한기를 배출하고 있는 것.
그녀가 검집에서 빙백검을 뽑으려 할 때였다.
한빈이 재빨리 낚싯대를 던졌다.
‘백발백중!’
낚싯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빙백검을 향했다.
낚아챌 듯 달려오는 낚싯줄을 본 초아가 검집을 들었다.
순간 낚싯줄이 방향을 바꾸었다.
휙!
낚싯줄이 뱀처럼 휘어지자 초아가 검집을 비틀었다.
검집을 낚아채려 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다시 낚싯줄이 휘어졌다.
동시에 그녀의 허리에 있는 약병을 감았다.
스르륵.
한빈은 백발백중에 성동격서의 초식을 섞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빈의 손에 하얀색 약병이 들어왔다.
한빈은 재빨리 약병을 품에 넣었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있는 술병을 잡았다.
백아주가 담긴 술병이었다.
한빈은 그 술병을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순간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보통 연기가 아니라 검은 연기였다.
연기가 갑판 위를 뒤덮을 때 한빈이 외쳤다.
“이건 서역에서 들여온 흑유에 먹을 섞은 연막이라네! 조금 있으면 가라앉을 걸세!”
“지금 무슨 짓이지?”
“이 연기가 가라앉고 나면 흑유와 먹물이 이 배에 눌어붙겠지. 내 예상대로라면 꽤 지저분해지겠지. 아마도 백경이란 이름이 무색해질 것일세.”
“…….”
검은 연막 속에서 아무 대답도 없었다.
대신 검을 뽑는 소리만 울렸다.
스르릉!
그 소리와 함께 검기가 휘몰아쳤다.
파바방!
휘몰아치는 검기는 검은 연기를 모두 잡아먹었다.
한빈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초아가 물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인가요? 청운사신.”
“강호에 이런 말이 있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라고.”
“지금 미친 건가요?”
“누군가에게 물어보니 백경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더군.”
“뭐라고요?”
“전설 속의 백경이란 문파는 티끌만큼의 오점도 남기지 않는다고.”
“흠.”
“그래서 오점을 남겨 주려고 선물을 준비했지.”
한빈이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에는 검은색 점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빙백검의 검기가 검은색 연기를 모두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한빈의 말은 전생에 정의맹 서고에서 본 것이었다.
순백을 추종하는 백경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사실 이것은 한빈이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토끼 가면조차 겨우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
그런데 지금은 백이라는 사내가 옆에 있었다.
과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보험으로 한빈은 끈적거리는 연막탄을 준비했다.
흑유로 만든 연막탄은 백아주가 든 호리병 밑에 숨어 있었다.
그때 백이 소리 질렀다.
“즉살(卽殺)!”
짧게 외친 그는 흥분한 듯 눈빛이 떨리고 있었다.
청운사신이란 이름에도 담담하던 태도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던 것이다.
그는 바닥에 묻은 흑유를 피해 뒤쪽으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결벽증이 있는 듯싶었다.
그에게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더러운 것을 못 보는 결벽증이 백의 최대 약점인 것이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초아라는 시녀가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유림 서원에 토끼 가면을 쓴 초아가 아니라 백이 왔다면 한빈의 목숨은 끝장날 수도 있었다.
어찌 보면 불행 중 다행인 상황.
그때였다.
초아가 품에서 죽통을 꺼냈다.
꺼낸 죽통을 하늘 높이 던진다.
휙.
태양을 꿰뚫을 듯 올라가던 죽통이 터졌다.
팡!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하얀 불꽃.
아무래도 위기일 때 보내는 신호 같았다.
이제 한빈은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적이 오기 전에 튀는 것이 맞았다.
사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한빈이 진정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백이라는 사내의 몸에 빛나는 점이었다.
재미있게도 백색의 점과 투명한 점과 황금빛 점이 곳곳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이건 구결을 품고 있는 광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저런 자라면 연무장에서 온종일 검을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의 목숨.
여기에서 욕심을 내다가는 현생이 끝장날 수도 있었다.
저자를 마주하게 된다면 조금 더 수련한 뒤가 될 것이었다.
그때였다.
한빈은 묘한 분위기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사방에서 살기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을 바라보니 선실에서 하얀 무복의 무사들이 줄줄이 걸어 나왔다.
거기에 더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루터에 하얀 무복의 무사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한빈도 저리 많은 인원이 대기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기척을 완벽하게 숨긴 상태로 선실에 숨어 있었다는 것은 토끼 가면과 비슷한 경지라는 점이다.
