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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20화 (618/621)
  • 520. 강태공이 된 한빈 (6)

    한빈이 눈을 빛내자 잔혈마창은 말을 이었다.

    “아마도 복수가 먼저일 것 같습니다.”

    “복수라…….”

    “신교의 마통으로 옭아매고 소마군을 해치려던 무리입니다.”

    “확실하오?”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쯤 되니, 한빈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마교 내에 십대세가를 전복시키려던 암제와 같은 인물이 있다는 가정이었다.

    순간 한빈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바라봤다.

    용린검법의 심화편이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화편]

    [……]

    [지(智) : 이십사(二十四)]

    지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지의 구결도 다른 구결과 마찬가지로 쓰면 줄어드는 것이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생각이 정리된 것이다.

    그때 잔혈마창이 말했다.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소마군의 치료에 쓰일 천산혈랑이 도망칠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소마군께서 당할 일도 없었겠죠.”

    “천산혈랑의 일은 미안하게 됐소.”

    “청운사신께서 왜 그 일을 미안해합니까?”

    “중원에서 벌어진 일이니 미안하다는 거요.”

    “알고 보면 잔혈마도의 잘못도 있었습니다. 그는 마통을 극복하지 못했으니까요. 마통의 다른 이름이 마희(魔喜)입니다.”

    “마희라……. 처음 들어 보는군.”

    “극심한 고통 때문에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겁니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그게 고통인지 쾌감인지 애매한 경계에 이르게 되죠.”

    “그런 이유가 있었군.”

    “잔혈이란 별호가 저희의 앞에 붙은 이유가 바로 그 고통 때문입니다. 마도, 그 친구의 경우는 본래 성정이 다소 거친 편이긴 했습니다. 그러니까…….”

    잔혈마창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을 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제법 길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한빈이 물었다.

    “교의 일이 정리되고 나면 어떻게 할 것이오?”

    “저희는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이전에 선언했던 봉문을 연장할 것입니다. 아마도 백 년 정도가 되겠지요.”

    “백 년이라…….”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잔혈마창을 바라봤다.

    한빈은 그의 진의를 알고 싶었다.

    시선을 마주한 잔혈마창이 답했다.

    “신교가 회복하기까지는 아마 백 년도 부족할 듯싶습니다.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저희가 누군가에게 싸움을 걸기에는 너무 큰 손실을 보았습니다. 이건 교주께서도 약속한 일입니다, 청운사신.”

    “내게 이렇게까지 소상히 말해 주는 이유는 무엇이오?”

    “당신이 소마군을 구한 게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이 정파의 얼굴이라 들었습니다.”

    “낯간지럽군.”

    “모든 세인이 말하더군요. 적룡대협은 사파의 기둥이고, 청운사신은 정파의 얼굴이라고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오. 믿겠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대의 말을 믿겠다는 말이오. 돕지는 못해도 방해는 하지 않겠소.”

    한빈은 강호의 노고수처럼 수염을 쓸어내렸다.

    “소마군을 구해 주신 것만 해도 도와주신 겁니다. 우리 마교인은 은혜와 원한은 열 배로 갚습니다.”

    “열 배라…….”

    “혹시 잔혈마도에 대한 원한도 갚을 것이오?”

    한빈은 확인해야 했다.

    앞서 잔혈마도의 잘못이 있다고 말했지만, 원한은 다른 문제였다.

    “그 원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잔혈마창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조금 전 스스로의 입으로 은혜와 원한은 열 배로 갚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빈의 표정을 본 잔혈마창이 말을 이었다.

    “잔혈마도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하나 남은 천산혈랑을 추격 중일 겁니다.”

    “그는 죽었다고 들었소.”

    “아닙니다. 제가 이곳까지 오며 추격한 것은 소마군의 흔적뿐이 아닙니다. 저는 잔혈마도의 흔적도 찾아냈습니다.”

    “그는 분명히 영단산에서 죽었다고 들었는데…….”

    물론 들은 게 아니라 본 것이다.

    잔혈마창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게 바로 증거입니다.”

    잔혈마창이 자신의 소매를 걷었다.

    그의 팔뚝에는 기다란 붉은 뱀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힘줄이었다.

    팔뚝을 타고 내려오는 붉은 힘줄.

    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사흔(生死痕)이군.”

    “네, 맞습니다.”

    “그대의 의형제가 맞나 보군.”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한빈이 다시 수염을 쓸어내렸다.

    생사흔(生死痕)을 새기는 것은 마교의 의식 중 하나였다.

    유비가 관우와 장비와 함께 도원결의를 했듯, 마교인들은 의형제를 맺을 때 술을 마신다.

    다만, 술잔에 탄 것은 피가 아닌 생사충(生死蟲)이라 불리는 한 쌍의 고독을 각자의 술잔에 넣는다.

    물론 그들이 술잔에 탄 생사충에 독성은 없다.

    다만, 상대의 생사에 따라 색이 바뀐다.

    둘 중 하나라도 죽게 된다면 남은 생사충은 검은색으로 변한다.

    검은색으로 변할 때 그들이 느끼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지금 잔혈마창이 말한 마통의 고통이라고 한다.

    색의 변화와 고통으로 죽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생사흔.

    팔뚝에 자리 잡은 기다란 붉은색 힘줄이 바로 생사충일 것이다.

    그 색이 아직 붉다는 것은 잔혈마도가 살아 있음을 뜻한다.

    한빈도 생사흔이 상대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는지는 확인한 바 없다.

    전생에 정의맹 장서각에 남아 있는 자료를 봤을 뿐이다.

