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강태공이 된 한빈 (3)
한빈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행히 작전은 성공입니다.”
“작전이 성공이라니 그게…….”
장혜화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적의 시선을 돌리는 데는 성공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죽은 척을 했죠?”
“그럼 그냥 거기서 죽습니까?”
“네?”
“상대가 강한데 어떻게 합니까?”
“…….”
장혜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정체불명의 괴인들과 싸우던 한빈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무인이었다.
침을 꼴깍 삼킨 장혜화가 물었다.
“무림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죽고 나면 무공이 무슨 소용인가요? 일단 살고 봐야죠.”
환하게 웃는 한빈의 모습에 장혜화는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때 설화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공자님, 가슴에 꽂힌 단검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 이거…….”
한빈은 피식 웃으며 손을 가슴에서 뗐다.
그러고는 설화의 앞에 만월을 보였다.
설화는 만월과 한빈의 가슴을 번갈아 봤다.
피가 번져 있긴 했지만, 한빈의 가슴에는 상처가 없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만월에 묻은 피를 소매에 닦아 냈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대체 그 피는 뭐예요? 공자님.”
“그건 설화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러고 보니…….”
설화가 자신의 보따리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돼지 피 맞죠? 그럼 토끼 가면에게 피를 뿜으셨던 건…….”
“그건 진짜 내 피야. 이번에는 죽을 뻔했다, 설화야.”
“대체 마지막 공격을 당하고도 어떻게 상처 하나 없으신 거예요?”
“그건…….”
“비밀이죠?”
“비밀은 아니고……. 찾으려던 걸 찾았어.”
“물건을 찾으셨다고요?”
설화의 눈이 커졌다.
순간 설화의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갔다.
비동의 향로가 넘어지고 한빈이 나타났을 때의 상황을 떠올린 것이다.
설화의 표정을 본 한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만월경과 연결된 비동에서 목표로 했던 무림 칠대기보를 찾았다.
사실 이것은 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향로가 쓰러지고 모든 조명이 꺼지자 생각지도 못한 통로가 나타난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낯선 어둠이지만, 한빈에게는 대낮처럼 익숙했다.
바로 구결 중 안(眼)의 효용 때문이었다.
안의 구결은 동체 시력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서 사물을 구별할 수 있는 이능도 안겨다 주었기 때문이다.
사물을 잘 구별하는 사람에게 흔히 ‘눈이 밝다’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한빈의 눈은 말 그대로 밝았다.
그 밝은 눈으로 숨겨진 통로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만약 한빈이 아니라면?
그리고 적이 향로를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목표를 찾는 데에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손에 넣은 것이 무림 칠대기보 중 하나인 천수현갑이었다.
이로써 한빈은 용린과 만월 그리고 진사쌍검에 천수현갑까지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비동에서 발견된 천수현갑은 거북이의 등껍질처럼 단단했다.
이것을 어떻게 착용할지 한빈은 고민했었다.
곧 한빈은 그것이 고민거리가 안 된다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자신의 몸에 대니 거북이의 등껍질 같은 갑옷이 부드럽게 변했다.
한빈은 그 자리에서 천수현갑을 입었다.
재미있는 것은 천수현갑을 입자 거북이 등껍질처럼 칙칙했던 갑옷의 색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마치 한빈의 원래 피부처럼 살구색으로 말이다.
한빈은 이것이 왜 무림 칠대기보 중 하나로 불리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전설의 신수인 현무의 등껍질로 만들어졌다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천수현갑은 어떤 도검의 공격도 막아 주는 갑옷이었다.
물론 심장이 뚫리지는 않지만, 목이 달아나는 것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천수현갑이 막아 주는 것은 한정적이었다.
토끼 가면이 만월을 쏘아 낸 마지막 한 수가 심장으로 향했기에 망정이지, 얼굴로 날아왔다면 한빈은 연극이 아닌 실제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수도 있었다.
마지막 토끼 가면이 던진 한 수는 마치 해일이 밀려들어 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천수현갑을 입지 않았다면 한빈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만월이 한빈의 가슴에 가까워지자 천수현갑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한곳으로 몰렸다.
천수현갑은 마치 고수가 금나수를 펼치듯 만월을 받아 낸 것이다.
그 소리는 마치 가슴이 뚫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한빈은 만월이 가슴에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단검을 빼내기 위해 노력하는 듯한 자세였다.
그 상태에서 한빈은 새로 얻은 천급 구결인 유유자적을 펼쳤다.
그야말로 완벽한 죽음이었다.
그때 청화가 다시 물었다.
“그럼 토끼 가면을 쓴 고수는 공자님이 죽은 줄 알겠네요?”
“뭐 그자가 날 보고 적룡이라 했으니, 적룡대협이 죽을 줄 알겠지.”
“그럼 이제 안심해도 되는 거예요?”
“나는 적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번거로운 판을 짠 거다. 이번만 해도 효명 공주를 죽이려고 온 혈교의 무리, 그리고 적룡을 노리고 온…….”
한빈이 말끝을 흐리자 청화가 다시 물었다.
“그 토끼 가면은 대체 어느 문파인가요?”
“새외 세력.”
“새외 세력이요?”
“새외 세력 중에서도 백 년 전 사라졌다는 조직.”
말을 마친 한빈은 자신의 다른 손을 청화에게 내밀었다.
한빈은 천 쪼가리 하나를 잡고 있었다.
그것은 토끼 가면의 소매에서 뜯어낸 천이었다.
청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게 뭐예요?”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 청화야.”
“그럼…….”
청화는 천을 받아 들었다.
천의 재질은 비단, 색은 평범한 하얀색이었다.
본래의 하얀색이 아닌 염료를 써서 인위적으로 순백으로 물들인 것 같았다.
