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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21화 (619/621)

521. 강태공이 된 한빈 (7)

모두가 놀란 가운데 음마혈녀가 정중하게 포권했다.

“주군을 뵙니다.”

“그만 되었으니 보고부터! 참, 기척부터 죽이지 그래?”

“네, 알겠습니다. 주군.”

순간 음마혈녀의 기세가 눈 녹듯 사라졌다.

모두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에는 죽일 듯 달려오던 음마혈녀가 한빈의 앞에서 순한 양이 되어 버린 것.

설화와 청화도 눈을 크게 뜨고 당황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됐지?”

“여기 있어요. 주군.”

음마혈녀가 지도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지도에는 몇 개의 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한빈은 지도에 적혀 있는 곳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럼 그자가 마지막에 향할 곳은 오룡강(五龍江)이군.”

“아마 그럴 듯싶습니다.”

“그럼 그만 가 보도록.”

“다음 보고는…….”

“반년에 한 번씩 자료를 이곳에 갖다 놓도록.”

한빈이 정자를 가리키자 음마혈녀가 깊숙이 포권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참, 백경이라고 들어 봤나?”

“전설 속의 문파가 아닌가요? 주군.”

“그런가……. 자네와 관계없는 조직이군.”

“네, 저희는 잘 모릅니다.”

고개 숙인 음마혈녀가 막 돌아서려는 순간 한빈이 말했다.

“참, 이것도 가져가도록 해.”

한빈은 음마혈녀에게 뭔가를 던졌다.

휙.

음마혈녀가 재빨리 허공에서 물건을 낚아챘다.

그러고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주군.”

음마혈녀는 한빈이 던진 물건을 허리에 있는 주머니에 넣었다.

한빈이 던진 것은 다름 아닌 그녀가 마지막 대결에서 썼던 응조수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음마혈녀는 한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빈은 지도의 뒷면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한빈이 조사하도록 지시한 내용이 빼곡히 차 있었다.

한빈은 오른손에 진기를 불어 넣었다.

순간 지도에 불이 붙었다.

화르륵.

순식간에 지도는 잿더미가 되었다.

한빈이 확인한 내용은 다른 이들은 모르는 것이 좋았다.

설화와 청화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한빈은 손 위에 잿더미를 털어 낸 후 조용히 멀리 있는 강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설화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고, 공자님,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우릴 도와줄 사람을 구했을 뿐이야.”

“그게 음마혈녀예요?”

“그렇지.”

“제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에요. 제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저 마두가 공자님의 종이 되었느냐예요.”

“뭐, 싸우다 보면 정이 든다는 말이 있지.”

“그,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요? 공자님.”

“싸우다 보면 원래 가족이 되는 법이지. 설화 너도 처음에는 나와 싸웠잖아.”

“네?”

설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한빈이 물었다.

“기억 안 나?”

“음.”

설화가 팔짱을 끼고 과거를 떠올렸다.

그것도 잠시, 설화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이 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것이다.

한빈이 청화를 바라봤다.

시선을 마주친 청화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도 한빈과 검을 맞댄 기억이 있었다.

다만 그 인연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해 본 설화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한빈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에게는 처참한 외모와 온몸에 퍼져 자신의 정신까지 갉아먹던 맹독만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가족을 찾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고.

물론 설화도 마찬가지였다.

한빈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범한 살수로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살수 생활이 평범하다라?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이것은 설화의 진심이었다.

살수 생활이 평범하게 느껴질 만큼 한빈의 곁에 있으면서 겪었던 이들은 파란만장했으니 말이다.

설화와 청화가 존경 어린 시선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소군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도 좋다.”

“저는 안 싸웠는데요. 저도 싸워야 하나요?”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

“저는 안 싸울래요.”

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한빈이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가 한빈에게 짐을 내민다.

하얀색 천으로 싸인 기다란 물건이었다.

하얀 천을 들춰내면 마치 장창이 들어 있을 법한 길이였다.

한빈은 천을 펼쳐 내용물을 확인했다.

천을 들춰내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낚싯대였다.

이 낚싯대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장만한 것이다.

한빈은 낚싯대를 어깨에 걸친 채 돌아섰다.

설화가 다급하게 물었다.

“진짜 낚시 다녀오시게요?”

“먹음직스러운 물고기가 노닌다는 곳이 있으니 확인해 봐야겠지.”

“혼자 가셔도 괜찮겠어요?”

“이번에는 나 혼자 갔다 오마. 그동안 여기서 잠시 쉬고 있거라.”

“네. 알았어요, 공자님.”

설화가 고개를 숙이자 한빈이 낙엽 밟는 소리만 남기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 삭.

홀연히 사라진 한빈의 모습을 보던 소군이 물었다.

“언니들, 공자님은 진짜 신선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효명인가? 그 애가 공자님보고 신선이라고 했잖아요.”

“그럴지도…….”

설화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청화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룡강 하류.

오룡강은 다섯 마리의 용이 뒤엉킨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높은 산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면 희미하지만, 용의 형상으로 보인다.

용이 뒤엉켰다는 것은 그만큼 강의 지형이 험하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는 상선이 지나가지 않는다.

물론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이 조용한 곳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굽이굽이 휘몰아치는 역동적인 급류를 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는 풍류객들은 제법 많았다.

오룡강의 주변에는 뾰족한 암석이 여기저기 솟아 있었다.