    사실 한빈은 그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서로의 복부에 도검을 꽂은 상태에서 강물에 빠졌다.

    그런 상태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한빈도 살았으니 반드시 죽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잠시 상념에 빠졌던 한빈이 물었다.

    “잔혈마도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 같소?”

    “흔적을 보면 천산혈랑을 찾아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북쪽이라면…….”

    한빈은 어딘가를 바라봤다.

    이곳이 밀실이긴 해도 탁월한 방향감각 덕분에 방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한빈이 바라보는 곳은 북해빙궁이 있는 곳이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잔혈마창이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북해빙궁 쪽입니다. 아마도 짝을 잃은 천산혈랑은 본능적으로 북해빙궁으로 향했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군. 자네는 그럼 북해빙궁으로 갈 텐가, 마창?”

    “아무래도 그래야 할 듯싶습니다. 저를 그냥 마원이라 불러 주십시오, 청운사신.”

    “마원이라…….”

    “그게 제 본명입니다. 아무래도 잔혈마창이란 별호보다는 더 친숙할 듯싶습니다, 청운사신.”

    잔혈마창 마원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힐끔 소군을 바라봤다.

    소군을 바라본 마원은 고민에 빠진 듯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소군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눈을 빛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고민이 있으면 말해 보게.”

    “소마군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마령지체가 깨진 소마군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백성과 다름없습니다. 아마도 북쪽의 찬바람을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럼 내가 자네가 올 동안 맡아 주면 된다는 이야기인가?”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청운사신.”

    “좋네. 다만!”

    말을 끊은 한빈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에 마원이 다급히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조건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행하겠습니다.”

    “목숨은 필요 없다네.”

    말을 마친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설화가 나타났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한빈의 앞에 지필묵이 든 보따리를 풀었다.

    재빠르게 붓을 든 한빈.

    마원의 눈이 커졌다.

    붓놀림이 마치 검을 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빈의 붓끝은 일말의 자비란 없었다.

    붓끝이 한지 위를 유린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원이 감탄하고 있을 때 한빈이 붓을 놓았다.

    탁.

    한빈은 조용히 종이를 마원 쪽으로 내밀었다.

    마원은 그의 필체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필체를 감사하던 마원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한숨을 토해 낸 마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조건입니까?”

    “맞네. 이걸 들어줄 수 있으면 내가 소마군을 맡겠네.”

    “당신은 대체…….”

    마원이 말끝을 흐렸다.

    * * *

    두 시진 후.

    그들은 군자현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정자에서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 정자의 이름은 만향정.

    만향각의 금미랑이 세운 정자였다.

    제법 험한 지형에 자리 잡고 있어서 행인들이 만향각에 들를 일은 없었다.

    뒤쪽으로는 까마득한 절벽이 있으며, 앞쪽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가끔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는 번듯한 정자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소군은 한빈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봐서 시간을 가늠하는 듯 보였다.

    누군가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누굴 기다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빈이 소군을 바라봤다.

    “후회하지 않느냐?”

    “마원 아저씨의 말대로 이곳이 안전한 것 같아요. 공자님만 괜찮으시다면…….”

    소군이 말끝을 흐렸다.

    한빈은 아무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일까?

    만향각에서 잔혈마창 마원은 한빈의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소군에게 마지막으로 의향을 물어봤다.

    소군도 역시 한빈의 곁에 남는다고 했다.

    그러고는 계약서에 소군도 서명했다.

    한빈은 그 순간 당황한 마원의 모습을 보았다.

    마교의 서열상 소군은 교주의 바로 아래라고 한다.

    마원이 서명했을 때에는 그가 들어주지 못할 부탁은 목숨으로 대치할 수 있지만, 소군이 서명했을 때는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이다.

    한빈이 다시 물었다.

    “내가 후회하지 않느냐는 말은 서명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책임감에 대한 기억은 없는걸요.”

    소군이 배시시 웃었다.

    지금 보면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한빈은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령지체를 회복하지 못한 지금의 모습이 더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옆에 있던 설화가 소군의 볼을 잡아당겼다.

    “네가 안 떠나서 다행이다.”

    “앗, 언니. 잡아당기지 말아요. 피부 늘어나요.”

    “너는 아직 괜찮아.”

    “청화 언니가 지금부터 신경 써야 한다고 가르쳐 줬어요.”

    소군이 청화를 가리켰다.

    청화는 행복한 표정으로 떡을 베어 물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나무숲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몰아쳤다.

    기세가 점점 가까워진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음산한 바람이 대나무숲을 빠져나와 정자에 닿을 정도였다.

    그 기세에 한빈을 제외한 모두가 병장기를 뽑았다.

    스릉.

    한빈이 한 발 앞으로 나서 그들을 제지했다.

    “다들 진정하고 뒤쪽으로 물러서라.”

    한빈의 말에 설화와 청화 그리고 소군이 재빨리 한빈의 뒤쪽에 자리 잡았다.

    한빈에게 가까워지자 기세는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점점 다가오는 신형.

    뒤쪽에 있던 설화가 놀라 외쳤다.

    “음양쌍마!”

    그 모습에 한빈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쉿.”

    순간 앞으로 튀어 나가려던 설화가 중심을 잃었다.

    휘청이던 설화를 소군과 청화가 잡았다.

    웬만해서는 평정심을 잃은 적이 없는 설화였다.

    그녀가 당황하자 청화와 소군마저 표정을 굳혔다.

    모두가 긴장한 듯 상대를 바라봤다.

    상대는 음양쌍마 중 음마혈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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