한빈은 한숨을 쉬었다.
“휴.”
“이제 포기하는 건가요?”
“포기해야지 어떻게 하겠나? 백경에 대해 알아보는 건 이만하고 그만 가 보겠네.”
한빈은 조용히 돌아섰다.
순간 초아가 빙백검을 들고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어딜!”
내공이 담긴 외침이었다.
순간 한빈이 낚싯대를 바닥에 꽂았다.
낚싯대가 하얀 갑판을 뚫고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대나무처럼 일직선으로 섰다.
모두가 이상한 한빈의 행동에 놀랄 때였다.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한빈의 손에서 작은 불길이 일었다.
그 불길이 낚싯줄에 옮겨붙었다.
낚싯줄을 타고 불꽃이 움직인다.
치지직.
낚싯줄이 도화선이 된 듯 타들어 가자, 모두가 뒤로 물러섰다.
한빈은 그들이 왜 물러서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화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더러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한빈이 외쳤다.
“알아서 끄든지 말든지 나는 상관 안 하겠네!”
말을 마친 한빈은 몸을 날렸다.
휙.
그때 백과 초아가 달려들었다.
백도 달려들었다.
초아가 멀어지는 한빈을 향해 빙백검을 날렸다.
동시에 백이 타들어 가는 심지를 잘라 냈다.
초아의 빙백검이 한빈의 등에 가까워지려 할 때였다.
갑판에 박힌 낚싯대가 터졌다.
쿠아앙!
굉음을 내며 선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갑판에 놓였던 하얀색 탁자가 허공으로 솟아오르더니 바로 떨어졌다.
팡!
그 불길은 배 위로 번져 나갔다.
이전에 바닥에 깔렸던 흑유에 불이 옮겨붙은 것.
한빈은 멀어지는 갑판을 바라봤다.
이어서 귓가에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첨벙.
한빈의 시야를 찰랑거리는 강물이 가렸다.
백경은 강 가운데 한빈을 남겨 둔 채 점점 멀어져 갔다.
처음에 확 일어났던 불꽃은 이내 잠잠해졌다.
화경급의 고수가 저리 모여 있는데 그깟 불 하나를 통제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물론 흑유의 특성상 쉽게 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빈은 강 속에서 허공을 바라봤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천급 구결 종(從)을 획득하셨습니다.]
[천급 – 유(類), 유(類), 종(從)]
이것은 뜻밖의 횡재였다.
마지막 폭발로 얻은 구결이었다.
어쨌든 한빈의 공격으로 백이 상처를 입은 것은 분명했다.
물속에서 한빈은 입맛을 다셨다.
“쩝, 아깝긴 하네.”
이 말은 진심이었다.
낚싯대에 들어 있던 것은 사천당가의 당무천이 위급할 때만 쓰라고 준 화약인 뇌력탄이었다.
같은 크기라면 진천뢰의 열 배에 이르는 위력을 갖춘 폭탄.
그때였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새로운 글귀가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지금 확인하시겠습니까?]
한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글귀가 바뀌었다.
[용린의 주인에게 알려 드립니다. 천급 초식 열 개를 모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강호에 흩어진 구결을 모으십시오.]
* * *
백경의 갑판 위.
백의 하얀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의 소매였다.
소매에는 검은색 얼룩이 묻어 있었다.
얼룩을 확인한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살기를 피워 냈다.
그의 주변에서 일렁이는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 옆에 있던 초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장주님…….”
“됐다.”
백이 고개를 흔들자 초아가 말했다.
“청운사신은 제 손으로 없애겠습니다.”
“그자는 청운사신이 아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장주님?”
“그렇게 교활한 놈이 정파일 리가 없지 않으냐?”
“복장으로 봐서는 그자가 맞아요.”
“아니다. 우리가 쫓는 걸 알 리도 없고 거기에 맞춰서 제 발로 걸어올 리는 더더욱 가능성이 없다. 그리고 그자는 내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어.”
백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당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그를 낚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자신이 낚인 것이 맞았다.
과연 그는 대체 누굴까?
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아서였다.
백의 표정을 본 초아가 물었다.
“그럼 대체 누군가요?”
“아마도 그들이 아닐까 싶다.”
“그건 협정에서 벗어나잖아요.”
“우리가 여기에 온 것도 협정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는 매한가지지. 백 년을 기다렸는데 내가 너무 성급한 것일 수도…….”
백은 먼 산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