다만 지금 보이는 나루터 주변은 평지에 가까웠다.

덕분에 나루터 주변으로는 다루와 객잔이 제법 보였다.

한빈은 다루와 객잔을 지나쳐 낚싯대를 어깨에 걸쳐 멘 채 조용히 나루터로 걸어갔다.

나루터 옆에 걸터앉은 한빈은 조용히 낚싯대를 드리웠다.

첨벙.

바로 낚싯대가 휘청인다.

물고기가 미끼를 문 것이 아니었다.

급류 때문에 휘청이는 것이다.

사실, 이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이는 한빈밖에 없었다.

한빈은 품속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어 한 모금 들이켰다.

주향에 취한 듯 허허롭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앞의 낚싯대에는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심한 듯 허공을 바라보고 있지만, 한빈은 시간을 허투루 허비하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용린검법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낚싯대가 흔들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급류 때문이었다.

한빈을 비추던 그림자가 서서히 기울어 가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한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터벅터벅.

그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한빈은 모른 채 낚싯대에 집중했다.

그자는 인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거기에 투박한 발소리로 봐서 무인도 아닌 듯했다.

물론 한빈은 그자가 풍기는 분위기를 믿지 않았다.

한빈도 누가 본다면 물고기도 잡히지 않는 오룡강에 낚싯대를 드리운 정신 나간 노인에 불과했다.

한빈은 청운사신의 복장 그대로였다.

사실 청운사신의 복장이라고는 하나 푸른 도포에 수염을 붙인 것뿐이다.

거기에 변장 도구를 이용해 변화를 주어 나이가 들어 보이게 만든 것.

검이 아닌 낚싯대를 들고 있으니 그저 평범한 노인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자는 한빈의 옆에 멈췄다.

그는 한빈의 옆에 앉아 말을 건넸다.

“물고기는 잘 잡히십니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낚싯대를 들고 있는 것조차 힘들구려.”

한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있는 것은 젊은 사내였다.

변장하기 전 한빈의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잡티 하나 없는 피부에 가지런히 넘겨 묶은 머리.

거기에 하얀색 무복을 걸치고 있었다.

복장이 너무 깨끗해서 내려오던 먼지가 쓱 하고 미끄러질 정도의 분위기였다.

이곳까지 오기에는 꽤 길이 험했을 텐데 그의 무복은 오염된 것이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신발이었다.

신발에도 티끌만큼의 먼지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객잔이나 다루에서 걸어온다 해도 먼지가 묻을 터.

이렇게 깨끗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젊은 사내가 말했다.

“저는 백이라 합니다.”

“백이라……. 성이 어떻게 되시오?”

“성씨는 밝힐 수 없습니다. 어르신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운이라 하오. 성은 까먹은 지 오래라서 밝힐 수 없으니 이해하기 바라네.”

“하하, 맞받아치시는 걸 보면 아직 정정하신가 봅니다.”

“혹시 이 늙은이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물고기를 잡는 방법이 하도 이상해서 와 봤습니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구먼.”

“미끼도 없고, 곧게 펴져 있는 것은 마치 바느질할 때 쓰는 바늘 같아 보입니다. 그러니 제가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그렇소만…….”

“할 수 있는 게 이런 낚시밖에 없다는 말씀인가요?”

“여기에서 물고기를 잡는다 해도 나는 건져 올리지 못하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백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호기심이 동한 듯 눈을 반짝이는 백.

한빈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이곳 오룡강의 물고기들이 힘이 좋기로 유명하다는 것은 자네도 알 것 아닌가? 운 좋게 고기가 미끼를 문다고 해도 나는 그 물고기를 건져 올리지 못할 것이네. 아마 낚싯대마저 잃어버리겠지.”

“오호, 말이 되는군요.”

“그러니 물고기가 미끼를 물지 못하도록 곧은 바늘을 쓰는 것일세.”

“저는 세월을 낚는다는 태공망이 현세에 내려온 줄 줄 알았습니다.”

“낚을 수만 있다면 좋지. 그런데 그건 불가능한 일 아니겠나. 이 술 한잔 들겠나?”

“그건 무슨 술입니까? 그러지 않아도 코끝이 간지러웠습니다.”

“여기 오다 주운 백아주네.”

한빈이 흰색 호리병을 내밀자 백이 잡았다.

백이 호리병을 잡고 막 들이켜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뿌-앙!

그 소리에 나루터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나팔소리가 나는 곳에서는 배 한 척이 천천히 나루터로 오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그 배는 하얀색 점으로 보였다.

하얀색 점이 점점 가까워졌다.

신기한 것은 거친 물살에도 하얀색 배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경공을 펼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만의 특수한 항해법이 있을 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얀 돛에 쓰여 있는 글자에 한빈은 미간을 좁혔다.

백경(白鯨).

이전에 위지천과 위지약을 데려갔던 그 조직.

그리고 토끼 가면이 속해 있는 전설의 문파였다.

그때 백이 한빈에게 아쉬운 듯 말했다.

“이제 배가 왔으니 저는 돌아가야 할 듯싶습니다.”

아쉬운 표정으로 백이 호리병을 건넸다.

한빈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됐네. 내가 마실 수 있는 건 한 모금일세. 자네가 가져가서 먹게. 내 실수로 뚜껑도 깨져 버려 그냥 놔두면 주향이 다 날아가 버릴 것일세.”

“그래도 되겠습니까?”

백이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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