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강태공이 된 한빈 (4)
한빈의 소매를 잡아끈 소군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소군이 가리킨 곳은 밀실의 구석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그곳으로 향했다.
소군이 그곳을 가리킨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은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구석으로 간 한빈은 내기를 끌어올렸다.
순간 다른 이들의 말소리가 끊겼다.
기막으로 완벽하게 공간을 분리한 것이다.
하지만 소군은 아직도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자, 이제 안심하고 말해도 좋다.”
“네, 공자님. 아무래도 오늘 일은 저 때문에 일어난 느낌이 들어서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는 중원인들이 마교라 부르는 신교 사람이에요.”
“그건 이미 알고 있었고.”
“네?”
소군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날 그렇게 마기를 피워 냈는데, 어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하지만 첫날을 제외하고는 네게 마기를 느끼지 못했어. 아마도 거기엔 이유가 있겠지.”
“흠, 어떻게 아셨어요?”
“느낌이지.”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자 소군이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제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거예요. 공자님께 다 말씀드리고 싶어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것도 대충 알고 있는 일이다, 소군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네 필체 말이다. 그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지. 아마도 너는 누군가에게 체계적인 수업을 받았을 거야. 기억이 나지 않아도 너는 천자문뿐 아니라 사서삼경까지 전부 익혔을 가능성이 크다. 무공뿐 아니라 학문까지 익힌 걸 보면 대충 신교에서의 네 신분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저를…….”
“그 이유는 간단해. 네가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요?”
“그 이유 하나면 충분하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 웃음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소군은 정마대전의 열쇠가 되는 아이였다. 이 아이의 미래에 따라서 정마대전이 아예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소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지금 기억 하나가 떠올랐어요.”
“무슨 기억이지?”
“아까 밖에서 창을 쓰던 신교인 말이에요. 저를 죽이러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저를 구하러 온 것 같아요. 그런데 허무하게…….”
“잔혈마창을 말하는군.”
“아까 창을 쓰던 그 아저씨 맞아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저를 구하러 온 것 같아요. 그 사람한테 물어보면 정확한 제 사정을 알 것 같아요, 공자님.”
“…….”
“그런데 이미 늦었겠죠. 아까 보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니던데요.”
“아직 늦지 않았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소군의 눈이 커졌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밖을 가리켰다.
“잠시 밖에 나갔다 오자.”
“어디를요?”
“그냥 조용히 따라오너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빈은 기막을 풀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와 동시에 설화가 바람처럼 한빈의 곁에 나타났다.
“공자님, 여기 준비됐어요.”
“고맙다, 설화야.”
한빈이 씩 웃으며 설화가 풀어놓은 보따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인피면구를 비롯한 변장 도구가 들어 있었다.
한빈은 보따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장유중이 제갈공려가 물었다.
“팽 공자, 어딜 가시는 거죠?”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제갈 누님.”
“바람이라니요?”
“뭐, 사정이 생겼습니다. 제갈 누님께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을는지요?”
“말씀하시죠, 팽 공자.”
“여기 계신 분들의 안전을 좀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걸릴 듯해서 말입니다.”
“이곳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황궁의 병사가 도착하기까지는 넉넉잡아 이틀입니다. 이틀 정도만 부탁드립니다.”
“그러지요.”
제갈공려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은 장유중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시선을 마주한 장유중이 재빨리 달려왔다.
사실 장유중도 한빈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사건이 이어지자 그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다.
조금 전에는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세상을 하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장유중이 재빨리 물었다.
“팽 유생, 무슨 일인가?”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유림 서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학장님.”
“유림 서원이라…….”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수업을 계속 진행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한빈이 이것을 묻는 이유는 간단했다.
무려 무림 세력 세 개가 충돌한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빈과 제갈공려가 정파의 사람이니 세 개의 무림 세력이 아니라 네 개의 무림 세력이 되는 것이다.
정파와 마교 그리고 혈교와 백경.
그중 혈교와 백경은 아직 실체도 파악하지 못한 세력이었다.
거기에 혈교는 효명 공주까지 납치하려 했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황궁 입장에서는 모두가 무림인.
만약 정확한 판단을 하지 않고 싹 다 무림인으로 몰아서 생각한다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이 중원의 기둥으로 자리 잡은 정파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천하 십대세가와 구대문파는 황제에게 눈엣가시가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이 적의 노림수일 수도 있었다.
그 시작은 바로 유림 서원의 처리가 될 것이다.
유림 서원의 수업이 아무 일 없듯 진행된다면 한빈이 걱정할 일이 없을 것.
하지만 반대로 유림 서원이 문 닫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다음 표적은 무림이 될 것이었다.
한빈은 그것을 묻고 있다.
장유중이 가벼운 기침을 뱉은 후 말을 이었다.
“흠, 어려운 질문이군. 이건 내가 쉽사리 결정 내릴 문제는 아닐세. 하지만!”
장유중이 눈을 빛내자 한빈이 말했다.