“눈처럼 하얀색의 옷감에……. 여기 글자가 쓰여 있네요. 백경(白鯨)?”
순간, 제갈공려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백경이라고요?”
그녀가 끼어들자 청화가 찢긴 천을 건넸다.
백경이란 두 글자를 확인한 제갈공려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곳도 잠시, 그녀는 한빈을 바라봤다.
“네, 맞습니다. 등선해서 신선이 되면 하늘 위로는 구름을 타고 다니고 물에서는 하얀 고래를 타고 다닌다는 전설의 문파입니다. 제가 제갈공민 군사님께 그 문파에 대한 조사를 부탁드렸었죠.”
“흠.”
“지난번에 주신 서신에는 그 답장이 적혀 있더군요.”
“사실 저도 몰래 펴 봤어요, 팽 공자.”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는 제갈세가 사람들 아닌가요? 호기심은 학문의 근본이지요. 이해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백경이라 칭했죠.”
“서신에 의하면 북해빙궁에서 떨어져 나온 조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새외 세력이라 할 수 있겠죠.”
“그들이 왜?”
“지난번 만근교에서 위지약과 위지천을 데려간 게 바로 백경입니다. 아마도 암제의 뒷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한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그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한빈은 어색한 침묵을 잠깐 방관했다.
모두가 호흡조차 멈출 정도로 긴장하고 있을 때, 한빈이 눈을 빛냈다.
“이번 일에는 백경 하나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음양쌍마는 혈교의 일원이지요. 혈교라면 백 년 전에 사라진 조직입니다.”
“일단 정의맹에 보고해야겠군요.”
“그건 차후의 문제고, 일단 저는 토끼 가면의 행방을 추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바로 이것 덕분에 가능하지요.”
한빈이 환약 하나를 내밀자 제갈공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가요? 팽 공자.”
“이건 만리추종향입니다. 저는 이걸 그놈에게 철저히 발라 놨습니다.”
한빈이 씩 웃었다.
정확히는 그냥 묻힌 것이 아니라 한빈의 선혈에 섞어서 상대에게 뱉었다.
이제는 토끼 가면이 근처에 나타나면 아무리 기척을 숨긴다 해도 바로 알아챌 수가 있었다.
제갈공려가 말했다.
“방법은 묻지 않을게요. 영업 비밀이라고 할 게 분명하니까요.”
“잘 아시는군요, 제갈 누님.”
한빈이 씩 웃을 때였다.
멍하니 대화를 지켜 보고 있던 효명 공주가 달려왔다.
몇 발짝 안 뛰었는데도 살짝 숨을 몰아쉬는 효명 공주.
그녀는 한빈을 바라보며 조용히 포권했다.
“인사드려요, 신선 오라버니. 저는 효명이라고 해요.”
“지난번에 인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서원에는 왜 오신 겁니까?”
질책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효명이 밝게 웃었다.
“그게 미안하단…….”
“미안하다고요?”
“그, 그게 아니라…….”
효명은 말끝을 흐렸다.
한빈과 신선 오라버니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도 까먹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한빈에게 사과하러 온 것이었다.
신선 오라버니라는 사람을 좋아하니 자신을 잊어 달라고 말이다.
물론 한빈이 듣는다면 미쳐 팔딱 뛸 일이었다.
한빈과 효명 공주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으니 말이다.
효명 공주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스스로 묘한 상황을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가장 큰 위기가 처했다.
지금쯤이면 황궁에서 하북팽가로 보낸 서찰이 도착할 때.
서찰의 내용은 간단했다.
한빈에게 유림 서원의 입학을 권한 것은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서였지, 부마로 삼으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변명과 같은 내용이었다.
효명은 유림 서원에 도착해 한빈이 신선 오라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 하북팽가를 향한 서신의 존재는 아예 까먹고 있었다.
효명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유중에게 달려갔다.
“장유중 학장님.”
“공주 마마, 말씀하십시오.”
“저, 전서구가 필요해요!”
“전서구라니요? 이미 봉화를 확인했습니다. 황궁에서 병사들이 도착할 겁니다.”
“그, 그게 아니라 개인적으로 전서구를 보내야 해요.”
그때 한빈이 효명 공주에게 다가왔다.
“그건 안 됩니다.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외부와의 연락은 일절 금합니다.”
“지, 진짜 급한 일이에요.”
“그럼 직접 서원 밖으로 나가서 구하시지요.”
“아.”
효명 공주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은 그런 효명 공주를 뒤로한 채 조용히 앞을 바라봤다.
새로 눈앞에 뜬 문구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었다.
죽음을 위장했을 때 만약 토끼 가면이 달려들었다면 한빈은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마지막 수를 펼쳤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는 한빈의 예상대로 적의 죽음을 확신하고 자취를 감췄다.
한빈은 이제부터 그의 흔적을 추적할 생각이다.
목수가 대패로 나무를 깎아 내듯 적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 낼 터였다.
한빈이 제일 참지 못하는 것이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이었다.
적은 자신을 아는데, 자신은 적을 모른다면?
이보다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일은 없었다.
이제는 반대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전에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다.
눈앞에 뜬 문구 때문이었다.
천급 초식 유유자적을 완성했을 때 한빈은 새로운 문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구결을 획득하셨습니다.]
[알 수 없는 구결 : 일(一)]
이것은 아직 눈앞에 남아 있는 문구였다.
토끼 가면에게 획득한 구결은 천급 구결 유(悠)만이 아니었던 것.
더 큰 보상이 존재한다는 용린검법의 안내가 정확했다.
다만 알 수 없는 구결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한빈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소군이 한빈의 소매를 잡아끌었기 때문이다.