“네, 말씀하시지요.”
“자네에게는 시험과 관계없이 최고 점수를 주겠네. 그리고 자네가 관직에 나간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추천해 줄 마음도 있네. 그리고…….”
장유중은 끊임없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한빈이 알고 싶은 내용은 회피하고 전혀 관계없는 설명을 이어 나가는 장유중.
한빈은 조용히 허공을 올려다봤다.
[알 수 없는 구결 : 일(一)]
알 수 없는 구결이라?
실체를 파악하기 전까지는 개수만 보이는 듯했다.
왠지 천급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구결일 듯싶었다.
천급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구결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문제는 저 구결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기다리다 보면 저 구결을 확인할 방법을 가르쳐 줄 터였다.
그때가 과연 언제 오느냐가 문제.
한빈이 고민하고 있을 때, 장유중의 말이 끝났다.
“……내가 얘기할 것은 여기까지일세. 생각이 있는가? 팽 유생. 나는 말일세, 자네는 무공보다 학문에 매진해야 한다 생각하네.”
“말씀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럼 잘 생각해 보게. 자네 같은 인재가 검이 아닌 붓을 든다고 생각하니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네그려.”
장유중이 활짝 웃자 한빈이 답했다.
“저는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장유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이들은 멀어지는 한빈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 * *
불당을 나온 한빈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유생의 모습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피에 전 의복을 벗어 던지고 푸른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거기에 수염까지 달고 있었다.
청운사신으로 변장한 것이다.
그 옆에 있던 소군도 사내아이로 변장하고 있었다.
소군에게는 유생 복장을 입혔다.
소군은 적응이 안 되는 듯 연신 머리를 매만졌다.
그것을 보고 있던 설화가 소군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만지면 공들여서 꾸며 놓은 게 다 흐트러지잖아.”
“죄, 죄송해요. 언니.”
소군이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설화가 말했다.
“마음이 어지러워 보이네.”
“…….”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야, 소군아.”
“…….”
“우린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공자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돼.”
“아무 생각 없이요?”
“나도 전에 그랬으니까…….”
설화는 조용히 먼 산을 바라봤다.
마치 도를 깨친 신선과 같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소군은 더는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그때 설화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설화의 손에는 당과가 들려 있었다.
“일단 이거 하나 먹고.”
“네. 고마워요, 언니.”
소군이 설화가 건넨 당과를 받았다.
순간 청화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왜 나는 안 줘요? 설화 언니.”
“이제 한 개만 남았는데…….”
설화가 말끝을 흐렸다.
조금 전에 도를 깨친 것 같은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은 당과를 좋아하는 옆집 언니 같은 평범한 모습이었다.
설화가 마지막 남은 당과 꼬치를 청화에게 건네며 볼을 부풀렷다.
그 모습에 소군이 피식 웃었다.
한빈은 뒤쪽에서 종알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걸어갔다.
아무렇지 않게 걷는 것 같아도 한빈은 기감을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기감뿐이 아니었다.
내공을 코끝에 집중한 덕분에 후각도 최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한빈이 이렇게 조심하는 이유는 앞서 상대한 토끼 가면, 즉 백경의 무인 때문이었다.
한참을 걷던 한빈은 전각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토끼 가면이 흘리고 간 향기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남긴 향기의 흔적은 만월경에서부터 담장 밖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의 목표가 적룡대협 하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였다.
만약 그의 목표가 다른 이였다면 그토록 쉽게 떠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한빈이 알아낸 것은 거기까지였다.
사실 한빈이 진짜 궁금한 것은 만월을 쏘아 낸 직후 보인 토끼 가면의 행동이었다.
그는 한빈의 죽음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무공에 대한 자신감일까?
그것은 아닐 것 같았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한다면?
한빈이라면 상대의 죽음을 확인하고 자리를 떠났을 터다.
그가 그토록 빨리 자리를 뜬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한빈은 지금 그의 흔적을 살피며 그 이유를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흔적만으로 그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만 떠올렸을 뿐이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따라오던 소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 길은 만월경으로 가는 길이잖아요, 공자님.”
“그래, 지금 우리는 만월경으로 가고 있다.”
“거긴 왜요?”
“잔혈마창에게 너에 대해서 물어봐야지. 그래야 이번 사건의 수수께끼 중 하나가 풀리니까.”
“수수께끼요?”
“잔혈마창이 이곳에 왜 왔는가 하는 의문이지.”
말을 마친 한빈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구걸십팔보를 펼친 것이다.
한빈이 있던 자리에는 낙엽만이 흩날리고 있었다.
소군이 멍하니 있자 설화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도 빨리 가 보자.”
“저는 아직 경공을…….”
소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설화의 손에 이끌려 봇짐처럼 끌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화는 소군이 대답도 하기 전에 구걸십팔보를 펼치며 만월경을 향해 달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만월경에 도착한 소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비명을 질렀다.
“앗, 공자님!”
그녀가 소리친 이유는 한빈의 행동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